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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영근 네번째 시집 <저 꽃이 불편하다>
ⓒ 창비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내 안의 세계가 격심한 혼란 속에서 해체되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돌아보건대, 나에게 시 쓰는 일이란 그런 해체의 또다른 과정이었거나, 어떤 치유가 아니었던지... 지향도 분명치 않은데, 이제 오래 머물렀던 곳을 떠나야겠다. 기우는 가을빛 속으로 웬 새가 날아간다" - '후기' 몇 토막

지난 1980년대 <취업공고판 앞에서>란 시집을 내며, 여성노동자들의 뼈아픈 실상을 고발한 박영근 시인이 네번째 시집 <저 꽃은 불편하다>(창작과비평사, 5000원)를 펴냈다. 이번 시집은 한마디로 말해 봄을 찾는 행려병자의 안쓰러운 노래다. 그 노래는 때론 우리들을 향한 구원의 노래가 되기도 하고, 때론 박영근 개인의 잔잔한 자기고백이기도 하다.

이번 시집은 기존에 펴낸 박영근의 시집과는 사뭇 다른 색깔을 띠고 있다. 이전에 펴낸 박영근의 시집의 색깔이 주로 누이의 코피 같은 붉은 색이었다면, 이번 시집의 색깔은 먼지처럼 희부연 회색이다. 왜냐하면 현실과 회억 속을 끝없이 넘나들면서 자문자답하는 시인 자신의 모습이 마치 어느 행려병자의 그림자처럼 쓸쓸하기 때문이다.

<저 꽃이 불편하다>에는 40대 중반에 접어든 박영근 시인의 자화상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시집이다. 다시 말하면 현재의 박영근과 과거의 박영근이 물신주의의 마당에서 한바탕 씨름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끝내 승부가 나지 않는다. 결국 진땀만 빼다가 무승부로 끝난 그 씨름판을 통해 문득, 박영근은 깨닫는다. 어제의 박영근과 오늘의 박영근이 곧 내일의 박영근이라는 것을. 그리고 과거와 현재는 버릴 수도 벗어날 수도 없으며, 결국 함께 보듬고 나아가는 것이며, 그렇게 나아갈 때만이 새봄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을.

그만큼 이번 시집에 실린 시들은 이전의 박영근의 시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 어찌보면 갑자기 일선에서 한발짝 물러난 듯한 박영근의 이번 시들을, 이전의 박영근의 시들이 마음 불편하다는 듯 마구 째려보고 있는 것 같다. 다시 말하면 태어나 처음으로 허물을 벗으려 애쓰고 있는 현실의 박영근을 예전의 박영근이 바라보며 피시식, 웃고 있는 것만 같다는 그 말이다.

저 꽃은 불편하다? 이 말에서 꽃은 지금 현재 박영근이 살아가고 있는 이 현실에서 피어나는 꽃, 다시 말하면 화려하게 피어나지만 금새 시들어 버리고 마는 그 물질만능의 꽃이다. 그 꽃은 '폭탄세일', '번개세일' 이란 현수막처럼 순간 순간에 피어나고 사라지는 그런 꽃이다. 그래서 박영근은 그런 허무한 꽃이 몹시 불편하다는 것이다.

또 하나. 그 꽃은 박영근 자신이기도 하다. 불과 세 번째 시집을 낼 때까지만 하더라도 박영근은 그동안 자신이 꿈꾸어온 그 어떤 변혁에 대한 전망, 그 전망을 위한 시의 꽃봉오리를 놓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세 번째 시집을 낸 이후, 어느 순간부터 박영근은 그 피어날 듯하면서도 피어나지 않는, 향기 없는 조화 같은 그 꽃봉오리를 잠시 저만치 꽂아두고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공장 담벼락을 타고 올라
녹슨 철조망에
모가지를 드리우고 망울을 터트리다
담장 넘어 비로소 피어나는 꽃들,
흐르는 바람에
햇살 속에

어둠에마저 빛나는, 내가 아직도 통과하지 못한
어떤 오월의 고통의
맨얼굴

<'꽃들' 모두>


과연 이 꽃봉오리는 피어날 것인가, 아니면 그대로 시들고 말 것인가. 만약 "공장 담벼락을 타고 올라/녹슨 철조망에/모가지를 드리우고 망울을 터트리다/담장 넘어 비로소 피어나"더라도 어떻게 할 것인가. "내가 아직도 통과하지 못한/어떤 오월의 고통의/ 맨 얼굴"이니. 그렇다고 이 꽃봉오리를 버릴 수도 없다. 말 그대로 '계륵' 이다. 그래서 그 꽃이 불편하다는 것이다.

꽃은 가지고 있으나, 피워낼 수도 버릴 수도 없는 시인은 답답하기만 하다. 게다가 시인이 가고자 하는 길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시인이 가는 길에는 "동지도 지났는데 시커먼 그을음뿐" 이며 "흙 부뚜막엔 불 땐 흔적 한 점 없"다. 그리고 "이제 가마솥에서는 물"조차 "끓지 않"(길)고 있다.

또 시인이 갈 길을 찾고 있는 그 주변에는 "넘쳐나는 불빛과 소란과 광기" 뿐이며, "그 속에 비치는/살을 섞지 않는 나의, 詩의 속임수"만이 수박등처럼 외롭게 비치고 있다. 그래서 시인은 "그랜저가 전광판 속을 질주하는 밤하늘 아래/ 나는 고개를 숙"(고개를 숙인다)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시인은 갈 길을 쉬이 포기하지 않는다. 그 눈부신 물신주의의 휘황찬란한 불빛을 피하기 위해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고개를 숙인 시인은 다시 몸부림친다. "차진 맨흙을 주무르고 싶다고/아이를 빚겠다고/물과 바람과 햇빛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으니 제발 "살려달라고"(봄빛), 나를 이제 그만 이렇게 놓아달라고 애원한다. 그 애원은 이 세상을 향한 애원이기도 하지만 실은 그 자신의 과거에 대한 간절한 애원이기도 하다.

그렇게 스스로 몸부림치고 애원하다가 "자다가 문득 깨어나보면 얼굴에 번져 있는 눈물의 흔적 같은 것"이 남아 있다. 그래, 시인이 몸부림치는 것은 바로 그 "눈물의 흔적 같은 것"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은 "지나간 날들은 이미 없다"며 스스로 미래에 대한 전망까지도 포기하려 한다. 그리고 "남은 날들조차 다만 길 위에서 웃으며 팔 수 있을 뿐"(봄빛)이라며 체념해 버린다.

그 체념은 시인이 살고 있는 현실에서 가감없이 드러난다. 온통 돈으로 잘 도배가 된 집에서는 "소리 한 점 없이 전자동세탁기가 돌아" 가고 있다. 그리고 그 거대한 힘을 가진 자동세탁기에서는 "부시게 표백된 生(생)"(봄빛)이 날마다 쏟아진다. 그래서 시인은 "안심"한다. 이 "안심"은 물신주의가 넘쳐나는 현실에 순응하는 그런 평안함이 아니다. 시인 자신도 자동세탁기 속에 든 빨래처럼 그렇게 하얗게 표백되고 있다는, 그리하여 다시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는 기대감에 대한 "안심"이다.

모든 것을 하얗게 지워버린 시인, 그리고 그렇게 새로운 몸과 마음으로 무장한 시인은 그동안 자신이 끝없이 꿈꾸어오던 그 길을 다시 가기 위해 세상 밖으로 나온다. 하지만 "갯막엔 벌써 불빛이 없"고 "바다로 가는 길은 끊"(달)겨 있다. 문득, 뒤를 돌아보면 "어둘녘 내가 걸었던 샛강의 둑길과/칼산으로 가던 먼지 나는 신작로가/다시 만나/내 몸을 싣고 가"(문장수업)고 있다. 이를 어쩌랴. 지난 날들이 시인을 또다시 끄잡아 당긴다.

물신주의의 속성을 궤뚫고 새롭게 무장한 시인의 몸은 또다시 이리저리 구겨지고 더럽혀지려 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시인은 차디찬 겨울비까지 맞으며 다시 한번 자신을 되돌아본다. 시인이 바라본 그 자신의 모습은 "돌이킬 수 없이 달려온, 또 살기 위해 달려갈//길 위에서, 길을 잃으며//저를 찾고 있는/망가진 사내" (겨울비), 즉 행려병자에 다름 아니다.

시인은 그가 걸어온 길, 벗어나려고 그렇게 몸부림을 치던 그 과거의 길 속으로 다시 빨려 들어간다. 그 과거의 길은 "산그림자는 자꾸만 내려와 어두운 곳으로 잔설을 치우고/나는 그 장지문 열기가 두"려운 곳이다. 또 현재보다 과거가 "거기 먼저 와/나를 보고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다. 그래서 시인은 다시 한번 절규한다. "저 눈 벌판도 덮지 못한/내가 끌고 온 길들"(길)을 바라보며.

▲ 시인 박영근
ⓒ 창비
그러나 집이 어디 있느냐고 성급하게 묻지 마라
길이 제가 가닿을 길을 모르듯이
아무도 그 집 있는 곳을 가르쳐줄 수 없을 테니까

...

이렇게 우리 헤어져서
너도 나도 없이 흩날리는
눈송이들 속에서

그래, 이제 詩(시)는 그만두기로 하자
그 숱한 비유들이 그치고
흰 빛, 흰 빛만 남을 때까지

-'흰 빛' 몇 토막


길은 늘 열려 있다. 그리고 길은 어디에나 있다. 그러나 시인의 눈에 보이는 길은 그가 힘겹게 걸어온 발자국들만 무수히 남아 있을 뿐, 막상 그가 걸어가야 할 그 길은 잘 보이지 않는다. 또한 불혹의 중반까지 힘겹게 끌고 온 고단한 육신조차 누일만한 집도 절도 없다.

하지만 "집이 어디 있느냐고 성급하게 묻지 마라/길이 제가 가닿을 길을 모르듯이" 처럼, 스스로도 가서 닿아야 할 그 길조차 잘 모르지만 결코 좌절하지 않는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믿어야 할 것은 바람과/우리가 끝까지 지켜보아야 할 침묵/그리고 그 속에서 타오르고 있는 불"뿐이지만.

그리고 마침내 시인은 그가 걸어온 그 길을 버리려 한다. 그 길은 시인 자신이 버리려 하지 않아도 어차피 "너도 나도 없이 흩날리는/눈송이들 속에" 파묻힐 길이다. 또한 그 길은 자신이 걸어온 길이었지만 결국 자신이 찾은 진실은 없고 "숱한 비유"의 삶, 다시 말하면 남들의 삶을 흉내낸 그런 과정일 뿐이다. 그래서 "흰 빛, 흰 빛만" 즉 진실만 "남을 때까지" 그 모든 것을 당분간 덮어버리려 한다.

그렇다면 박영근 시인이 가고자 하는 그 진실의 길은 대체 어디 있는가. 분명 시인이 살고 있는 지금의 현실은 아니다. 그렇다면 그가 가고자 하는 그 길은 지난 80년대의 그 상처투성이의 노동현장일까. 아니다. 시인은 이제는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아니 그 모든 것을 디딤돌로 삼아 거듭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 박영근의 거듭남의 열쇠는 '연평도의 말'에 숨어 있다. "어린 칠산바다에서 억센 파도를 배우고/황금색으로 단단해지는 비늘의 바다", 그 바다에서 살고 있는 물고기처럼 "서산 태안을 지나/바람 잔잔해지는 한저녁쯤에/내 깊은 곳에서 알을 싣던" 그 물고기떼가 가는 그 길 속에 있다. 그리하여 그 물고기처럼 억세고 단단한 황금비늘을 빛내며, 새로운 생명이 숨쉬는 새로운 세상으로 가고 싶은 것이다.

물 위에서 아름다운 꽃 한송이가 피어나는 것도 실은 그 꽃나무가 어둡고 캄캄한 물 속 깊숙히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박영근은 그 꽃나무처럼 뿌리 내리기 위해, 그리고 진정한 아름다운 꽃 한송이를 피우기 위해, 물신자본주의의 현실에서 상처받은 아픈 몸을 부여잡고 "본디 자리"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다. 그 "본디 자리"는 그가 지난 80년대 지켜온 노동현장이기도 하고, 지금까지 마치 행려병자처럼 이 세상을 살아온 체험의 현장이기도 한 것이다.

물 위로 꽃 한 송이 피어난다
나 오래 물의 자리에 낮게 내려앉고 싶었다.
더 깊이 가라앉아
꽃의 뿌리에 닳도록
아픈 몸이여, 흘러라
나 있던 본디 자리로

('물의 자리' 모두)


"지금 나는 겨울도 봄도 아닌 곳에, 시작과 끝이 맞물려 있는 지점에, 몸 하나로 서 있는 듯싶다" (박영근)

덧붙이는 글 | 시인 박영근은 1958년 전북 부안에서 태어나 <반시> 6집에 '수유리에서' 등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는 <취업공고판 앞에서> <대열> <김미순시> <지금도 그 별은 눈뜨는가>가 있다.


저 꽃이 불편하다

박영근 지음, 창비(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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