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충주 미륵리 절터는 삼국시대와 고려 시대에 소백산맥을 중심으로 남과 북을 잇던 중요한 고갯길을 수호하던 미륵대원이 있던 터이다. 고려 초기 남북 일직선상으로 배치된 이 절은 일반적인 절들과는 달리 북향을 하고 있다.
ⓒ 권기봉
어쩌면 지금의 충청북도 충주는 쇠락한 도시에 지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 가까이 경부선이 지나는 청주와 나라의 동쪽을 잇는 길 위에 놓여진 제천에 비해 교통도 불편하고 사람도 그리 많지 않은 평범한 지방 소도시 말이다.

그러나 누가 알랴마는 충주도 한때 잘 나가던 때가 있었으니, 백제와 신라, 고구려가 각축을 벌이던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 철도가 놓이기 이전까지의 충주가 그렇다. 그 이유는 도시가 발전하는 근본 중 하나인 '교통'의 발전 유무에 있었다.

물론 당시의 길이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지만, 충주를 중심으로 하는 남한강 물길과 소백산맥을 넘는 고갯길은 나라 교통에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특히 이번에 찾아갈 충주 미륵리 절터는 조령이나 이화령은커녕 죽령이나 문경새재가 뚫리기 이전부터 충청도와 경상도를 잇는 주요 고갯길 계립령(鷄立嶺)을 수호하던 절(미륵대원 ; 명창3년 대원사주지 승원명, 미륵당 등이 적힌 기와나 지명 등을 고려해 추정한 이름)이 있던 곳이다.

▲ 13세기 몽고 침입 시 불에 타 한반도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졌던 미륵리 절터가 다시금 우리들 시선에 들어온 것은 한국전쟁 이후로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이때 이 연꽃 무늬가 아름답게 수놓아진 당간지주와 당간 받침 등의 석재는 여염집 장독대 등으로 쓰여지고 있었다고 한다.
ⓒ 권기봉
한국인을 닮은 미륵불, 미륵불을 닮은 한국인

일단 미륵리 절터는 세워진 모습부터가 여느 절과는 다른 모습이다. 남향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 절터는 북쪽 송계계곡을 보고 앉은 채로 10.6m에 이르는 미륵불을 품고 있다. 지금은 그냥 노출된 상태로 방치되어 있긴 하지만, 미륵불 앞의 기단 잔해나 미륵불 주위의 감실 구조 등을 보면 아마도 불상 윗부분을 전각으로 씌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또한 많이 풍화되기는 했지만 감실이나 바닥 등이 당시에는 상당히 정교하게 만들어졌던 것으로 보이는데, 감실에는 경주 석굴암처럼 보살상 등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돼 만약 그것들이 지금까지 남아 있었다면 더욱 웅장하고 신성한 느낌을 전해주지 않았을까.

특히 미륵불은 미륵리 절터 답사의 압권이다. 일단 생김부터 부담감이 없어 친숙하다. 고려시대 석불답게 크기야 10m가 넘는다지만 석굴암 본존불에서 느껴지는 엄숙함이나 충주 지방 고려 철불의 성난 표정과는 거리가 멀다. 말 그대로 친숙하다. 둥글넓적한 얼굴 모양이며, 절벽처럼 깎아지르는 뒤통수, 낮은 콧대, 좁은 어깨와 상대적으로 큰 머리에서 오는 불균형성은 오히려 내 주변의 보통 한국인을 보는 듯해 그저 정겹기만 하다.

▲ 나말여초의 다른 돌거북과는 달리 머리 모양도 영락없는 거북의 모습을 하고 있다. 특히 이 돌거북은 원래 그 자리에 있던 바위를 조각해 만들었는데 그윽한 양감과 부드러운 곡선이 일품이다.
ⓒ 권기봉
잔잔한 인간미에 취하다

미륵리 절터를 찾는 이유가 바로 이런 구수한 미륵불에 있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미륵리 절터엔 미륵불 말고도 아주 정겨운 풍경 하나가 있는데 어미 거북과 아기 거북 두 마리의 소풍이 그것이다.

절의 초입을 알리는 당간지주 잔해를 지나 오층석탑에 다다르기 전 왼쪽에 자리한 돌거북은 다른 절의 그것들과는 달리 거의 완전한 거북 형상 그대로다. 보통 나말여초에 만들어진 돌거북은 몸은 거북의 모습이지만 머리는 용의 모습을 한 것이 일반적인데, 이곳 미륵리 절터의 돌거북은 영락없이 풍부한 양감을 가진 거북의 머리를 하고 있다. 등껍질 위에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비석이 없어져 다소 쓸쓸하겠지만 의외로 그리 외로워 보이진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귀여운 아이들과 함께 있기 때문.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아기 거북들을 찾기가 쉽지 않다.

여유를 갖고 찬찬히 들여다보자. 거북의 오른쪽 어깨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면 가족이 소풍을 가는 지 아기 거북 두 마리가 엄마 몸에 기어오르는 모습이 보인다. 누가 만들었기에 이렇게 정겨운 모습을 만들어 낼 수 있었을까. 그 인간미에 흠뻑 젖는다.

▲ 엄마 거북 등 위에 달아 붙은 아기 거북 두 마리가 그렇게 정겹게 느껴질 수 없다. 머리와 몸통, 꼬리 부분이 선명하지만 크기가 작아 급하게 지나치면 보기 힘든 만큼, 여유를 갖고 찬찬히 둘러보도록 하자.
ⓒ 권기봉
하늘재와 지릅재 사이에서 나라를 지키던 큰 절, 미륵대원

그런데 이런 첩첩산중에 세심한 감실에 의해 둘러싸인 거대한 미륵불과 높이 6m에 이르는 오층석탑이 이곳에 만들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그저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한 불심의 발로였을까.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이 산골에 이런 큰 절터가 남아 있다는 것은 무언가 다른 연유가 있을 법도 하다.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이곳은 당시 백제와 고구려, 신라 사이에 소유권이 바뀌는 등 삼국이 각축을 벌이던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만큼 이곳의 지정학적 위치가 중요했다는 이야기일 텐데, 실제로 이곳은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 특히 중요하게 여겨지던 교통이 요지였다.

즉 충남 예산 일대에 중국과 백제 간 뱃길에서 이어지는 땅길에 큰 절이 많이 남아 있는 것처럼 이곳 미륵리 절터 역시 당시 교통의 요지에 세워진 군사적 성격의 사찰이었을 수도 있다는 얘기이다. 그래서일까. 절터 동쪽 하늘재로 오르는 길가에는 마치 폼페이 유적을 떠올리게 하는 널찍한 건물 터가 남아 있는데, 학계의 조사에 의하면 당시에 세워진 병영터일 가능성이 크단다.

▲ 충주와 단양 지방에는 온달장군에 대한 전설이 많이 전해지는데, 사진에 보이는 둥근 돌 역시 온달장군이 가지고 놀던 공깃돌이라고 한다. 물론 전설일 뿐일 테지만 바위 위에 지름 1m에 이르는 둥근 알 모양의 바위가 올라앉은 모습이 그저 평범한 것은 아니리라.
ⓒ 권기봉
물론 폐허로 변한 병영터나 폐사지로 덩그러니 남아 있는 미륵리 절터에서 규모나 세세한 조각 솜씨에서 나름대로 유추해볼 뿐 당시의 영화를 가감 없이 느끼기는 쉽지 않다. 즉 하늘재와 지릅재 사이 계립령에서 고갯길을 수호하던 미륵대원은 이 중요하던 길의 중요성이 낮아짐에 따라 길과 쇠퇴의 운명을 함께 해온 것이다. 그러다가 결국은 13세기 몽고군이 한반도를 침략했을 때 불에 타 우리들 기억에서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지금은 고속도로의 시대. 조만간 고속철도가 역사의 축을 흔들지도 모를 일이다. 고속도로와 함께 융성한 도시가 있는 반면 쇠퇴한 도시가 있게 마련이고, 장차 고속철도에 의해 운명을 달리할 곳들도 생겨날 것이다. 아니 그보다 앞서 경의선과 동해선이 50여 년만에 뚫린 지금, 다른 길들은 몰라도 그 길만은 흥했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이 있다. 하늘재와 지릅재 두 길에 놓인 미륵대원이 고대 한반도 역사와 함께 했다면, 경의선과 동해선 두 길은 앞으로의 한반도 평화시대를 함께 할 뜻깊은 길이 되었으면 한다.
▲ 보물 제95호인 이 오층석탑은 미륵리 절터의 석조물들이 으레 그러하듯, 원래 있던 자리의 바위를 깎아 지대석과 기단으로 삼았다. 그래서일 테지만 절의 주축인 남북 축에서 약간 벗어나 있다.
ⓒ 권기봉
▲ 고려 시대의 일반적인 석등 모습을 띤 사각 석등이 오층석탑의 동쪽에 자리하고 있다. 이 석등 주변으로도 건물 터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오층석탑과 이 석등 주변 좌우로도 건물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권기봉
▲ 미륵불과 오층석탑 사이 중간 부분에는 팔각석등이 한 기 놓여 있는데, 하대석과 상대석 사이의 간주석이 길어 전체적으로 늘씬한 느낌을 준다.
ⓒ 권기봉
▲ 팔각석등은 지대석과 하대석이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역시 다른 석조물들처럼 다른 곳에서 가져온 돌이 아니라 원래 그 자리에 있던 바위를 다듬어 만들었다. 그래서인 지 돌을 떼어낼 때 남았을 쐐기 구멍이 보인다.
ⓒ 권기봉
▲ 충주 미륵리 절터의 압권은 뭐니뭐니해도 미륵불과 석굴이 아닐까. 마치 석굴암을 연상케 하는 석굴과 감실이지만, 미륵불 위를 덮었을 전각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 권기봉
▲ 현재 미륵불을 삼면에서 둘러싸고 있는 감실과 벽은 훼손이 상당히 심각한 상태로 보인다. 한국전쟁 이후 한 보살에 의해서 세상에 드러난 이 절터는, 특히 석벽 부분의 풍화 정도가 위태로워 보인다. 돌 사이에 잡초가 자람으로써 돌 사이에 틈이 생겨 석벽은 자꾸만 허물어져 가는 것 같다.
ⓒ 권기봉
▲ 미륵불 왼쪽의 석벽이 시작되는 부분에 있는 보살상으로 이끼가 심하게 끼어 모습을 쉽게 분간하기 힘들다. 원래 석벽을 따라 나 있는 감실 안에도 이와 같은 보살상이나 불상이 놓여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 권기봉
▲ 미륵불이 있는 조실 앞 공간의 사진으로 돌기둥을 받쳤음직한 주춧돌 흔적이 남아 있다. 이것으로 보아 실제로 미륵불을 덮는 전각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테면 석굴에 의해 보호받는 석굴암처럼 이곳 미륵불은 석벽과 나무로 된 지붕으로 보호를 받았을 것이란 것이다.
ⓒ 권기봉
▲ 미륵불은 돌로 만든 팔각 모자를 쓰고 있다. 아마도 전각이 있었다면 이런 모자를 씌우지 않았을 것이므로, 이후에 만들어져 씌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 석불은 모자까지 크게 다섯 토막의 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조각 수법이 시원시원하다.
ⓒ 권기봉
▲ 이것이 한국인의 전형적인 얼굴 모습이 아닐까. 낮은 코며, 납작한 얼굴, 도톰한 볼, 절벽처럼 깎아지르는 듯한 뒤통수. 경외감이나 엄격함이 느껴지기보다는 그저 친숙함으로만 다가온다.
ⓒ 권기봉
▲ 우리 나라에 남아 있는 석불 입상 중 유일하게 북쪽을 바라보고 있는 충주 미륵사터 미륵불. 불상은 월악산 송계 계곡을 멀찌감치 바라보고 있는데 저 아래 덕주사에서는 마애불이 남향한 채 이 미륵불을 바라보고 있다.
ⓒ 권기봉
▲ 하늘재와 지릅재가 있는 만큼 고대에는 상당히 중요한 교통의 요지였을 계립령 미륵사터. 이곳 하늘재와 미륵사터 사이에는 이와 같은 건물 터가 있는데, 당시에 지어졌을 것으로 보이는 병영터라고 전한다.
ⓒ 권기봉
▲ 병영터와 하늘재 사이 중턱에 있는 삼층석탑. 내가 사랑하는 길에 서서 무심코 바라볼 수 있는 그 하늘이 파랗다면 얼마나 좋을까.
ⓒ 권기봉
충주 미륵리 절터 찾아가기

충주에 가자면 동서울터미널이나 강남고속터미널에서 버스를 타면 된다. 고속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 국도를 오래 달리므로 그리 편한 여행길은 아니리라.

2시간 정도 걸려 충주터미널에 도착하면 충주역 근처의 시내버스 종점으로 가는 것이 가장 편하다. 여기서 약 1시간 간격으로 미륵리 절터 및 송계 계곡으로 들어가는 버스가 있기 때문이다. 너무 좋아 문제인 충청도 인심이기에 미륵리 절터에 간다고 기사 아저씨에게 이야기하면 알아서 내리는 곳을 이야기해 줄 것이다.

한편 가는 길에 수안보온천이 있으니 답사를 끝내고서라도 시간이 있다면 온천욕을 하며 피로를 씻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고, 월악산의 가을 단풍 구경도 빼놓을 수 없는 코스일 것이다. 올해는 여름이 다 지나갔으니 별 수 없다지만 내년에라도 다시 찾을 수 있다면 송계 계곡에서의 시원한 물놀이 역시 매력 만점이다.
/ 권기봉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컴퓨터 인터넷 전문 월간지 'PC사랑'에도 실렸습니다.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우리들 기억 저편에 존재하는 근현대 문화유산을 찾아 발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저서로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알마, 2008), <다시, 서울을 걷다>(알마, 2012), <권기봉의 도시산책>(알마, 2015) 등이 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