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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를 왔다. 19층 아파트에 19층이다. 서향이다.

지난번 집은 같은 아파트 단지 안이었다. 2년전 내가 그집에 전세를 들 때보다 2배나 전세값이 올라버리자 주인은 자신이 들어와 살것이라며 나가라고 했다. 오래오래 살 예정이었던 집에서 타의에 의해 나가야 하다니... 이것이 전세사는 설움이린 말인가.

아이의 유치원이나 나의 직장을 고려해 같은 단지 안에서 움직이기로 했다. 그러나 400세대가 채 안되는 단지안에서는 전세 대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처음에는 이것저것 가리고 싶었지만 결국 날짜에 등떠밀려 '1층도 좋다, 북향도 좋다, 제발 집만 있어다오' 가 되어버렸다.

지난번 집은 남들이 이야기 하는 로얄층이었다. 남향이었다. 베란다 창으로는 나즈막한 주택가가 있어, 하늘과 먼 전경까지 볼 수 있었다. 부엌 창으로는 놀이동산과 호수가 한눈에 들어왔다. 겨울에도 낮에는 난방을 하지않아도 될 정도의 해가 들었다.

새집은 서향이다. 꼭대기 층이다. 가장자리 집이다. 그래서 많이 춥다. 베란다 앞으로 고분이 있다. 남의 무덤을 아침, 저녁으로 대해야 한다는 생각에 섬뜩했다. 집안은 습해서 옷장안 여기저기가 눅눅하고, 빨래도 잘 안마른다. 물먹어주는 방습제 따위는 10개로도 소용없을 듯 하다. 가장 큰 문제는 노을이다.

해가 짧은 계절에는 오후 3시쯤 되면 노을이 지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오래도 간다. 해라는 것이 넘어가려면 빨리빨리 제갈길이나 가지 우리집 마루에는 유독 오래도 남아있다 가는듯 싶다. 아이들은 빛이 반사되어 TV를 볼 수 없다고 항의다. 결국 돈들여 커튼까지 맞추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나는 우울증 환자이다. 어느날이면 새벽 2시쯤에 깨어 베란다 창가에 쪼그리고 앉아 '차가 10대만 지나가면 뛰어 내려야지'하고 생각한다. 그러나 결국 그 다음 어느날 또 자동차를 세고 있다. 그런 내게 의사는 밝은 빛을 보라고 했다. 세상이 밝게 보일 것이라고. 아침에 뜨는 해를 보라고 했다. 그리고 하루 일을 희망차게 계획하라고. 한낮에 작열하는 태양을 보라고 했다.

그렇게 열정적이 되어야 한다고 자신에게 주문을 외우라고. 지는 해를 보아서는 안된다고 했다. 더욱 우울해져 베란다에서 뛰어 내리고 싶어진다고... 그런 예가 많이 있었다고.

정말 그랬다. 해가 뜰 때는 그렇게 빨리도 비상하더니 오늘 하루에 미련이 남는지 갈 때는 참 느리기도 했다. 세상이 빨갛게 물드는 것이 우울하기 그지 없었다.

19층 베란다에서 내려다 보는 노을에 물든 세상은 더욱 그랬다. 그런데 노을을 보고 또 보니 다른 생각이 들었다. 원효대사였던가. 세상 모든 것은 자신의 마음안에 있어 모든 사물은 마음먹기 나름이라고.

지는 해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붉은 색이 어찌 정열만 있으랴. 그건 하루를 보내고 모두의 몸안에 밴 겸허함의 색이리라. 오늘 하루만큼의 내공이 더 쌓인 성숙함이리라. 뜨는 해가 '희망'이라면 지는 해는 '반성'이 아닐까. 하루를 계획하는 일만큼이나 오늘 하루를 뒤돌아보고 반성하는 일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오늘을 살뜰이 정리하고 나서야 내일의 희망찬 계획도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니 지난 2년여간 남향에 있을때도, 처음 신혼살림을 장만했던 동향집 시절에도, 뜨는 해를 본 기억은 거의 없다. 행여 보았다 하더라도 별다른 감흥이 없어 기억하지 못하나 보다.

아침이면 죽기보다도 일어나기 싫은 몸을 이끌고 남편 출근 준비를 돕고, 아이들 밥해먹여 유치원에 보내는 것에 해뜨는 시간은 모두 투자했었다. 더구나 한낮에 자기집 거실에서 작열하는 태양따위를 지켜볼 여유는 더더욱 없었다.

서향에서 나는 여유롭게 노을을 즐긴다. 아이들은 간식먹고 자기들끼리 흥에 겨워 놀 시간, 저녁 준비를 하기에는 이른 감이 있는 시간, 그 시간에 해는 기울어 준다. 월드컵을 계기로 붉은 색에 대한 각각의 예찬론이 등장했었다. 그 끄트머리에 노을의 붉은 빛을 살짝 얹고 싶다.

덧붙이는 글 | 노을 :  해 뜰 무렵이나 질 무렵에 공중의 수중기가 햇빛을 받아 하늘이 벌겋게 보이는 기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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