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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내운 선생님의 생전 모습
ⓒ 김태문
1984년 여름. 처음 선생님을 뵈었다. 강의실이 아닌 교정 잔디밭에서. 그 때는 선생님이 해직 상태여서 교단에 설 수 없었고 그래서 가끔씩 제자들이 보고 싶을 땐 학교에 오시곤 했다.

한복 바지 저고리와 회색 두루마기를 입으셨고, 눈초리는 매서웠으나 입가엔 늘 웃음이 머무신 모습이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양성우 시인의 '겨울 공화국', 윤동주 님의 '서시', 김지하 시인의 '타는 목마름으로', 조태일님의 '국토서시'를 낭송하셨다.

높낮이를 알맞게 곁들여 힘있게 내뿜는 시낭송은 우리들을 압도했다. 시가 살아서 우리를 휘감는 느낌이었다. 때로는 온 몸에 전율이 일기도 했다. 그 후로도 여러 차례 선생님의 시낭송을 들었다. 똑같은 시라도 들을 때마다 느낌은 달랐다. 우리에게 힘과 용기를 주었고, 어떤 때는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주었으며, 나태해지는 우리에게 힘찬 꾸짖음으로 다가올 때도 있었다.

'시인은 시를 쓰고 선생님은 시를 완성한다'고 말하는 이도 있을 정도였다. 주례사를 하실 때도 문익환님의 '꿈을 비는 마음'이라는 시를 통해 선남 선녀를 격려했으며, 일제 치하의 암울한 과거에서부터 독재 시절의 아픔까지 우리의 역사를 시낭송을 통해 완벽하게 묘사하셨다. 음유 시인 성내운 선생님은 시낭송으로써 우리의 가야할 길을 밝혀주셨다.

▲ 어머니를 모시고(1938년, 초등학교 6학년때의 성내운 선생님)
ⓒ 김태문
선생님은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 4시경에 일어나셨다. 그리고 어김없이 손수 정해두신 코스를 따라 산보를 하셨다. 약 1시간 내지는 1시간 반이나 소요되는 거리를 새벽 찬 공기를 가르며 걸으셨다. 얼마되지 않은 거리인 것 같으나 워낙 그 분의 걸음걸이가 빠른지라 보통사람이 걸으면 2시간은 족히 소요됨직한 거리였다.

산에 오르셔서는 '야호'를 외치신다. 그 '야호' 소리는 너무 특이해서 같이 오른 다른 일행들도 바로 선생님을 알아 본다. 선생님의 외침은 호랑이의 포효라고 할까? 뭔가를 애타게 갈구하는 맹수의 울부짖음 같기도 했다. 새벽마다 선생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애타게 기다리는 그 무엇인가를 대신해서 외치셨다. '야호'속에 그 의미를 담아서...

선생님이 평소 애착을 가지셨던 무명 산악회라는 등산 모임이 있었다. 그 산악회에서 선생님은 회장님이셨고 광주에 내려오셔서도 그 직함만은 너무 자랑스럽게 여기셨다. 온 나라가 힘들고 어려운 시기에 뜻을 가진 몇분의 인사들이 모여 산악회를 만들었다고 한다. 물론 그 산악회에서도 선생님은 늘 기둥이셨다고 한다.

회원들 모두가 바쁘신 분들이기에 이 핑계, 저 핑계로 등산에 빠지는 분들이 있었으나 선생님은 사모님, 사위, 아드님과 함께 제일 먼저 현장에 나오셔서 회원들을 챙기셨다고 한다. "왜 안나오시오? 빨리 나오시오."

이 사실은 한 가지 일에 꾸준히 매달리는 선생님의 성격의 한 면을 잘 말해주는 외에도 그 분이 차지하고 있었던 자리의 상징적 표현이기도 했다. 어쩌면 그 분은 그때 당시 우리 교육을 떠 받치고 있었던 단 하나의 기둥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 타계하시기 직전 이우영 여사와 월출산 정상에서 다정했던 모습
ⓒ 김태문
선생님은 평소 말씀이 많지 않으셨다. 항상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셨고 생각이 정리가 되시면 곧바로 행동으로 옮기셨다. 조선대 학생 이철규군이 의문의 죽음을 당했을 때에도 그랬고, 핵 발전소 반대 성명서를 발표하셨을 때에도 그러셨다. 대학 총장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그런 일을 하심이 너무 위험할 지도 모른다는 말씀을 드렸으나 오히려 야단을 맞기 일쑤였다.

"광주에 와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냐? 바로 이런 일이 아니겠느냐?".

매일 같이 학교 업무가 끝나시면 비록 늦은 밤일지라도 이철규 학생 의문사 진상 규명 농성장에 들리셔서 농성하고 있는 학생과 시민들을 위로했고 때로는 잠깐씩 농성에 참여하기도 하셨다. 또한 광주 지역 대학 총.학장들을 설득하여 핵 발전소 반대 서명을 주도해서 핵 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기도 하였다.

5.18 희생자들의 아픔을 진정으로 함께 할 수 없음에 늘 안타까워 하셨다. 그리고 늘 말씀하셨다. "광주가 분열되면 큰 일이야. 광주가 하나될 떄 진실은 승리할 수가 있지. 광주의 대동 단결에 내 온 정성을 다해야겠어."

선생님은 영어를 아주 유창하게 구사하셨다고 한다. 6.25 전 서울 사대에 재학하고 계실 때, 미국 교육 사절단이 방한하여 교육 철학을 강의한 적이 있는데 통역할 마땅한 사람이 없어서 학생으로서 학생에게 하는 교육 철학 강의를 통역하게 되었고, 이 때부터 선생님은 학생들 사이에 교육 철학과 영어에 뛰어난 수재로 이름을 떨쳤다고 한다.

▲ 89년 여수 교사협의회 초청 강연을 마치고 오동도에서 필자와 함께
ⓒ 김태문
그러나 바지 저고리에 두루마기를 걸치고 민족시, 민중시를 낭송하셨던 선생님은 글을 쓰실 때는 철저하게 한글만을 쓰셨고, 대화중에는 외래어를 쓰지 않으셨다. 뿐만 아니라 외국 내지 서구 문화의 권위를 빌어 자기의 주장을 강화하려는 행동을 철저히 배격했고, 그래서 그 분에게서 서구 문화의 냄새를 맡기란 정말 힘들었다. 오염되지 않은 순 토종의 모습 그 자체였다.

언젠가 광주 미 문화원 원장의 방문을 받고 둘이서 영어 대화를 나누던 모습은 지금도 기억에 선하다. 바지 저고리를 입으시고 당당하고 유창하게 영어를 하시던 장면은 요즘 우리가 지겨울 정도로 들어오는 소위 '세계화'의 진짜 모습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넋까지 빼주면서 서구를 닮아가려는 오늘의 우리에게 뿌리를 지키라는, 민족성을 되찾으라는 준엄한 꾸짖음으로 다가온다.

선생님이 남기고 가신 수 많은 발자취를 밟으며 오늘을 살아간다. 그 흔적은 우리의 교육, 정치, 문화, 삶 속에 깊이 새겨져 있다. 세상이 어렵고 힘들고 혼란할수록 그 흔적은 더욱 뚜렷이 느껴진다.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디로 가야 할까 라는 의문이 생길 때, 선생님은 저 앞에서 가야할 길을 환히 밝혀주고 계신다.

덧붙이는 글 | 오늘의 교육현실을 보면서 한국 교육계의 위대한 스승, 고 성내운 선생님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간절합니다. 선생님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몇 차례 글을 쓰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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