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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세요? 경운궁 돌담길은 한 맺힌 길이라는 걸?- 흔히 '덕수궁 돌담길'로 불리는 이 길은 단순히 아름다운 연인들의 데이트코스가 아니다. 이 길에는 소용돌이 같은 구한말의 정치사가 녹아 있으며, 주변엔 비운에 찬 건물과 유적들이 즐비하다. 사진은 돌담길 바닥에 깔린 블록 중 하나로, 일제 시대 법원으로 쓰이던 현 서울시립미술관 등이 보인다.
ⓒ 권기봉
사람들은 이따금 뜻하지 않은 데서 뜻하지 않은 경험을 하는 것 같다. 특히 얼마 전 예상치도 않게 흘러간 역사의 한 단편을 맞닥뜨리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지난 주말 친구와 함께 '정동길' 입구에 자리한 '정동 스타식스 극장'을 찾았다. 물론 영화를 보기 위해. 주말 시간을 이런 식으로라도 때운다는 생각에 무심코 찾은 극장이었지만, 정말 '예매 천국'이 도래한 것인지는 몰라도 '예매는 무슨, 가서 사면 되지'하고 찾은 주말 극장은, 우리에게 그리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았다.

보고 싶었던 영화는 이미 남은 표 하나 없이 깨끗이 매진된 상태였으니 말이다. 생각해 보니 그 시간에 근처 다른 극장으로 간다고 해서 표가 남아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아마도 신용카드로 이뤄지는 '예매 세상'에 매끄럽게 순응하지 못한 우리에게 잘못이 있을 듯. 그런데 이 유쾌하지 않은 경험이 뜻하지 않은 답사를 가능케할 줄은 예상도 하지 못했다.

낙담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돌담길이 아름답다는 정동이 아니던가. 사내 녀석과 걷는 길이 그다지 즐겁지만은 않았지만(?), 여기서부터 시작해 옛 대법원 자리에 얼마 전 문을 연 서울시립미술관을 거쳐 시청이 있는 곳까지 천천히 걸어보자는 '비상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일단 날도 때아니게 더우니 만큼 극장 아래층에 있는 패스트푸드점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사들고 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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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막 정동길로 들어서려는 찰나 무심코 왼쪽으로 던진 시선이 궁금증을 자아내게 했던 것이다. 극장 바로 오른쪽으로 나 있는 오르막 골목 위쪽에 여중생으로 보이는 이들이 무리를 지어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무슨 공연이 있는가보다 하는 생각에 시간도 많은데다 호기심도 발동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 길로 곧장 올라갔다.

일단 그 공연 자체는 우리 둘에게 별다른 흥미를 끌지 못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극장 뒤에 자리한 한 건물을 뜻하지 않게 보게 된다. 당시에는 쉽게 확신할 수 없었지만 교과서의 흑백 사진으로만 보아온 '구(舊) 러시아 공사관'이 분명해 보였다.

다시 칠을 한 것인지 전혀 때타지 않은 흰색 외벽이 다소 부조화스러워 보이긴 했지만, 분명 그 건물이 맞았다. 그 동안 시간이 나면 한번 이 건물을 찾아보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지만 그 건물이 도대체 어디 있는지도 정확히 모르는 상황에서 선뜻 길을 나서기가 좀 망설여졌었는데 여기서 이렇게 뜻하지도 않은 조우를 하게 될 줄이야.

▲ 역사는 책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교과서에 나온 흑백 사진으로만 보아온 이 역사의 현장을 직접 답사하게 된 소감이 남다르다. 특히 현재 첨탑의 일부만 남아 있는데 볼셰비키 혁명 뒤 소련 영사관으로 쓰이다가 한국전쟁 당시 지금과 같이 파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권기봉
맺힌 한을 삭여야 했을 고종(高宗),
외국 공관으로 몸을 피하다


'아관파천(俄館播遷)'. 한국인이라면 모를 리가 없을 이 네 음절의 짧은 단어.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 황실과 민중 일반이 느끼는 압력이 최고조에 이르던 시기, 대한제국의 지도자 고종은 1896년 러시아 공사관으로 황급히 몸을 피하게 되는데 바로 그 사건이 아관파천이요, 바로 지금 눈 앞에 서 있는 건물이 바로 러시아 공사관의 일부인 것이다.

그랬다. 비록 첨탑 부분을 남기고 대부분의 건물이 사라지긴 했지만 이 건물은 운현궁이나 경운궁, 지금은 사라진 조선총독부 건물 등과 함께 우리 근대사와 직접적인 연관을 맺고 있는 건물인 것이다.

상황을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렇다. 당시 대한제국은 말 그대로 국가로서의 체면을 상실한 채 그저 일본이나 러시아, 영국 등 열강들에게 휘둘리던 동방의 한 작은 나라에 불과했다. 특히 청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은 무주공산(無主空山)격인 대한제국에 대한 장악력을 한층 강화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조선의 국모라 불리던 명성황후가 친일파들이 길잡이 노릇을 한 일본인 낭인들에게 무참히 살해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지금으로부터 108년 전인 1895년 10월 8일 새벽 5시경 일어난 을미사변(乙未事變)이다. 이에 조선인들의 일본에 대한 악감정이 극도로 치닫아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고종은 강원도 원주와 충청도 홍성에서 일어난 의병들을 은밀히 지원하게 된다. 특히 이때 러시아 공사로 와 있던 웨베르가 공사관 보호를 명분으로 수병(水兵) 1백여 명을 서울로 데리고 오는 등 군사적인 진출을 꾀하는 동시에, 당시 친로파(親露派)에 속했던 이범진 등은 웨베르와 짜고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모시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아관파천이다.

이때 친일내각의 총리를 지내고 있던 김홍집은 육조거리에서 백성들이 던진 돌멩이에 맞아 사망하게 되고, 내부대신으로 있던 유길준 등은 일본 망명길에 오르게 된다. 특히 친일내각이 힘을 잃은 뒤 정권을 장악한 것은 친로파로, 이범진이나 이완용 등이 실력자로 등장하게 되는 등 고종이 다시 경운궁으로 이어하기까지의 기간 동안 조선을 지배하던 것은 러시아였다.

▲ 고종, 외세를 피하려 또다른 외세에 의탁하다- 을미사변으로 위압감을 느끼게 된 고종은 드디어 1896년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외세를 피하려 다른 외세에 몸을 의탁할 수밖에 없는 신세, 이런 처량한 신세가 설마 2002년에도 계속 되고 있는 현재진행형은 아닐까.
ⓒ 권기봉
물론 당시 을미사변이나 조여오는 일본의 군사력에 고종이 느꼈을 공포와 난처함이 전혀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고, 그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그리 많지도 않았을 것이라 인정한다. 그런데 한 외세를 피하려 다른 외세에 몸을 의탁한 것이 과연 최선의 선택이었을까 하는 생각에 대한 답은, 솔직히 쉽게 내리기는 힘든 것이 사실이다.

결국은 그렇게 해서 고종 자신은 건사한다고 해도 언젠가는 러시아로부터 반대급부로 무언가를 요구받지 않았을까? 또 러일전쟁에서 '만약' 러시아가 승리하고 일본이 패했다면 과연 고종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을까? 러시아 공사관으로 가느니 차라리 해외 망명을 해 독립운동을 (탄압하거나 방관하지 않고) 지원했다면 이후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물론 역사를 바라봄에 있어서의 '가정(假定)'이란 그저 허무맹랑한 '희망'일 수밖에 없으며 무용지물에 그친다는 점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다만 당시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조선땅에서 동분서주하던 열강들에게 있어, 동방의 한 작은 나라의 왕 고종은 그저 종속변수일 수밖에 없었을 뿐이며, 고종 자신이 의탁처로 택한 러시아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은 입장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고종을 미워하고 싶어도…

이렇게 생각할 때 어쩌면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한 후 약 1년 뒤인 1897년 2월 20일 경운궁으로 환궁한 것은, 한반도 역사에 있어 별다른 의미가 없는 일이란 생각이 든다. 그저 나라 잃은 자의 슬픔이요 힘없는 자의 소리 없는 아우성일 뿐, 언젠가는 양상은 달리 해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을 테니 말이다.

또한 고종 스스로도 나라의 독립을 위해 적극적으로 헌신했다기보다는 자신을 비롯한 왕가의 안녕을 위해 애쓴 흔적이 더 역력하니 일반 민중들에게 있어서는 별 의미가 없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물론 이를 두고 너무 무책임한 소리일 뿐만 아니라 당시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나오는 오해라고 반박할 수도 있겠다. 물론이다. 이 길손이 당시를 살았던 사람이 아니니 말이다.

▲ 번득이는 감시의 눈길- 당시 경운궁 주변엔 러시아 공사관이나 영국 영사관 등 열강의 건물들이 유독 많이 들어서 있었는데, 높은 언덕에 자리잡은 러시아 공사관의 첨탑 위에 선 러시아인들은 '덕수궁'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소상히 관찰할 수 있지 않았을까. 구 러시아 공사관 앞에는 잔디 공원이 꾸며져 있을 뿐 그 누구도 당시의 상황을 말해주는 이는 없다.
ⓒ 권기봉
아마도 가슴 한구석을 메어오는 답답함은 여기서 나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고종을 미워하고 싶어도 이런 비극의 원인을 고종 스스로가 초래했다고 단정할 수 없으니 말이다. 차라리 고종 한 사람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울 수 있으면 차라리 마음이라도 시원할 텐데….

그래, 그냥 마음 편하게 지나간 '과거'는 잊는다고 치자. 문제는 어디까지나 '현재'이니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도 쉽게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관파천이라는 한 맺힌 설움을 경험한 지 1백 년도 더 지났건만, 과연 2002년의 한국은 외부로부터 자유로운지 쉽사리 판단을 내리기 힘들어 보인다. 주변 4강을 만족시켜야 하는 남북통일을 위한 잰걸음들이, 미국 시장(市場)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한국 경제가… 그저 답답하기만 한 가을 아침이다.







▲ 아관파천 당시의 러시아 공사관 모습으로, 2층 창가에 고종이 보인다.

▲ 아관파천 당시 고종이 머무르던 방의 모습이다. 서양식으로 꾸며진 모습이 색다르다.

▲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자, 지배권을 러시아에게 빼앗길 것을 염려한 일본군은 무력시위를 하기에 이른다.

구 러시아 공사관 찾아가는 법

서울 정동에 위치한 구 러시아 공사관을 찾아가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지하철 서대문역이나 광화문역에서 내려 그 역들 사이에 있는 강북삼성병원이 있는 곳까지 걷자. 어느 역에서 출발하든 채 10분이 걸리지 않는 가까운 거리다.

병원 맞은편에 경운궁으로 들어가는 골목에 해당하는 곳에 정동스타식스 극장 건물이 있다. 이제 구 러시아 공사관은 다 찾은 것이나 다름없다. 극장 건물의 오른쪽으로 난 가파른 골목을 따라 올라가면 바로 정면에 구 러시아 공사관의 첨탑이 보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 첨탑만 남아 있고, 나머지 구역은 잔디 공원이 들어서고 다른 건물들에 의해 점령된 상태이다.
/ 권기봉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컴퓨터 전문지 월간 'PC사랑'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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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기억 저편에 존재하는 근현대 문화유산을 찾아 발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저서로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알마, 2008), <다시, 서울을 걷다>(알마, 2012), <권기봉의 도시산책>(알마, 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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