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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림에서 즐기는 낮잠- 준비도 참 철저하다. 아예 돗자리와 베개까지 준비한 아저씨, 상림에 누워 늦더위를 이겨내다.
ⓒ 권기봉
이제 추석도 지나고 완연한 가을이다. 다만 낙엽이 지는 한가을에 이르기에는 아직 이른 시기이고 느닷없이 더위가 찾아오기도 하는 요즈음, 그 마지막 더위를 편안히 식힐 수 있는 곳이 있어 찾아가려 한다.

특히 그곳이 역사가 서리고 고향의 맛이 나는 곳이라면 금상첨화겠다. 다행히도 이번에 찾아가는 곳은 지리산 북부에 위치한 경남 함양. 예로부터 '좌(左) 안동 우(右) 함양'이라고 해서 학문과 양반 세도가의 권세가 두드러진 곳이기도 하다. 차창 밖으로 아직 녹음이 푸르른 육십령을 넘어 함양에 이른다.

경남 함양땅은 신라 말기 학자였던 최치원과 관련이 있는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이번 답사의 주된 목적지가 될 상림(上林)과 그 안에 있는 문창후 최선생 신도비(文昌候崔先生神道碑)가 그렇고, 함양 읍내 군청 앞에 있는 학사루 등이 그러하다. 이렇게 최치원과 관련한 유적이 한 곳에 많이 남아 있게 된 데에는 그의 행적과 연관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1천 년 전 12세의 나이로 당나라 유학을 떠났던 최치원이 28세에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이미 그의 고국 신라는 기울대로 기울어진, 말 그대로 망국의 그림자가 서서히 드리워지기 시작한 시기였다.

특히 특정 귀족 중심의 폐쇄적인 정치체제와 부패로 인해 그가 뜻을 펴기에는 힘든 구조였노라고 전한다. 그 당시 최치원은 지방 관리로 이 고을 저 고을을 전전하게 되는데, 진성여왕 때 함양태수(당시 함양의 이름은 '천령(天嶺)')로 부임한 사람이 바로 최치원이다.

▲ '십리장제(十里長堤)' 함양 상림- 상림이 만들어졌을 약 1천 년 전 당시에는 그 길이가 10리에 이르렀다는 우리 나라 최초의 인공림 상림. 시라 말 최치원이 홍수를 막기 위해 둑을 쌓고 방수림을 조성한 것이 아직도 남아 있다.
ⓒ 권기봉
함양에 도착한 최치원은 고을 주변을 시찰하던 중 지리산 북쪽에서 발원해 함양 관내를 관통해 흐르던 위천(渭川)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내용인 즉슨 위천이 그리 큰 하천은 아니지만 마을을 관통해 흐르기 때문에 비라도 많이 올라치면 범람하는 일이 잦다는 것이었다.

이에 최치원은 방책을 연구하게 되고, 그 결과 둑을 쌓게 된 것이다. 특히 둑을 쌓으면서 그냥 높이만 높이고 튼튼히 하는 것이 아니라 하천이 흐르는 방향 자체를 바꾸기 위한 둑을 쌓고 한편으로는 방수림을 조성하게 된다. 이때 조성한 방수림이 바로 '대관림(大館林)'으로, 이후 우여곡절 끝에 상림(上林)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현재 상림은 약 6만5천 평에 이르는 대지에 1백여종(種) 약 2만 그루의 나무로 이루어진 활엽수림으로, 우리나라에서 천연기념물로 보호되고 있는 20여 개의 숲들 중 유일한 활엽수림(천연기념물 제154호)이자 가장 오래된 인공림이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런 타이틀에도 무색하게 원래의 상림, 정확하게 말하자면 대관림은 더 광대한 범위에 조성되어 있었다. '십리장제(十里長堤)'라 하여 거의 4km에 이른다던 대관림이었지만 세월이 지나며 군데군데 무너지기도 하고 홍수로 범람이 되기도 하는 등 바람 잘 날이 없었는데 마침 대홍수로 대관림의 중간 부분이 무너지자 그 사이를 비집고 사람들이 들어가 집을 짓고 살게 된 것이다.

그 이후는 굳이 말할 필요가 있을까. 한때 4km에 이른다던 대관림은 사람들이 중간 부분에 집을 짓게 되면서 상림과 하림(下林)으로 나뉘게 되었고, 이후 하림이 없어져 지금은 상림만이 남아 있는 상태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상림의 중간 부분에 3천여 평에 이르는 공설운동장이 들어서면서 그나마 남아 있던 상림도 본 모습을 상당 부분 잃게 되었다.

▲ 2만여 그루의 나무들이 만들어 현대인의 휴식처- 약 6만5천 평에 이르는 대지에 1백여 종(種) 약 2만 그루의 나무로 이루어진 상림은 이 지방 사람들은 물론 여타 지방 사람들에게까지 휴식처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요즈음에야 홍수조절댐 등이 그 역할을 대신한다지만, 1천여 년 전 사람들이 홍수를 막기 위해 이런 둑을 쌓았다니 그 마음이 대단하다.
ⓒ 권기봉
인간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또 인간에 의해 파괴되어온 상림. 그래도 상림은 외롭지 않다. 함양 상림에는 상림 그 자체뿐만 아니라 다른 문화재들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대한제국 말기 흥선대원군이 프랑스와 미국의 침입에 전국적으로 세운 척화비가 상림의 새 주인인 공설운동장 입구 부분에 서 있고, 1923년 최치원의 업적을 기리는 후손들의 비인 문창후 최선생 신도비와 함양 이은리에서 출토된 석불, 함양읍성 남문으로 쓰이던 함화루(咸化樓; 남문으로 쓰일 당시의 이름은 망악루(望岳樓))가 상림과 함께 하고 있다.

한편 함양 읍내에는 '학사루(學士樓)'라는 규모가 제법 큰 누대가 하나 있는데,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유자광이 김종직을 부관참시까지 하게 되는데 직·간접적인 관련이 있어 감회가 남다르다.

이야기인즉슨 이렇다. 함양군수로 부임한 김종직이 학사루에 올랐다. 그런데 마침 고향이 근방 남원이었던 유자광이 함양에 놀러왔다가 쓴 시가 현판으로 만들어져 학사루에 걸려 있던 것을 보게 된 김종직. 남이 장군을 무고하게 죽음으로 몰기까지 했던 '모사꾼' 유자광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을 품고 있던 김종직은 이를 바로 떼어내 불태워 버렸다.

이후 이 사실을 알게 된 유자광은 분노하게 되지만, 아직은 자신이 김종직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던 처지인지라 그저 앙심을 품는 데 그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연산군 4년인 1498년에 무오사화가 터지면서 사건은 벌어지게 된다.

그런데 함양 '상림'엔 어떻게 가지?

상림에 가기 위해서는 경남 함양으로만 가면 된다. 일단 함양으로만 가면 상림을 찾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함양 군청에서 병곡 방향으로 약 1.5km 정도 가면 되는데, 교통 표지판이 잘 되어 있으니 찾는 데 그리 어려움은 없을 것이고, 상림을 지나가는 시내 버스도 많으니 그리 걱정할 일은 아니다. 문제는 상림에 직접 가보겠다는 의지와 생수 한 병, 지도 한 장 챙기는 일!
/ 권기봉
즉 김종직이 《성종실록》의 〈조의제문〉에 단종을 가엾어하고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방하는 투의 글을 쓴 것을 본 유자광이 연산군에게 이를 고자질함으로써 영남 사림의 거두였던 김종직을 비롯한 많은 신진사림이 정계에서 물러나는 한편 사약을 받게 되었고, 유자광은 나아가 이전의 원한을 앙갚음하기 위해 이때 이미 명을 달리한 김종직의 시체를 무덤에서 꺼내 관을 쪼개고 목을 치는 등의 부관참시를 명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지금의 학사루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있어 당시의 비극을 느낄 수 있는 길은 없다.

부연하자면 지금의 이 누대는 최치원이 함양태수로 있을 당시 함양관아에 지어졌던 것을 1979년에 관아가 있던 함양초등학교에서 이리로 옮겨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 대관림에서 상림으로- 원래 의 크기에 비해 거의 절반으로 줄어든 상림. 원래 대관림이었으나 홍수로 무너진 부분에 사람들이 들어와 살게됨으로써 상림과 하림으로 나뉘어지게 되었고 지금은 상림만이 남아 있다. 상림과 하림의 경계였을 부분에 도로가 생겼다.
ⓒ 권기봉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www.SNUnow.com'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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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기억 저편에 존재하는 근현대 문화유산을 찾아 발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저서로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알마, 2008), <다시, 서울을 걷다>(알마, 2012), <권기봉의 도시산책>(알마, 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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