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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에 피라미드가 있다?- 한국판 피라미드라 할 만한 '전 구형왕릉'. 가야의 마지막 왕 구형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돌무지가 경남 산청에 있어 답사객들을 부르고 있다.
ⓒ 권기봉
우리의 뇌리에서 사라져 버린 역사, 가야. 잊혀진 역사만큼이나 신비스런 이야기도 많이 전해져 내려오는 가야. 그 가야가 성했던 지역에 소위 '한국판 피라미드'가 있어 답사객들을 설레이게 한다.

승자 중심의 역사 기술에 익숙한 나머지 그저 패망국이라 무시해왔던 한반도 남단의 작은 나라 가야. 오히려 신라나 백제 등의 주변 국가에 비해 발전된 철기 문화를 갖는 등 일부 분야에 있어서는 선진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던 가야는 웬일인지 고구려나 백제, 신라 등 한반도에 존재하던 다른 왕족들이 중앙집권적 고대국가 체제로 발전해나갈 때 그 대열에 합류하지 못하고 결국 신라에 복속되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임나일본부설' 등 가야 역사 자체를 부정하는 주장이 있긴 하지만 당시 가야연맹의 맹주였던 금관가야는 한때 일본 야마타이 왕국에 왕족을 보내 영향력을 행사할 만큼 상당한 권세를 누렸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렇게 잘 나가는 듯하던 가야는, 6세기 이후 결국 신라의 경계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눈으로 보이는 측면에 있어서의 '가야 역사 492년의 종말'이라 할 수 있다.

▲ 구형왕의 무덤이기는 한 것일까?-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 구조물이 정말 구형왕의 무덤인지는 아직 확실치 않다. 아니 이것이 사람의 무덤이기는 한 것인지조차 아직은 알 수가 없다. 돌에 낀 이끼들이 진실을 말해주기 전까지는…
ⓒ 권기봉
그 당시 가야의 마지막 왕이 바로 한국판 피라미드의 주인공인 구형왕(仇衡王)이다. 구형왕은 가야가 신라 법흥왕에게 머리를 숙이기까지 금관가야를 이끌던 10번째 왕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왕산심릉기> 등에 의하면 가야가 신라에 병합된 이후 이 지역에 돌을 쌓아 구형왕의 무덤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이 때문에 이 한국판 피라미드를 두고 구형왕의 무덤이라 추정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일단 위 두 사료의 경우 전자는 그것이 '누구의' 무덤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은 채 단순히 사면을 돌로 쌓은 석단이 있는데 왕릉이라는 전설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을 뿐이며, 후자의 경우 <왕산심릉기>는 <왕산사기>를 인용한 2차적 사료라는 점이다. 또한 산청 지역에 이 구조물과 관련한 전설이 전해져내려오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과 역사적 기록 사이에 다소 차이가 있어 둘 중 무엇이 '진실'이라는 것을 단정짓기 힘들다는 평가다.

말하자면 이런 식이다. 지역에서 전해져오고 있는 전설에 의하면 나라를 잃은 책임감에 괴로워하던 구형왕은 스스로 죽음을 택하게 되고 시신은 이곳에 묻어달라고 했으나, 기록에 의하면 구형왕은 금관가야가 신라에 병합된 후에도 약 30년을 더 산 것으로 되어 있어, 무엇이 진실인지 가늠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한국판 피라미드를 '구형왕릉'이라 단정짓지 못하고 '구형왕릉이라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는 의미에서 '전 구형왕릉'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 정체 모를 감실이여- 모두 7층, 7.15m의 이 구조물은 순전히 돌로만 만들어져 있는데 특이하게도 구조물 중간 부분에 가로 40cm, 세로 40cm, 깊이 약 70cm의 감실이 하나 있다. 그 안은 텅텅 비어 있는데, 용도가 무엇이었는지는 아직 알 수 없다.
ⓒ 권기봉
그런데 원초적인 질문으로 돌아가, 과연 이 구조물이 누군가의 무덤이긴 한 것일까. 지역에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이나 기타 다른 여러 가지 사료들을 무시하고 살펴보면 이것이 반드시 누군가의 무덤은 아니었을 수도 있을 것이란 생각도 해볼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모양이 고구려의 초기 돌무지 무덤을 닮기는 했지만, 구조물 중간에 뚫려 있는 작은 감실 형태의 구멍이 의미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이는 그저 모양이 닮은 고구려 무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다. 함께 이번 답사에 나섰던 누군가의 말처럼 사람이 죽은 후 풍장을 지내기 위해 만들어 놓은 석단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그저 하늘에 지내는 제사 등을 위한 시설일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전 구형왕릉 앞에 여러 기의 문·무인석과 비석 등이 놓여 있어 '그래도 구형왕의 무덤이 맞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이들은 모두 근래에 들어 세운 것들이니 개의치 말자. 심지어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이것을 신라 명장 김유신의 증조할아버지인 금관가야 구형왕의 무덤이라고 하는 것은, 어찌 보면 김해 김씨들이 자신들 씨족의 역사가 장구하다는 것을 자랑하기 위해 주장하는 것에 불과하지 않을 것 같기도 해."

▲ 만들어진 역사?- 전 구형왕릉을 소개하는 안내판으로, '전(傳)'자나 '멸망'이란 자가 날카로운 것으로 긁혀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누군가는 그 역사를 부정하고 싶은 것일까? 앞의 것이 최근의 것이고, 뒤의 것이 이전에 세워져 있던 안내판이다.
ⓒ 권기봉
ⓒ 권기봉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안내판 좀 봐. '멸망'이라는 단어를 긁어내 버렸잖아. 누군가는 그 사실을 부정하고 싶은가 보지?"

정말 그랬다. 전 구형왕릉 입구에 세워져 있는 안내판 문구 중, 예리한 칼날을 가지고 그런 것인 지는 몰라도 '멸망'이라는 단어를 긁어 보이지 않게 해 버렸다. 그것이 근래에 들어서만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전 구형왕릉 구내 한 켠에 있는 '옛' 안내판조차도 같은 식으로 글자를 긁어 보이지 않게 해버렸다. 뿐만 아니라 아예 이 구조물을 구형왕릉이라 단정짓고 싶었던 것일까.

이것이 확실히 구형왕릉인지는 알 수 없고 다만 구형왕의 무덤이라고 전해져온다는 의미로 넣은 '전(傳)'이라는 글자도 역시, 안내판에서 긁혀져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뛰는 × 위에 나는 × 있다'는 말이 이럴 때 어울리는 것일까. 애교인지는 몰라도 누군가 이미 긁혀져 볼 수 없게 된 '전(傳)' 자 위에 한글로 다시 '전'이라고 긁어놓았다.

▲ 류의태 약수터- 구형왕릉 근처에는 명의 허준의 스승이었던 류의태가 즐겨 찾던 샘터인 '약물통'이 있어 들러볼 만하다. 한편 전 구형왕릉 아랫부분에는 구형왕과 그의 왕비에 대한 추모제를 지내기 위한 덕양전이 있으며, 구형왕의 증손자인 신라 김유신이 활을 쏘며 훈련을 하던 곳으로 알려진 '김유신 활터'가 있어 이곳이 가야땅이었음을 상기시켜 준다.
ⓒ 권기봉
가야의 역사는 우륵이나 수로왕, 구형왕, 철기문화 등의 몇 안 되는 '이름'만을 남긴 채 우리의 뇌리에서 잊혀져갔다. 그 가야의 역사를 말해주는 몇 안 되는 코드 중 하나가 바로 이 전 구형왕릉이건만 지금의 우리는 이 한국판 피라미드가 정말 구형왕의 무덤인지 아닌지, 아니면 아예 무덤이 아닌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과연 누구의 말이 맞는지는 그저 전 구형왕릉 돌에 낀 이끼들이 말해줄 수 있을까. 2002년 8월, 가야의 역사는 아직 수수께끼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신촌클럽(www.shinchonclub.com)'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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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기억 저편에 존재하는 근현대 문화유산을 찾아 발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저서로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알마, 2008), <다시, 서울을 걷다>(알마, 2012), <권기봉의 도시산책>(알마, 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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