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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면 음력 정월 스무날. 이 날은 시어머님의 첫 번째 기일이다. 지금도 고향집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실 것만 같은데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지 않는다.

자식들에게 언제나 넉넉한 웃음과 인정으로 대하셨던 분. 27년 동안 꾸중들은 기억이 별로 없는 걸 보면 어지간히 무던한 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무던한 성품인들 철부지 며느리가 하는 행동이 다 마음에 찼을까.

내 앞에서 동서들 흉보는 것도 본적이 없을 정도로 심지가 깊으셨던 분. 정 속이 상하면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게 혼자말로 몇 마디 하셨는데 젊었을 때는 그런 어머님의 모습을 보고 꼭 바보 같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으니 얼마나 철이 없었나.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이제 내 나이 쉰 셋. 어머님이 며느리를 볼 때와 비슷한 연배가 되었다. 작년 이 맘때, 갑자기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 한 달 동안 자리 보전하고 앓았던 것은 아마도 가장 의지했던 어머님을 잃은 상실감 때문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가장 든든한 빽이었던 어머님, 언제나 내 편이었던 어머님을 그리워하며 그 분과의 인연을 회상해 본다.

시어머니와 며느리라는 인연으로 우리는 그렇게 만났습니다. 28년 전 봄이었지요. 스물 다섯, 고생도 할만큼 했었건만 그 때는 왜 그리 세상물정에 어두웠었는지 가난한 집 육 남매의 맏며느리라는 길로 겁도 없이 성큼 들어섰지요. 그 자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제대로 모른 채 말입니다.

처음 어머님을 뵈러 갔을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납니다. 어머님을 연신 치근대는 열 살 정도 돼 보이는 어떤 남자애가 도대체 누구인지 의아했었거든요. 나중에 막내 시동생이라는 것을 알고 애비한테 어린 동생이 있다는 말을 왜 하지 않았느냐고 따졌었지요. 그랬더니 어머니가 마흔 다섯에 동생을 낳았다는 것이 속상하고 창피했었다는 거예요. 어머님은 이런 사실을 모르셨지요?

살면서 운 적도 많이 있었습니다. 내 마음을 몰라주는 시댁식구들이 야속해서 이렇게 살 수는 없다고 애비와 싸우기도 했었고, 나 혼자만 없어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 같아서 그만 살자고 한 적도 있었지요.

열 세평 아파트에서 여덟 식구가 교통정리를 해야 할 정도로 복잡하게 살 때도 있었던 거, 어머니도 기억나시지요? 시댁식구가 너무 야속하고 친정식구들이 너무 서운해서 이민 가고 싶은 적도 많았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면 마음 편하게 잘 살 것만 같았습니다. 아마도 애비가 건강했다면 그렇게 했을지도 모르지요.

삼 년 전, 그러니까 어머님이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쳐 병원에 입원했을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답니다. 중풍으로 몸도 제대로 가누기 힘든 아버님과 같이 계신 고향에서 그 날도 남의 고추밭에 일하러 가시는 길이었다지요. 길을 건너다가 자동차에 다리를 다치셨다는 전화를 받은 저희들은 정신이 아득했었습니다.

저희 집 가까운 병원으로 옮긴 후 치매에 요실금으로 고생하시는 아버님도 같은 병원 한 병실에 입원시키고, 두 명의 간병인까지 있어야 했던 상황에 지인들은 그 광경을 보고 도리질을 했었지요. 설상가상 그 와중에 막내 시동생까지 사고를 내 손을 벌렸던 그 기막혔던 상황들을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모두가 다 밉고 원망스럽기만 했었습니다.

기가 막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는 채 시간은 흐르고 두 분은 퇴원해 저희 집으로 오셨지요. 아버님은 툭하면 요실금 수술한 자리와 연결된 호스를 빼버리는 통에 앰뷸런스에 실려 병원으로 가기 일쑤고 기동을 못하니 목욕이며 대소변 처리는 애비와 어머님의 차지였지요. 다친 다리를 질질 끌며 식사수발에 말동무에 병구완에 정성을 쏟은 것은 맏며느리의 고생을 덜어주시려는 어머님의 일념이었다는 것을 제가 왜 몰랐겠습니까.

고향으로 가는 날만 기다리던 어머님의 염원에도 불구하고 오신 지 석 달이 지난 그 해 여름 그야말로 푹푹 찌던 염천에 아버님은 돌아가셨습니다. 아버님은 그렇게 가셨지만 저희 집에서 가셨다는 게 얼마나 감사하던지요. 철없던 때 마음 아프게 했었던 모든 일을 이제야 갚았다는 안도감이었던 것 같습니다. 전 그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머님이 교통사고를 당하신 것은 아버님이 아들집에서 돌아가시게 하기 위한 하늘의 안배였다는 것을 말입니다.

어머님이 고향으로 가신 것은 그해 십이월 겨울이었습니다. 설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 떠나신 것도 저한테 미안해서 였지요. 여든 셋의 고령이라 뼈가 제대로 아물지 않아 절뚝이는 걸음인지라 여간 걱정이 아닌데도 "에미가 좋은 거 많이 해줘서 다 나았어. 서울은 답답해서 시골에 갈란다"하시며 가셨지요.

없는 살림에도 금실좋게 사셨던 두 분이었는데 아버님이 안 계신 집에 혼자 가는 발걸음인들 가벼웠을까요. "어머니 어떻게 지내세요?" 하고 전화를 드리면 "동네사람들이 마실 와서 윷놀이도 하고 화투도 치고 잘 지내니 걱정 말고 애들하고 잘 지내거라" 하셨지요.

며느리에게는 내색도 하지 않으시더니 "느이 아버지 한번만 봤으면" 하고 당신 따님에게 하소연하시면서 "언니한테는 그런 내색하지 말라"고 단단히 당부했었다고 나중에야 전해 들었지요. 그래서인지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무심한 모습으로 지내셨지요. 고향사람들과도 잘 어울려 지내시고 가끔 만나는 그 분들이 어머니를 살뜰하게 챙겨드리는 것을 볼 때면 너무나 고맙기도 하고 한편으론 안심이 되곤 했었지요.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한 동네에 사시는 사촌형님에게서 받은 것은 애비가 출근하고 나서 얼마가 지나지 않아서였습니다. 전날 밤늦게까지 집에서 동네 분들과 윷놀이를 했었다는데 주무시다가 돌아가셨다는 것이었습니다.

혼자 사시는지라 매일 아침마다 문안 차 왔던 이웃 분에게 발견되신 어머니. 돌아가시기 며칠 전 설날에 저희 집에 오셔서는 오 만원을 제 손에 쥐어 주시며 "에미야 우리 집에 와서 고생 많았지. 고맙다" 하시며 우셨는데 그 말씀이 유언이 될 줄이야. "없는 집에 와서 시동생 시누이 때문에 마음고생 몸고생 하는데 에미 맘 상하게 하지 마라"고 애비에게 말씀하시는 소리를 우연히 듣기도 했었는데 그렇게 가시려는 준비셨나요.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서둘러 떠나신 어머님의 마음을요. 해 준 것 없이 고생만 시킨 며느리에게 당신이 할 수 있는 건 아프지 않고 곱게 가는 것이고 그렇게 해 달라는 기도를 늘 하고 계셨다는 것을 말입니다.

서랍이며 찬장이며 모든 살림을 깨끗이 정리해 놓고 낡은 옷은 며칠을 두고 태우는 것을 본 동네 분들도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야 그렇게 죽을 준비하는 분은 처음 보았다고 이런 희한한 일 처음 본다고 말이 자자했었습니다. 그렇게도 보고 싶어 하시던 아버님이 가신 지 일년 반만에 따라 가셨습니다. 그렇게 어머님은 저희들 곁을 떠나가셨습니다.

어머님이 마지막으로 담가주신 김장의 맛도 영영 못 잊을 것 같습니다. 시원하고 톡 쏘는 감칠맛이 나는 그 김치를 당신의 손녀딸이 얼마나 맛있게 먹었는지요. 텃밭에 심은 배추가 가뭄 때문에 자라지 않자 성치 않은 다리를 끌며 물을 주고 키워 정성으로 담근 김치가 혹여 맛이 없을까봐 노심초사 걱정하셨다지요.

김치가 맛있다는 저희들의 말을 듣고 기뻐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어머님이 담가주신 김치 때문에 식구들이 밥을 먹는다고, 내년에도 또 담가달라는 제 말에 "그래 또 해 줄게" 하셨었는데…. 어머님은 우리와 늘 같이 있는 분인 줄만 알았었는데….

당신의 손주들에게 말했습니다. 할머니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구요. 지혜로운 할머니 귀여운 할머니 바보(?) 같은 할머니가 되고 싶다구요. 어쩌면 어머님에게서 친정어머니의 냄새를 그리워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어머니와 같이 있으면 마음이 푸근 했었거든요. 그런 마음은 제가 나이를 점점 먹어가면서 느꼈으니 늦게서야 철이 든 것 같습니다.

어머님! 아버님과 함께 계시니 좋으세요? 며칠 후에 아버님과 같이 오세요. 큰 고모님도 오시고 영동사는 큰 시누님네도 오신답니다. 다 같이 모이면 어머님을 그리워하며 이야기꽃을 피우겠지요. 아직 철이 덜 난 막내 아드님 위해서 기도 더 해주시고요. 어머님 천상에서 행복하세요.

덧붙이는 글 | 아름답게 늙고 싶은 것은 누구나 바라는 소망일 것이다. 김채남 여사 - 내가 노후에 가장 닮고 싶은 분이다. 좋은 기억으로 남은 그 분의 영전에 이 글을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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