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토요일 이른 아침 남편과 함께 집을 나섰다. 눈발이 날리는가 싶더니 어느새 함박눈이 되어 쏟아진다. 군무를 추는 듯 꽃 무리가 하늘에 휘날린다.

합류한 일행들과 목적지인 무주를 향해 출발했다.

"송이송이 눈꽃송이 하얀 꽃송이..." 동요를 부르며 나이를 잊는다. 새로 난 길은 막힘이 없어 시원하다. 답답했던 가슴이 뚫리는 기분이다. 2시간 남짓 걸려 도착한 무주 리조트. 듣던 대로 위용이 대단하다. 210만평의 거대한 도시가 덕유산 골짜기에 있다는 사실이 그저 놀랍기만 하다. 오스트리아 풍으로 지었다는 건물 군들이 넓은 땅 곳곳에 보기 좋게 들어차 있다. 마치 유럽에 온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동계 유니버시아드 대회를 치른 곳답게 다양한 시설과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고 있었다.

코스모스동 314호. 7명이 쓰기에 모자람이 없을 정도로 숙소가 제법 넓다. 이른 점심을 먹은 후 곧 바로 산 정상을 향해 출발했다. 설천봉까지는 곤돌라로, 정상까지는 걷기로 했다. 곤돌라에 오르자 안개가 서서히 몰려온다. 몽환적인 운무가 피어오른다.

'파리는 안개에 젖어'라는 영화가 있었다. 내용은 잊어버렸지만 안개는 낭만에 젖게 한다. 1522m 높이의 감각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나무들이며 능선이 마치 동양화를 보는 듯 하다.

설천봉에 내렸다. 이젠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절벽이 어디인지 몰라서 부모들은 아이들을 간수하느라 정신이 없다. 더듬더듬 앞에 가는 사람들을 따라서 정상으로 향했다.

'와' 하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 덕유산의 겨울은 주목과 구상나무의 설경이 유명하다더니 나무마다 가지마다 피어 있는 눈꽃이 우아하면서도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남녘 무주의 겨울 끝자락에서 건져 올린 설경에 넋을 잃은 듯 마냥 취해 있었다.

20분이면 너끈하다는 정상까지는 눈발이 날리고 바람 또한 거세게 불어 기어가다시피 했다.

떨어질세라 서로 붙잡고 가는 연인들의 모습도 그저 예쁘게만 보인다. 서로의 체온을 느끼고 싶은 그들에게 미끄러운 눈길만큼 좋은 구실이 있을까. 무뚝뚝하던 남편도 손을 내민다.

눈 안개는 사람들의 머리를 하얗게 물들이는 재주를 부린다. 사위는 온통 눈꽃들이 피어난 꽃밭이다.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는다. 여기 저기서 사진을 찍느라 난리다. 이 환상적인 장관도 햇빛이 비치면 사막의 신기루처럼 사라지겠지.

드디어 향적봉에 올랐다. 해발 1614m 덕유산 정상이다. 운무는 병풍이 되어 멀리 보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정상의 작은 땅은 안개의 바다 속에 외딴섬이 되었다. 숨을 들이켜 본다. 무엇에 취한 듯 정신이 몽롱하다. 한 눈에 들어온다는 적성산과 지리산, 계룡산, 무등산을 볼 수 없는 아쉬움은 훗날의 기약으로 남겨두기로 했다. 모든 것을 날려 버릴 듯한 바람과 몸 속까지 파고드는 추위는 여유 있게 음미하는 것을 단념하게 만든다. 서둘러 하산길로 내려섰다.

설천봉의 찻집으로 들어섰다. 드넓은 홀은 사람들로 만원이다. 뜨거운 차를 마시니 살 것 같다. 어느 정도 몸이 풀리자 하강하는 곤돌라에 올랐다. 안개는 아직도 그대로였다. 가슴 속의 카메라가 자동으로 돌아간다. 나무들이 뿜어내는 향기를, 산의 기운을 차곡차곡 갈무리한
다.

숙소로 돌아와 따뜻한 이불 속으로 들어가니 언 몸이 금방 녹는 것 같다. 창 밖으로 보이는 야간 스키장의 조명이 환상적이다. 저녁식사를 끝내자마자 바깥으로 우르르 몰려 나갔다.

안개가 걷히면서 넓은 곳곳의 건물에는 형형색색의 조명들이 현란하다. 위험하다고 오후4시부터 금지했던 스키장도 사람들로 만원이다. 아이들과 같이 나온 젊은 부부들로, 쌍쌍이 나온 연인들로 북적이는 가운데 중년부부들의 모습도 제법 보인다. 스키의 계절도 얼마 남지 않아서인지 가는 겨울이 아쉬운 듯 리프트며 난이도 높은 코스에도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었
다.

눈 위를 걸으며 발 밑의 감각을 가만히 느껴본다. 눈이 주는 낭만에 빠져본다. 둘이서 이렇게 눈길을 걸어 본적이 언제였던가. 겨울연가의 배용준과 최지우가 된 듯한 착각에 빠져본다. 러브스토리 주인공들의 안타까운 사랑. 광활한 벌판이 온통 눈으로 덮인 그 넓은 대지에
서의 닥터 지바고와 연인 라라의 가슴 시린 사랑. 그 절절한 사랑이 아름다웠던 것도 눈이 주는 낭만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런 시절이 있었다.

30년도 더 넘은 그해 겨울, 그 때는 보기 힘들었던 하얀 색 점퍼를 입고 온 세상이 하얗던 그 때 그가 나타났었는데... 지금 옆에 있는 그와 까마득한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손을 잡고 눈을 밟으며 걸었던 그 느낌을 다시 느껴보고 싶다.

우리부부에게 이번 여행은 어떤 의미였을까 노년을 앞둔 길목에서 생각해 본다. 지나온 날들과 남은 나날들의 의미도 다시 생각해 본다. 눈 높이가 맞지 않는다고, 느낌의 코드가 다르다고 늘 불평했었는데…. 노후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돈만이 아닌 그 무엇도 함께 준비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제부터라도 이것을 남은 여생의 과제로 삼아야겠다. 무주에서 같이 보낸 남편과의 시간들을, 그리고 남은 날들의 의미를 통장에 넣어야지. 그리곤 삶이 허무하다고 느껴질 때 꺼내 봐야지.

철쭉의 계절인 오월에 다시 찾기로 한 덕유산은 우리 부부에게 또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