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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8년 5월 준공된 대한의원 건물이다. 적벽돌에 바로크식 첨탑이 인상적인 이 건물은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248호로 지금까지 남아 있는 거의 유일한 대한제국 당시 병원 건물이다.
ⓒ 권기봉
9.11테러로 탄저균이 세상을 흉흉하게 하더니 요즘에는 중국발 괴질이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한다. 이들이 무서운 이유는 '죄 없어도 운 나쁘면' 걸리는 전염병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탄저균이야 미리 예방백신을 맞으면 된다지만 중국 광둥성을 시작으로 전 세계로 퍼져나가고 있는 괴질은, 4월 1일 현재 15개국에 걸쳐 감염자 1873명, 사망자 63명에 이른다는데 아직 원인조차 밝혀지지 않았다니 당황할 만하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아직 국내에서 중국발 괴질이나 기타 전염병이 나타났다는 보고가 없다는 것 정도일 것이다. 상황에 따라 언제 괴질 발병 소식이 들려올지는 모르는 일이나, 그 동안 식중독은 종종 발병했어도 전염병 소식은 그다지 듣질 못했다. 그래서인지 어느 정도 안도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 같긴 하지만 우리가 전염병의 공포로부터 벗어난 지는 그리 오래 되지 않는다.

그저 먼 옛날 얘기 같지만 1821년 서울 주변에서만 13만명이 사망했고, 이듬해에도 전국적으로 수십만명이, 1859년부터 1860년까지 40만 명, 게다가 1895년에도 30만명 정도가 콜레라(호열)에 의해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콜레라에 의한 사망자 수만 이 정도이니 당시 다른 각종 전염병으로 세상을 등진 이의 수가 결코 적지 않음을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현종이 즉위한 17세기 중엽부터 철종이 승하한 19세기 중엽까지 약 2백년간 전염병 피해가 컸던 해만 꼽아도 79차례에 달한다니, 전염병으로 사망한 사람들의 수는 그저 상상에 맡길 따름이다. 물론 '전염병'이라는 것이 요즘에는 자주 듣기 힘든 용어가 되긴 했지만, 부모님 세대 때만 해도 이른바 "학을 뗀다"는 말을 낳은 말라리아(학질)나 "조용히 보내 드리고 싶은 손님" 천연두(마마), 장티푸스, 콜레라 등의 전염병이 종종 돌았다고 하니, 그야말로 우리가 전염병으로부터 해방된 지는 얼마 되지 않은 듯하다.

서양의학, 질풍노도로 들어오다

▲ 서양의학 교육을 목표로 1899년 3월 28일 설립된 관립의학교는 일본인 의사나 일본에서 교육받은 한국인 의사를 통해 의학교육을 실시했다. 이후 1902년에는 처음으로 졸업생을 배출했는데, 초대 교장은 한국에 종두법을 소개한 지석영이었다.
ⓒ 권기봉
한반도에서 어느 정도나마 인간의 의지에 의해 전염병이 다뤄지기 시작한 것은 서양의학이 소개되는 대한제국 때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전까지는 거의 한의학에 의존해 왔으나, 1877년 일본군이 일본인 거류민을 위해 부산에 설치한 제생의원(濟生醫院)을 시발로 고종 19년인 1882년 유럽 국가들과 수교를 맺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레 선교사들에 의해 서양의학이 유입되기 시작한다.

1885년 4월 10일에 고종은 미국공사관(美國公使館) 의사 알렌(Horace N. Allen)의 건의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의료기관인 광혜원(廣惠院)을 설치, 명실상부한 서양식 외과 진료를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이후 제중원(濟衆院)으로 이름이 바뀐 광혜원은 홍영식(洪英植)의 집에 설립되어, 말 그대로 고관대작 높으신 어른들이나 드나들 수 있었지 일반인들은 얼씬도 하기 힘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돈 없고 힘없는 서민들은 '살인서(殺人署)'라고 불릴 정도로 상태가 엉망이었던 활인서(活人署)나 혜민서(惠民署) 등의 민중의료기관을 이용했다는 것이다. 물론 그마저도 유명무실할 때가 많았다지만.

특히 서양의술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환기시키는 사건이 있었다. 때는 1884년 정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갑신정변. 당시 개화파의 칼을 맞아 부상을 당한 명성황후의 조카 민영익(閔泳翊)을 알렌이 나서서 치료함으로써 외과 치료술을 비롯한 서양의학 전반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얻는다. 정부는 물론 민간인들로부터도 신임을 얻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하루 최고 260여명의 환자를 볼 때도 있었다고 전해질 정도다.

외과 치료술을 기반으로 서양의학에 대한 관심이 나날이 증대, 1887년 제중원은 환자수가 너무 많아져 혜민서가 있었던 지금의 외환은행 본점 자리로 확장 이전을 결정한다. 이후 1904년 11월 28일 미국인 기업가 세브란스의 도움으로 남대문 밖에 현대식 병원을 지어 이전하는데, 바로 세브란스 병원이다.

한편 1899년 3월 28일 한국 종두법의 창시자 지석영(池錫永)을 원장으로 하는 관립의학교가 설립된 데 이어, 최초의 국립병원이라 할 내부병원(內部病院)도 세워져 전체 15명의 의사 중 10명을 종두의(種痘醫)로 둠으로써 전염병을 막는 데 애를 쓴다. 같은 해 4월 24일의 일이다.

1900년 7월 9일 광제원(廣濟院)으로 이름이 바뀐 관립 내부병원은 일반 환자 진료 이외에도 전염병이나 죄수들을 치료하는 일을 했다. 이후 광제원의 업무는 1907년 3월 10일 칙령 제9호에 의해 의정부 직할의 대한의원(大韓醫院)으로 이관되는데, 대한의원은 그전부터 있었던 광제원의 의학교육기관은 물론 적십자병원 등도 흡수해 의학교육과 진료를 동시에 수행하게 된다.

물론 9백여명에 이르는 환자들 중 한국인은 2백명이 조금 넘었을 뿐 대부분 일본인이나 외국인이었다는 것을 볼 때, 그것이 과연 한 국가의 국립병원이라고 자랑할 만한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개원 3년만에 간판을 바꾼 대한의원

▲ 1908년 10월 24일 순종은 이미 고종 때 건설이 시작된 대한의원 개원식을 거행하고 칙서를 내린다. 정부 당국이 서로 협조하고 대한의원 관리들이 분발하고 힘써서 전국의 백성들이 의술의 혜택을 받도록 하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 권기봉
세월이 흐르며 국립병원이든 아니든 이런 병원의 흔적은 온데간데없어졌다. 게다가 혜민서가 있었던 저리는 표지석마저 엉뚱하게 놓여 있는 실정이다. 그나마 껍데기일망정 겉모습이나마 남아 있는 곳이 이번 답사지인 대한의원 자리다.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과 창경궁 정문인 홍화문 사이의 말머리산 언덕에 자리잡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의과대학 안에 위치한 대한의원 건물은 1908년 5월 준공됐다. 붉은색 벽돌과 자못 화려한 바로크풍탑으로 여유로운 몸매를 과시하는 이 건물은 그러나 일제의 국권 강탈과 함께 역사의 급류에 휘말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테면 1910년 9월 30일 한일합방 후 대한의원은 같은 해 9월 조선총독부의원으로 개칭되었으며, 1923년 한반도에 처음으로 설치된 대학이라 할 수 있는 경성제국대학의 의학부 부속의원으로 이름이 바뀐 데 이어, 1928년 5월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부속의원이 설치되었다. 이어 6월에는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속의원이 따로 설치되기도 한다.

또 의료교육을 담당하던 대한의원 부속의학교는 국권이 일본에 넘어가면서 조선총독부의원 부속의학강습소로 이름이 바뀐 후 1916년에는 경성의학전문학교로 다시 개칭된다. 한편 10년 뒤인 1926년에는 경성제국대학교 의학부가 6년 과정으로 신설되기도 하는데, 말 그대로 가히 정신 없는 변화의 연속이다(세브란스의학교는 1917년 5월 14일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로 이름이 바뀐 이후 1942년 아사히의학전문학교 및 부속병원으로 다시 변경됨).

이러던 것이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으며 마지막 변화를 맞게 된다. 물론 그 변화란 것들이 지금까지는 주로 이름에 관련된 것들이었는데 이때는 자연히 교수진에도 변화가 있었다. 즉 서울의과대학으로 이름을 바꾸는 동시에 일본인 교수들이 물러난 자리를 한국인 제자들이 채운 것이다.

한편 경성제국대학을 폐지하고 국립서울대학교가 출범하면서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부속의원과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속의원이 합병,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이 탄생하지만 교육 과정이나 내용 등은 일제 당시의 그것을 그대로 답습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1946년의 일이다.

좋은 시절은 어디 가고 다시금 전염병의 공포가 ?

▲ 대학로에서 서울대 병원으로 들어가는 길의 이름은 ‘지석영길’인데 대한의원 건물 앞에는 지금도 지석영의 동상이 서있다.
ⓒ 권기봉
일반 서민은 그다지 직접적인 혜택을 받지 못했다지만 1885년 광혜원을 시작으로 1898년 서울 청진동에 처음 들어선 최초의 서양식 개인병원인 제생의원, 1946년 들어 서울대학교로 이전의 국립병원이 통합되면서 근 120년간 서양의학이 보급, 우리나라의 질병 치료 수준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다. 한국전쟁 등 전화로 인해 상황이 좋지 않을 때를 제외하고는 위생 상황이 점차 개선되면서 전염병 발병률 역시 완만한 하향곡선을 그린 것이다.

이는 비단 우리나라만의 상황은 아니어서 위생상황이 극히 열악한 최빈국이나 이타이이타이병 등 산업화로 인한 재앙의 경우가 아니고서는 심각한 전염병이 돈 일이 아직까지는 많지 않다. 그런데 좋은 시절은 어디 가고 다시금 전염병의 공포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니 세상이 제대로 굴러가는 것인가.

신밧드는 깨끗한 땅으로 돌아가고 싶다

동아시아는 물론 프랑스나 캐나다 등 많은 나라들이 중국발 괴질로 긴장하고 있는 지금, 저 멀리 신밧드가 모험을 떠나기 위한 배에 올랐다던 바스라에도 전염병 공포가 엄습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미국과 영국의 이라크 침공으로 상하수도가 오염됐을 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식수조차 부족하기 때문이라는데, 중국발 괴질과는 달리 명확한 인재(人災)라는 데 차이가 있다면 있을 것이다.

상황을 돌아보건대 중국발 괴질처럼 원인을 알 수 없는 전염병이라고 할지라도 원인이 뻔한 데도 불구하고 예방 노력을 거의 기울이지 않는 바스라보다는 정신적인 면에서 그나마 나을지도 모른다는, 잔인한 생각마저 들 정도다.

이라크땅 바스라의 오늘내일 발병할지 모를 전염병 공포처럼 이유를 뻔히 알면서도 예방은커녕 서로 상대방 비난만 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자칫하면 심각한 대량 인명 살상이 일어날 참이다. 이는 결국 대량살상무기를 찾는다고 들어가 헛된 대량살상을 일삼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누구의 자유'를 위한 침공인지 명확한 판단이 가능할 뿐더러 파병 대가로 꼽는 '국익'이라는 것도 뚜렷하지 않고 담보할 수 없는 이때, 파병동의안을 가결시키는 우리 국회가 이처럼 반인륜적으로 보일 때가 없다. 조만간 유라시아 대륙은 물론 전 세계가 전염병 몸살에 앓아누울 참이다.

▲ 대한의원 건물 중앙에 솟아있는 첨탑 꼭대기에는 시계가 걸려 있다. 오랜 시간 저 위에서 아픈 이들을 내려다보았을 텐데 서민들은 이곳을 그리 자유롭게 이용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 권기봉

▲ 건물 곳곳에 태극 문양이 있다. “지나친 것이 모자람만 못하다”고 했던가. 태극 문양을 강조하면 할수록 일제에 의해 운영되고 인제를 위해 운영된 대한의원의 역사가 머릿속에 그려질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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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종은 1885년 4월 10일 미국공사관(美國公使館) 의사 알렌(Horace N. Allen)의 건의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의료기관인 광혜원(廣惠院, 16일 후 제중원(濟衆院)으로 개칭)을 설치, 명실상부한 서양식 외과 진료를 시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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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5년 콜레라가 만연할 당시 방역을 위한 위원회가 구성되는데, 그 구성원은 일본인들과 의료 활동을 하던 선교사 등이 주축이었다. 즉 이때 이미 한의학보다는 서양의학에 의지하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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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의학 역사 1백여 년. 그러나 아직 병원 혜택을 모든 이들이 받는 것은 아닌 듯 하다. 약 10% 정도로 파악되는 차상위계층은 의료보호는 받지도 못하면서 일정소득 이상의 생활로 의료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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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기억 저편에 존재하는 근현대 문화유산을 찾아 발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저서로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알마, 2008), <다시, 서울을 걷다>(알마, 2012), <권기봉의 도시산책>(알마, 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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