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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권의 대표적인 '인권탄압극' 내지는 '사법살인'이라 불리우는 인혁당 사건의 추악한 실체가 드러났습니다. 대통령 직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18개월간 400여명의 진술을 토대로, 중앙정보부가 1974년 대학가 유신반대투쟁을 주도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합(민청학련)사건을 수사하면서 10년 앞서 발표한 1차 인혁당 사건 연루자들을 그 배후로 지목해 2차 인혁당 사건을 조작해냈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사건개요를 간략하게 소개합니다. 뼈대만 대강 흝어보셔도 이 사건이 얼마나 공작적인지 금방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1차 인혁당 사건
- 1964.6.3, 한일굴욕회담에 반발하는 학생들 억압코자 비상계엄선포.
- 1964.8.14, 1차 인혁당 사건 발표.("북괴의 지령을 받고 국가 변란을 획책한 인민혁명당 사건을 적발해 일당 57명 중 41명을 구속하고 16명을 수배 중에 있다"-당시 중정 발표문)
- 1964.9.9, 인혁당사건 기소를 둘러싼 검찰 내부의 갈등과 피의자들의 고문설, 국회 본회의에서 정치문제로 비화.(박한상, 김삼, 조재천 의원 vs 민복기 법무부장관)
- 1964.9.25, 서울고검 한옥신 검사에게 재수사지시 후, 보안법위반(최고 사형)에서 반공법(최고 7년)으로 공소를 변경.
- 1964.10.23, 장원찬씨 등 서울지검 검사들, 인혁당 기소에 반발해 사표제출.
- 1965.1.20, 1심에서 도예종 피고 3년, 박현채 피고 1년 실형 선고, 나머지 피고는 모두 무죄선고 석방.

2차 인혁당 사건
- 1974.1.8, 긴급조치 1호(개헌논의 중지), 2호(비상군법회의설치) 연속 선포.
- 1974.1.14, 긴급조치 3호(국민 생활안정을 위한 긴급조치3호) 선포.
- 1974.4.3, 서울대를 비롯한 각 대학에서 대규모 시위. 유인물에 <민청학련> 이름 등장. 긴급조치 4호(반국가적 불순활동 발본색원) 선포.
- 1974.4.25, 신익수 중정부장 회견 "공산계열인 인혁당이 학생시위의 배후를 조종했다~!"
- 1974.5.27, 국가보안법, 반공법, 내란 예비음모 등의 혐의로 인혁당사건 피의자 28명 기소.
- 1974.7.8, 「민청학련」사건 인혁당관계, 7명사형-8명무기 구형, 6명엔 징역 20년.
- 1974.9.7, 민청학련-인혁당 관련 8명 사형-9명 무기선고.
- 1975.2.15, 민청학련 관련자, 대부분 석방.(인혁당 관련자는 제외.)
- 1975.2.21. 박정희 대통령 문공부 순시에서 인혁당 사건 등 진상 알리도록 지시.
- 1975.4.8 오전, 인혁당 관련 38명에 대한 상고심(대법) 판결, 8명 사형-9명 무기 확정.
- 1975.4.9 새벽 6시, 형확정 뒤 20시간 만에 서울 구치소에서 교수형으로 8명 사형 집행.

#. 희생자들 : 서도원(52, 무직, 전 대구매일신문 기자), 도예종(51, 삼화토건 회장), 하재완(43, 양조장 경영), 이수병(37, 삼락일어학원 강사), 김용원(39, 경기여고 교사), 우홍선(45, 한국골든스템프사 상무), 송상진(46, 양봉업), 여정남.(31, 무직, 전 경북대 학생회장)

눈치채셨겠지만, 인혁당 사건은 멀쩡한 사람들이 단지 정권에 비판적이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무법한 공권력에 붙들려가 모진 고문과 조작을 당하고 끝내는 빨갱이로 몰려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야만 했던 '그때 그 시절'의 풍경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자(2002.9.16) 동아일보를 보니, 75년 4월 피고인들에게 사형판결을 내린 당시 대법원 판사들(현 대법관)이 인혁당 사건에 대해 "기록을 토대로 법관의 양심과 소신대로 유죄를 선고"했으며, 따라서 정당하게 법을 집행한 냥 그리 강변했다는군요.(고문 등 9가지 상고이유 모두 기각, 30면 ; 조작논란 인혁당재건위 사건, 31면)

'그때 그 시절'의 인물들이 밀레니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법부의 최고위에 앉아 법과 정의를 농단하는 것도 꼴불견이지만, 정권의 각본에 따라 무고한 사람들에게 사형을 언도한 저들이 이제 와서 '양심'과 '소신' 운운하며 진실을 호도하는 모양새가 여간 역겨워 보이지 않습니다.

저들의 뇌리 속에는 사표제출까지도 마다하지 않으며 피고들의 무죄를 주장했던 젊은 검사들의 항변이, 아니 검사들의 반발에 밀려 재수사 끝에 국보법에서 반공법 위반으로 초점을 바꿀 수 밖에 없었던 검찰수뇌부의 궁색한 논리가, 심지어 10년 전에 무죄로 판결했던 사람들까지 같은 죄목으로 다시 잡아들여 처형시킨 박 정권의 무도한 짓거리가 티끌만큼도 남아있지 않는 것일까요?

저들의 고장난 기억을 되살려드릴 겸 해서 억울하게 죽임당한 이들의 피맺힌 절규를 잠깐 들려드릴까 합니다.

"5월 27일 검찰관이 1차로 공소를 제기해놓고 5월 29일부터 6월 8일까지 연일 혹독한 고문과 협박 등으로 중앙정보부에서 사전에 작성된 공소사실 32항과 똑같은 복사된 각본대로, 취조관은 읽고 피고인은 그대로 받아쓰지 않으면 살아날 수 없는 상황 하에서, 자필진술서에 기재된 32항과 똑같은 내용의 조서에 의하여 중앙정보부 간부실에서 6월 9일 작성한 것이 마지막 검찰관 신문조서다. 나는 4월 28일 혹독한 고문으로 탈장이 되었으며 폐농양증이 생겨 생명의 위협을 느낀 가운데 취조를 받았다.."(하재완의 상고이유서 중에서)

"4월 20일에서 25일까지 철야조사를 받았고, 그후 검사취조 때도 내내 중앙정보부의 고문에 의해 수십 차에 걸쳐 심장병인 협심증까지 일으켜 드디어는 수차 졸도하는 등 만신창이가 되었다… 검사에게 중앙정보부 조서가 사실과 다르다고 말하면 취조를 못하겠다고 거부했으며, 검사에게 부인하면 즉시 중앙정보부로 또 불려가 고문을 당하며 조서를 다시 작성했다.."(도예종의 상고이유서 중에서)

"며칠간을 잠을 재우지 않으면서 수사관이 5.6명씩 번갈아 드나들면서 죽음의 직전까지 끌고 갔으며, 온몸을 쥐어짜는 전기고문을 하여 몇 번씩 실신케 하였으며, 검찰에 넘어와서도 절대로 무죄라고 주장하니까 다시 지하실로 끌고 내려가 전기고문을 가했다.."(전창일의 법정진술 중에서)

"고문을 할 때는 3층에서 떨어져 죽고 싶었으며, 두 번만 더 돌리면(전기고문) 심장이 파열되어 죽을 것만 같았다. 고문하는 수사관은 술에 취해 있었다.."(우홍선의 법정진술 중에서)

덧붙이는 글 | #. 하니리포터에 송고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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