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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중심 거리, 세종로. 그 자리를 이순신 장군상이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자리가 이순신과 무슨 인연이 있는 것일까. 박정희에게나 물어보라고?
ⓒ 권기봉
충무공 이순신(忠武公 李舜臣). 대한민국에서 나고 자라거나 귀화한 사람이라면 모를 리 없는 조선의 명장. 잠시 그의 파란만장했던 생을 들여다보자.

결코 순탄치 않았던 이순신의 무관 생활은 그가 32세 되던 해인 선조(宣祖) 9년, 즉 1576년 식년무과(式年武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면서 시작된다.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練院奉事)라는 관직을 시작으로 함경도 동구비보권관(董仇非堡權管), 발포수군만호(鉢浦水軍萬戶), 조산보만호(造山堡萬戶) 등을 거쳐, 선조 24년인 1591년에는 유성룡(柳成龍)의 천거로 절충장군(折衝將軍)·진도군수에 오른다.

이어 같은 해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로 승진, 여수에 있던 좌수영(左水營)에 부임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의 나이 48세 되던 1592년 4월 13일, 왜군이 부산에 상륙함으로써 파란만장한 이순신의 군 인생은 그 절정을 맞이한다. 임진왜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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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이 세종로를 접수한 까닭

왜군이 부산진에 상륙한 바로 다음날인 14일 부산진이 왜군의 수중에 떨어진 데 이어 15일에는 동래성, 5월 3일에는 서울마저 함락된다.

그러나 옥포와 한산도 등에서 왜의 군함을 깨뜨리기 시작한 이순신은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에 오르지만 원균(元均)의 모함으로 서울로 압송된다. 당시 사형을 당할 지경에까지 이르나 우의정 정탁(鄭琢)의 도움으로 도원수 권율(權慄) 밑에서 두 번째 백의종군을 시작한다.

▲ 서울 중구 초동 18-5번지. 명보프라자가 있는 이곳에 ‘충무공 이순신 생가터’라는 이름의 표지석이 한 기 서있다. 이곳이 정말 이순신이 태어난 곳일까?
ⓒ 권기봉
적전분열이 진행되는 동안 왜군은 다시 대한해협을 건너기 시작하고(정묘재란, 1597년), 결국 많지 않은 수의 병사와 전함으로 명량과 노량 등에서 왜군을 맞아 싸우던 이순신은 54세를 일기로 노량에서 숨을 거둔다. 1598년 11월 19일의 일이다.

그가 가고 남은 것은 성역화된 사당과 쓸쓸한 동상뿐

이순신 자신도 가고 7년여의 기나긴 전쟁도 끝난 이후,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과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에 이어 좌의정과 영의정 등으로 그의 품계가 높아졌다고 한다.

하지만 그로부터 400여 년이 지난 2003년 현재 그에 대한 기억은 그저 남해 일대와 1968년 박정희에 의해 성역화된 충남 아산 현충사(이순신이 세상을 뜬 지 108년이 지난 1706년 숙종(肅宗)이 이순신의 넋을 기리기 위해 사당을 짓고 '현충사(顯忠祠)'라는 현판을 내림) 정도에 머무르고 있다.

좀더 관심이 있는 이라면 충무 충렬사(忠烈祠)나 여수 충민사(忠愍祠) 등을 떠올릴지도 모를 일이나,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도 역시인 '나라의 수도' 서울과 관련해서는 그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물론 '우리나라 중심 거리' 세종로 한복판의 이순신 장군상이나 길 이름 '충무로' 등 이순신과 관련된 것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 중 이순신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것은 없다는 것.

특히 전자의 경우 원래 이승만 동상이 있던 자리를 세종대왕 동상이 대체했지만 상무(尙武) 정신을 숭상하던 박정희에 의해 이순신 장군상으로 다시 바뀐 것에 불과하다.

엉뚱한 곳에 서 있는 표지석

오는 28일(월)은 충무공 이순신이 세상에 난 지 꼭 458년째 되는 날로, 그는 인종(仁宗) 원년인 1545년 4월 28일 지금의 서울인 한성부 건천동(乾川洞)에서 아버지 이정(李貞)의 네 아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인 중 하나로 꼽히는 인물, 이순신. 그가 주로 활동했던 무대는 물살 거센 남해라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나라의 수도'인 서울에 그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때 서울로 '압송'된 적도 있지 않다던가.

▲ 엉뚱한 위치에 서있는 ‘충무공 이순신 생가터’ 표지석. 사람이 많이 지나다니는 길 위에 세워두고 싶었을 것이라고 이해해보려 해도 정확한 위치를 지적해주지 않아 사람들로 하여금 오해하게끔 한다.
ⓒ 권기봉
낮이나 밤이나 홀로 쓸쓸히 세종로를 지키고 있는 동상이나 영화 보러 가는 충무로 말고, 그가 나고 어린 시절을 보낸 생가터가 있다기에 길을 나섰다. 굳이 발품 들여 남해나 아산까지 갈 필요도 없을 뿐더러 이순신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곳이기에 감회가 남다르다.

그러나 그 자리를 찾아가는 여정은 시작부터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이순신이 태어난 집터가 있다는 건천동. 당시 문헌에 따르면 건천동이라는 지명을 가진 동네가 두 군데 있었다고 하는데, 남산 밑과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뒤편의 낙산 일대가 그곳이다.

이에 대해 서울시 문화재위원 김영상씨 등이 하천 수량이나 주변 지세 등을 근거로 판단하건대 남산 밑, 즉 지금의 중구 인현동(仁峴洞) 일대가 이순신이 태어난 건천동이라고 판단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중구문화원 김동주씨의 설명이다.

실제로 남산 밑 '명보프라자' 앞에는 서울시에서 세운 '충무공 이순신 생가터' 표지석 한 기가 서 있다. 다시 말해 이곳이 바로 이순신 장군이 태어난 집이 있었다는 뜻이다. 검은 바탕의 표지석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충무공 이순신 생가터(Site of Yi Sunsin's Birthplace) - 이순신(1545~1598)은 조선 중기 명장이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당시 옥포, 한산도 등에서 해전을 승리로 이끌어 국가를 위기에서 건져냈다. 선조 31년(1598) 노량에서 전사하였으며, 글에도 능하여 <난중일기>를 비롯하여 시조와 한시 등을 많이 남겼다."

그러나 지난 번 <문화유산답사 49> 그는 제일은행에 폭탄을 던진 적이 없다의 경우처럼 '충무공 이순신 생가터' 표지석이 서있는 서울 중구 초동 18-5번지는 실제로 이순신이 태어난 곳이 아니다.

김동주씨에 따르면 "이순신이 태어난 조선시대의 건천동은 지금의 인현동1가 40번지 부근을 가리키는데, 1956년 12월 5일 한글학회와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에서 답사해 고증한 바 있다"는 것이다.

이는 곧 표지석이 놓여 있는 초동 18-5번지와 이순신의 생가가 있었다던 인현동1가 40번지는 각기 다른 곳이기에, 표지석 자체가 엉뚱한 곳에 놓여 있다는 얘기가 된다.

그가 태어난 곳은 '명보프라자' 아닌 '애정다방'

▲ 1956년 12월 5일 한글학회와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에서 답사한 바에 따르면 인현동1가 40번지가 이순신의 생가터라 한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인현동1가 40번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 권기봉
처음부터 어긋나는가 싶더니만 역시나 <문화유산답사 60> 명동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없었다
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인현동1가 40번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인현동1가에 38번지나 39번지, 41번지와 42번지 등은 있었지만, 그 사이에 있어야 할 40번지는 전혀 찾을 수 없었다.

동네 부동산 중개소나 근처 동사무소 등을 찾아가 물어보아도 역시 "모른다"는 대답뿐, '인현동1가 40번지'는 마치 증발해 버린 듯했다. 그러기를 몇 시간, 동네를 이리저리 헤맨 끝에 이 동네에서 32년째 살고 있다는 임정섭씨(63)를 만날 수 있었다.

"을지로교회 지나서 저쪽 애정다방으로 가봐요. 거기가 이순신 장군이 태어난 곳이지……."

가뭄 끝에 단비를 만난 심정이었다. 임정섭씨가 말한 '애정다방' 맞은 편에서 '금호식품'을 15년째 경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현동1가와 40년 인연을 맺어오고 있다는 조천선씨(65) 역시 애정다방 자리가 이순신의 생가가 있던 터임을 확인해주었다.

그러면 인현동1가 40번지는 어데 가고 갑자기 '인현동1가 31-2번지'가 이순신의 생가터로 둔갑한 것일까? 사연인즉 소화(昭和) 17년인 지난 1942년 40번지와 31-2, 32-2번지 등이 31-2번지로 합병되었다는 것이다. 중구청 지적과의 말이다.

▲ 인현동1가 40번지는 소화(昭和) 17년인 지난 1942년 31-2번지와 32-2번지 등과 함께 31-2번지로 합병되었다. 즉 지금은 인현동1가 31-2번지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애정다방이 길손을 기다릴 것이다.
ⓒ 권기봉
실제로 31-2번지에 들어선 빌딩의 소유주 김정수씨(53)는 "35년 전 이 빌딩을 짓기 전에는 40번지였다는 말을 들어본 적 있다"며 "이 자리가 이순신 장군의 생가가 있었던 곳이라는 이야기를, 어머니한테 들었다"고 기억을 더듬었다.

역사상 최고의 군인… 그러나 아쉬움

몇 시간의 헤맴 끝에 이순신의 생가 위치를 직접 확인했다는 기쁨도 잠시, 안타까운 생각이 밀려온다. 많은 사람들이 지나 다니는 네거리 길목에 표지석을 세우고 싶어 했을 것이라고 '좋게' 생각해 보아도 역시 찝찝하다는 생각이다.

그런 선의로 표지석을 세웠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의 괜한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기 위해 정확한 생가터의 위치를 표시해 두거나 간단하게나마 지도를 새겨둘 법도 하다. 그러나 현실을 그렇지 못했다.

실제의 이순신 생가 자리에 아무런 표지석이나 안내판이 없다는 것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문제는 역사상 가장 뛰어난 군인 중 하나라고 칭송해 마지않는 이가 태어난 곳에 대해 이렇게 무심할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기자가 과문한 탓인지 '기록을 위해 기계를 돌린다'는 인쇄소가 특히 많은 이 지역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노인들 말고는, 이순신이 태어난 생가터에 대해 알고 있는 이를 찾아볼 수 없었다. 게다가 해당 지역을 담당하는 행정 관청에서조차 이순신 생가터의 존재 자체를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

▲ 인현동1가 31-2번지 ‘고은손 카드방’ 앞에는 주춧돌이 하나 박혀 있다. 시간상 이순신 생가의 그것으로 볼 수는 없으나 현대식 빌딩 앞의 주춧돌 한 기는 여러 상상을 가능케 한다. 건물주는 왜 저 주춧돌을 남겨 두었을까?
ⓒ 권기봉
물론 이 자리에다가 요즘 또 다시 세간에 오르내리는 누구의 기념관 같은 건물이나 뭐 거창한 기념물 따위를 세우자는 말이 아니다. 다만 이제라도 더 늦기 전에 작은 기록만이라도 남길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다.

인간의 기억에 의지하는 시대가 이미 물 건너간 지 오래이거늘, 아직도 우리 주위에는 기록보다 인간의 기억에 의지하려는 모습이 눈에 띈다. 그러나 60대 초로들이 세상을 떠나면 이제는 누가 그 기억을 다시 기억할 것인가.

지금 필요한 것은 소박하나마 작은 표지석 하나 세워 간단하나마 기록을 남기는 일이다. 이제 10년, 20년 후면 말 그대로 기억 속에 묻혀 버릴 지도 모를 것이 인간의 기억이다. 지금도 손목시계는 쉬지 않고 돌고 있다.

‘이순신 장군 집터 표지석’과 ‘실제 집터’ 찾아가는 방법
명보프라자 앞에서 혼동 말 것!

지하철 3호선과 4호선이 지나는 충무로역에서 내리자. 명보네거리 쪽으로 나가 ‘명보프라자’ 앞에 서자. 지하철역에서 5분이면 충분한 거리다. 명보프라자 바로 앞에 ‘충무공 이순신 생가터’ 표지석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위에서 말했든 정확한 위치는 아니다.

이제 실제 이순신의 생가터를 찾아가 보자. 표지석이 있는 명보네거리에서 중구청 쪽으로 걷자. 약 100m 정도 걸으면 ‘동아장식’과 ‘고은손 카드방’을 발견할 수 있고, 그 사이로 난 골목길이 보일 것이다. 그 골목으로 들어서자. 차례로 ‘신우사’와 ‘영보지류유통’, ‘향원다방’을 지나치면 이전에 보았던 ‘고은손 카드방’과 같은 이름의 상점이 나타난다. 바로 그 자리가 1545년 4월 28일 이순신이 태어난 집이 있던 자리이다. 이 빌딩에 '애정다방‘ 등도 입주해 있으므로 다시 한번 이 건물이 맞나 확인해 보자.
/ 권기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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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기억 저편에 존재하는 근현대 문화유산을 찾아 발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저서로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알마, 2008), <다시, 서울을 걷다>(알마, 2012), <권기봉의 도시산책>(알마, 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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