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시작은 우연을 가장한 하룻밤 사랑으로 시작한다. 두 사람은 간밤에 어떤 일이 생겼는지 기억이 없지만 여자의 옷이 찢겨져 있고, 알몸으로 자고 있었다는 정황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분명 무슨 일인가 생겼다고 짐작하게 된다. 그리고 그때부터 영화의 갈등구조가 시작된다. 영화의 초반부는 매우 코믹하게 대중의 취향에 맞추었다는 평가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사람들의 시선을 자극한다.

영화는 중반을 지나가면서 다소 지리하게 전개된다는 느낌을 준다. 장진경(김정은)의 오빠
들이 영화의 중심으로 등장하면서 '가문의 영광'을 위해 대서(정준호)와 결혼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매파노릇을 함으로써 조연역할을 넘어서 영화의 흐름을 지배하고 있다.

대서는 서울대 법대를 나오고 벤처기업의 사장으로 있는 현대판 보헤미안이다. 하지만 영화의 상상력은 여기까지였나 보다. 현실감이 떨어지는 이야기구조와 매끄럽게 이어지지 못하는 영화의 흐름이 관객들의 마음을 확실하게 잡아당기지 못하고 있다.

지나친 섹스어필과 천박한 비속어 사용도 영화의 맥락을 끊고 있다. '장씨 가족'이 여수에서는 알아주는 건달이라고 하지만 마치 관객들에게 서비스라도 제공하는 것처럼 심심하면 터져 나오는 비속어는 오히려 쓴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관객을 영화관으로 불러들이는데 효자노릇을 톡톡히 했던 조폭영화들의 경우와 비슷하다고 하겠는데 결국 영화상에서 인물들의 비속어나 사투리가 약방의 감초 역할은 할 수 있을지언정 정해진 수위를 넘는다면 감독이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가 제대로 전달될 수 없는 것이다.

영화가 클라이막스로 치달으면서 대서와 진경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이미 예상했지만 대서의 前여자친구는 우연치 않게도 그들 사이에 들어와 잠시 훼방꾼 노릇을 한다. 결국 마지막 반전은 대서의 결단에 의해 진경에게 고백하는 것으로 일단락되는 절차를 밟는다. 나는 이러한 영화의 막바지 부분을 '우연'과 '도식'에 의한 부적절한 결합이었다
고 말하고 싶다.

우연적인 만남과 드라마를 보는 듯한 진행순서는 기계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여기서 더 큰 문제는 대서가 진경에게 고백하기 전까지의 인간적인 면이 너무 소홀히 다뤄졌다는 점이다. 진경 역시 대서를 진정 사랑하는 것인지 의심이 들 정도로 내러티브적인 면에서 생략된 부분이 많았다. 이렇게 중요한 부분이 없다 보니 관객은 영화의 주인공과 동일화를 보이기보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마냥 심드렁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종합하자면 '가문의 영광' 자유로운 상상력의 부족을 최대의 맹점으로 꼽을 수 있다. 조폭이 등장하고 최고 학벌을 가진 엘리트가 나오는 '현대판 신데렐라' 구조는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재료다. 뻔한 캐릭터에 충분히 예상 가능한 사건들의 연속은 시나리오가 부실공사로 만들어졌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미 몇 번이나 영화에서 우려냈음직한 이야기들을 빌려와서 보다 디테일한 부분에서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스토리가 이어졌다면 훨씬 완성도가 있지 않았을까 싶다.

한가지 더 지적하고 싶은 것은 카메라 영상이다. 카메라 웤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는 문외한이지만 이 영화는 카메라에서도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너무나 평범하고 지루한 카메라 웤은 관객들로 하여금 '관성적인 편안함'을 주기도 하지만 지나치게 도식화돼 있는 것 같은 카메라의 움직임을 보았을 때 보다 실험정신을 가미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예컨대 '황혼에서 새벽까지'의 쿠엔틴 타란티노감독이나 '파고'를 찍은 코엔형제들처럼 천제성을 발휘해서 멋진 영상을 담으라는 것이 아니라 몇날 며칠이고 데쿠파쥬를 수정하면서 진지하게 삶을 관조할 수 있는 마음을 영상으로 담아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영화를 만드는 제작자는 대중들에게 익숙한 이야기구조와 영화형식을 차용하면서 수입면에서 안정성 있는 영화를 만들려고 했을 것이다. 영상산업이 위험성이 크다는 특성을 이해한다면 그들의 선택은 틀렸다고 할 수 없다. 그들이 선택한 것은 확실한 대박보다는 먹
고 살만큼만 되는 안정성 있는 영화였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에 '상상력'과 '실험정신'이 없다면 이미 그 영화는 영혼이 없는 시체와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가문의 영광'은 바로 '블럭 버스터'만 살아있고, '상상력'은 죽어버린 척박한 우리 영화계의 풍토를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2002-11-07 09:06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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