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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 유명 백화점들이 4월 1일을 기준으로 일제히 대 바겐세일에 돌입했다. 2주간의 세일 기간 중에는 휴일도 없고 영업 시간도 연장된단다. 가격인하 쿠폰들이 하나의 책으로 만들어져서 (일명 쿠폰북이다.) 이미 내 우편함에 꽂혀 있었다. 우리 신랑이 아이에게 하는 말을 빌자면 "엄마가 홈쇼핑 책 다음으로 가장 즐기는 책"이란다.

나는 독서에 돌입했다. 혹여 놓치는 물건이나 있지 않는지 본걸 또 보고 그리고는 또 보고, 다른 백화점과 비교 분석까지 해 보았다. 애로 사항이 많았다. 모든 백화점이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세일을 시작하기 때문에 쿠폰북에 있는 물건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 쿠폰이 딸린 물건 중 인기 품목은 세일 첫날 몇 시간만에 동이 나 버린다. 쿠폰 뒷면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한정 수량으로 조기 품절될 수 있습니다. "

우리집에서 가장 가까운 백화점에서 할인해 준다는 접시를 선택했다. 11만원자리 접시를 2만원에 준단다. 선택의 기준도 있다. 지난번 세일 때 같은 브랜드에서 10만원이 호가하는 큰 접시하나를 1만원에 같은 방식으로 판매했었다. 사용해보니 노랑색이 촌스럽지도 않은 것이 과일을 담으면 더욱 먹음직스러워 보이고 뭘 담아도 좋아 보였다. 물론 상에 낼 때마다 1만원짜리가 아닌 10만원짜리 접시라고 생각하며 흐뭇해했다. 요번 접시는 7천점을 준비하고 나를 기다린단다.

곱게 화장을 하고 예쁘게 차려입고 백화점에 들어섰다. 주방용품을 판매하는 층에 다다르자 긴 행렬이 눈에 뛰었다. 뭐냐고 물으니 '접시 줄'이란다. 일단 계산줄에 서서 계산을 하고 그 영수증을 가지고 접시 매장에 가서 다시 줄을 서면 물건을 수령할 수 있다고 먼저 줄을 서 있는 아줌마가 설명해 주신다. 맨 뒤에 줄을 섰다. 앞이 까마득했다. 백화점 한 층을 그 행렬이 점령하고 있었다. 미로 같은 매장들 사이사이로 줄은 꼬리를 물고 있었다.

얼마를 기다렸는지 모른다. 아직 더운 날씨가 아니건만 등에 담이 흥건하다. 앞뒤로 서있는 아줌마들과는 벌써 공동체 의식을 가진 동지가 되었다. 지난번 그릇과 이번 쿠폰의 다른 물건들, 또 다른 백화점의 세일 품목들이 화두다. 새벽부터 백화점에 줄서러 가냐는 남편의 비아냥을 들었다고 하자 다른 아줌마들이 흥분했다. 남자들은 모른단다.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한푼이라도 아껴서 살려고 아등바등하는 것을. 드디어 계산을 하고 돌아보니 내 뒤로도 줄이 까마득하다. 물건까지 받아들고 시계를 보니 벌써 몇 시간이 흘러 점심때도 넘어가고 있었다. 힘들다.

나는 오늘 11만원짜리 접시를 샀다. 2만원은 돈으로 계산하고 9만원은 품을 팔았다. 다리가 저리고 허리가 아픈 정도가 어지간한 집 이삿짐을 나르고 온 듯하다. 진열장에 접시를 곱게 올리며 보니 그냥 접시다. 나물을 올리면 나물접시고 김치를 담으면 김치 보시기다. 뒤집어 보기 전에는 '메이드 인 재팬'인지 아무도 모르겠다. 같이 줄을 선 아줌마들이 아니고는 아무하고도 접시의 품격을 논할 수 없을 듯 싶은 그냥 보통의 접시다. 이걸 사려고 나는 아침부터 줄을 섰다. 다른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에 줄을 서 있었다.

저녁에 들어온 남편이 접시는 잘 샀냐며 접시의 안부를 물었다. 또 한번 핀잔듣기가 싫어 매우 만족스럽다고 했다. 남자들이 모르는 여자들의 살림 애로에 대한 아줌마의 강론도 전달했다. 하지만 내 마음의 강론은 이거다.

뚝배기 보다 장맛이라고 접시보다 정성이 담긴 맛깔스런 음식이다. 나말고는 아무도 접시를 뒤집어 보지않고 아무도 재팬인지 차이나인지 관심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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