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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50년대 전쟁세대는 아니다. 60년대 보릿고개 세대도 아니다. 미군 차량을 보면 "기부미 껌"을 외쳐본 적도 없고 물리도록 수제비만 먹어서 밀가루만 봐도 신물난다는 어린 시절의 아픈 기억도 없다.

나는 70년대 '잘 살아보세'를 외치던 자칭 새마을 운동세대다. 평범한 집안에서 무난하게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런 내게도 사무치게 서러움으로 남아 있는 음식이 있다.

나는 바나나 광이다. 즐겨 먹는 광이 아니다. 즐겨 사는 광이다. 그렇다고 내가 쇼핑중독자인 것은 아니다. 나는 단지 바나나를 살 뿐이다.

나의 부모님은 딸 셋을 낳고 어렵게 너무나 바라던 아들을 얻으셨다. 뒷말을 길게 하지 않아도 형제가 딸 셋에 아들 하나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 하고 고개를 끄떡인다.

80년대 초에 태어난 나의 남동생은 나와는 꼭 10살 터울이다. 엄마는 늙은 나이에 어렵게 얻은 아들에게 그 시대 최고의 간식인 바나나를 사 주시곤 했다. 그런데 그것을 꼭 남동생에게만 사주셨다. 때때로 엄마는 외출을 하게 되면 나에게 '바나나 보초'를 서게 하셨다.

맏이인 나에게 다른 동생들이 바나나를 먹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철저히 다짐을 받으시고도 못내 못미더워 하시던 엄마. 엄마의 불안은 적중하곤 했다. 막내녀석 버릇을 고치기 위해서라도 이건 먹어줘야 한다고 덤벼드는 두 여동생을 나는 감당하지 못했고 엄마가 돌아오시면 시침떼고 앉아있는 동생들 덕에 항상 나는 혼나야 했다.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겼다는 엄마의 한탄을 신물나게 들어야 했던 시절이다.

앞집 반지하에는 3세대가 함께 살았다. 화장실도 3세대가 함께 사용하고 방 한칸에 수도꼭지 하나가 전부인 그런 집이었다. 그 끝방에 살던 훈이네는 거의 매일 바나나를 먹었다. 꼭 골목으로 들고나와 애들이 한창 놀고 있을 때 전봇대에 기대서서는 그 맛을 오래오래 탐닉했던 거 같다.

번듯한 2층집에 살던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엄마에게 항의라도 하면 돌아오는 말은 항상 같았다.
"그러니까 그집은 맨날 그런 방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거야."
그러나 왜 바나나를 안사주는 것에만 관심이 있던 어린 내게는 이해할 수 없는 답이었다.

내가 바나나 하나를 온당히 내몫으로 먹어본 것은 할아버지 제사 때였다. 집안에 문제아 취급을 받던 막내 삼촌이 할아버지 제사상에 올리라며 바나나를 사오신 것이다. 삼촌 딴에는 그 충청도 깡시골에 가면서 서울에서 폼 잡고 사갈 수 있는 가장 멋진 것을 생각해 낸 것이 바나나였으리라. 아버님 생전에 못한 효도까지 운운하면서 삼촌은 제사상에 올리라며 바나나를 가방에서 꺼내셨다.

그런데 가방에서 나온 것은 얼룩 강아지마냥 거뭇거뭇해진 죽이 되어버린 바나나였다. 8월의 찌는 듯한 날씨에 이미 익을 대로 익은 바나나를 사서 가방에 넣고 5시간을 왔으니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럴만도 하다. 삼촌은 할머니에게 불쏘시개로 등짝을 맞았고 덕분에 나는 혹시 바나나가 썩은 것은 아닌지 하는 불안한 마음으로 얼룩덜룩한 바나나를 먹을 수 있었다.

엄마가 아들에게만 사주는 또 하나의 황금같은 간식이 있었으니 그것은 '거버이유식'이다. 그중에서도 내 맘에 쏙 든 것은 '바나나맛'이었다. '쇠고기와 야채'라던가 '열대과일'따위는 감히 바나나맛을 따라 올 수가 없다. 엄마가 막내에게 이유식을 줄 시간이면 숟가락 심부름을 하며 옆에 열심히 쫒아다녀야 한다. 그러면 엄마가 이유식의 병뚜껑을 열어 내게 주신다. 뚜껑을 핥아먹는 그 맛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하루는 엄마가 외출한 틈을 타 동생들과 '거버훔치기'를 시도했다. 찬장 맨 위에 올려져 있는 나의 목표물은 의자에 올라 국자로 밀어내도 잘 떨어지지 않았다. 더 키를 놓인답시고 의자 위에서 팔짝 뛰어 올랐다. 그만 묵직한 유리병에 든 이유식은 내 엄지 발톱 위로 떨어졌다. 순간 아픈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사태 수습이 먼저였다. 발은 점점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그날부터 엄마의 눈을 피하기 위해 한여름 더위 속에서 매일 양말을 신고 있어야 했다.

몇일이 지나자 발톱은 검게 변하더니 빠져버리고 말았다. 다시 발톱이 났을 때는 방학도 끝나고 새 학기가 시작되고 가을 운동회를 할 때쯤이었나 보다. 바나나 한 개를 제대로 사주지 않은 것보다 엄마에게 더 서운했던 것은 그 길고 더운 날에 내가 양말을 신고 지내는 데도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엄마였다. 참, 그날의 거버이유식은 나의 두 여자 형제들이 깨끗이 먹어버렸다.

결혼을 해서 두 아이의 엄마가 되고 보니 빠듯한 살림에 아무리 먹고 살 걱정은 없다고 해도 애들이 원하는 것을 다 해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아이들 이유식을 귀찮아 할 때면 엄마는 "넌 아직 젊잖아. 다 만들어 먹여야지. 소고기 국물에 야채 서너 가지 넣어서 끓여주면 잘 먹었는데…. 늙으면 애키우는 것도 얼마나 귀찮고 힘들어 지는데"하고 한숨 지으신다.

엄마에게 막내는 늦둥이라 예쁘기는 했겠지만 육아에 전념하기는 너무 늙은 나이셨나보다. 특별히 해주는 이유식도 없이 매일 눌은밥을 끓여 먹이는 것이 미안해 바나나와 거버를 때때로 사주셨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으니.

하긴 나도 두 아이를 키우는 것이 벅차, 가끔 아이들이 잠든 후에야 비로소 내가 양말을 짝짝이로 신고 있는 것을 발견하는 날도 있다. 하물며 그때 우리 엄마는 네 아이를 키우며 다 큰 딸내미 양말의 유무를 신경쓸 수 없었는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자식을 키워봐야 부모의 마음을 안다고 하더니만.

나는 바나나 사기광이다. 노란색 먹음직스런 바나나 한송이를 식탁 위에 올려 놓으면 너무나 뿌듯하다. 몇일이 지나지 않아 금방 검은 색으로 변해버리는 바나나를 보고 남편은 먹지도 않는 바나나를 뭐하러 번번히 사냐고 타박이지만 나는 2000원에 몇일간의 행복을 사는 것이다.

쇼핑센터에서는 우리 가족이 먹을 만큼만 바나나를 잘라서도 팔지만 나는 역시 노점상 아저씨에게 바나나를 산다.
"아저씨. 제일 큰 걸로 골라 주세요"
큼지막한 바나나를 가슴에 품고 오면 마치 내 어린 시절의 피해의식에 대한 보상을 받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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