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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곡 옆에 숙소를 잡다
함양 화림동 계곡의 거연정을 찾기 위해 숙박을 하게 된 '방갈로'. 이름은 이국적이기만 하지만 바로 옆으로 지리산에서 발원한 물이 세차게 흐른다. 밤새 그 시원하고 우렁찬 물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는 날아가는 듯 하다.
ⓒ 권기봉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온 장마 때문에 마음 졸여야 했던 사람은 비단 저지대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지난 7월 지리산 북부 지방 답사를 계획하고 있던 찰나에 장마 전선이 북상하고 있다는 일기 예보는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이번 여행은 아쉬움이 남긴 하지만 그냥 접어야 하는 것일까.

이것이 무모함인 지 용기인 지는 모르겠지만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 반, 그래도 지금까지 준비한 게 어딘데 하는 안타까움 반으로 경남 함양행 버스에 오른다. 새로 개통된 서해안 고속도로 때문인 지 이전처럼 오랜 시간들이지 않고 이내 지리산 북쪽을 통해 경상남도로 접어든 버스는, 갑작스레 불어난 물 때문인 지 요란하기만 한 계곡을 거슬러 올라 남계천 한 지류에 붙어있는 숙소에 답사객을 내려준다. 그저 잠을 잘 수 있는 방과 화장실 등이 딸린 조촐한 집인데도 계곡에 바로 붙어 있어 여느 관광지에서와는 달리 지리산의 너른 품에 편안히 안기는 듯 포근한 느낌이다.

▲ 구름다리 너머로
'화림동(花林洞)'이라고도 불리는 남계천 가에 자리한 거연정(居然亭). 구름다리를 통해서만 거연정으로 갈 수 있어 특이한 느낌을 준다.
ⓒ 권기봉
이번에 찾아갈 곳은 '화림동(花林洞)'이라고도 불리는 남계천 가에 자리한 거연정(居然亭)으로, 영남 양반들의 풍류 문화를 간접적으로나마 접할 수 있는 곳이다.

영남 지방에 남아 있는 조선의 정자들은 호남 지방에 남아 있는 그것들과는 달리 말 그대로 풍류를 위한 정자로, 경치 좋고 물 맑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즉 호남 지방의 정자들이 너른 평야로 대표되는 곡창지대에 세워져 일반적인 삶과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반면, 이곳 영남 지방의 정자들은 일상 생활과는 떨어진 자연 속으로 파고든 모습을 취하고 있다.

특히 이번에 찾은 거연정의 경우에는 세워진 위치가 다소 독특하다. 계곡을 끼고 세워졌다는 점에서는 다른 정자들과 별반 차이가 없지만, 거연정은 일종의 '섬' 위에 세워진 정자이다. 즉 계곡 한쪽에서 거연정으로 오르기 위해서는 철로 만들어 다소 그 멋이 떨어지긴 하지만 하여튼 화림교(花林橋)라는 구름다리를 건너야 한다. 마치 현실 생활과는 뚝 떨어져 이 멋들어진 자연과 시상이나 즐기라는 듯이.

▲ 은둔의 사대부를 만나다
영남 지방의 정자들은 호남 지방의 그것들과는 달리 말 그대로 풍류를 위한 정자로, 경치 좋고 물 맑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 권기봉
사방이 물로 둘러싸여 있는 거연정은 마침 내린 장마비 때문인지 수위가 불어나 더욱 고립된 듯한 느낌을 준다. 그 고립은 거연정이 세워진 데서 연유하는 것은 아닐까. 거연정은 중추부사를 지냈던 화림제(花林齊) 전시숙(全時叔)이란 사람이 은거하며 지내던 곳에 세워진 것으로, 후손인 전재학이 그를 추모하는 의미에서 세운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정자를 보고 있을 때면 마음이 생각만큼 편치 만은 않다. 솔직히 현재를 살아가는 이 답사객이 당시를 살아가던 사람이었다면 감히 이 정자 근처에 얼씬거리기나 할 수 있었을까.

집안 내력 좋고 학문 역시 높은 이들이나 풍족한 마음으로 거닐었을 곳이 바로 이런 정자가 아니던가. 지금이야 모두 흘러간 옛 이야기, 마음 편하게 더위나 한 번 피해보고자 하는 생각으로 찾을 수 있는 곳이 이런 정자라지만, 어찌 보면 현실 생활과는 괴리된 채 삶을 살아간 당시 사대부들에 대한 거리감이 느껴진다.

차라리 인위적이기나 할 뿐 멋도 없고 박정희로 대변되는 새마을운동 냄새 팍팍 풍기는 들 한가운데의 시멘트 정자가 차라리 마음 편하다. 이런 정자들이 그래도 새벽부터 힘들게 일한 농부들이 막걸리 한 말 받아두고 멋들어진 가락에 노래 불렀던 그곳이 아니던가.

▲ 세찬 물소리 속에 거연정이 떠 있다
지리산을 지나간 장마비 때문일까. 거연정이 있는 화림동 계곡의 물이 다소 불어났다. 오히려 그 우렁찬 물소리에 잠겨 색다른 멋을 풍기는 거연정을 만나보자.
ⓒ 권기봉
지리산 북부, 함양 일대에 이런 사대부들의 정자는 이곳 거연정뿐만이 아니다. 이곳 화림동 계곡에만 '팔담팔정(八潭八亭)'이라고 해서 8개나 되는 정자가 있었다 한다. 다만 지금은 아쉽게도 이곳 거연정과, 지족당이 산책하던 곳이라는 농월정(弄月亭)과 조선의 대유학자 정여창이 직접 찾아 시를 옲곤 했다는 군자정(君子亭), 운치 있는 계단을 드리운 동호정(東湖亭) 등 4개의 멋들어진 정자가 남아있을 뿐이다.

이제 장마도 물러가고 가을로 넘어가기 전 늦더위가 기승을 부릴 것이란 이야기가 나온다. 이 늦더위를 피하기 위해 물 좋고 경치 좋은 화림동 정자들을 찾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과연 그들은 무엇을 보고 올 수 있을까. 그저 더위나 피하고, 뭔 지 모를 그 '풍류'를 즐기고 오기엔 화림동 정자들이 던져주는 화두가 너무나 심각하게 다가온다.
▲ 해와 달이 놀다간 정자
거연정 왼쪽의 암벽에 '일월대(日月臺)'라는 글자가 음각 되어 있다. 해와 달이 놀다간 정자라는 의미일까, 해와 달을 희롱하는 정자란 뜻일까.
ⓒ 권기봉

▲ 자연에 살어리랏다
거연정의 현판으로, 자연에 살고자 하는 마음에서 빚어진 이름일까. 오히려 현실 생활과는 괴리된 당시 사대부들의 삶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 권기봉

▲ 풍류와 시상의 세계에 빠지다
사대부들이 소요했던 정자답게 정자 안에는 온갖 시들을 쓴 액자들이 걸려 있다.
ⓒ 권기봉

▲ 이 곳에도 눈을 돌려보아요
거연정 기둥들이 속살을 드러낸 채 비죽이 웃고 있다. 계곡의 수량이 많아지면 이곳까지 물이 찼겠구나 싶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은 모습이 한껏 자연스럽고 앙증맞아 보인다.
ⓒ 권기봉

▲ 암반 위에 홀로 선 전시숙
사방이 물로 둘러싸여 있는 거연정은 마침 내린 장마비 때문인지 수위가 불어나 더욱 고립된 듯한 느낌을 준다.
ⓒ 권기봉


그런데 '거연정'에는 어떻게 가야 할까?
그래도 묘미는 거연정이 아니라…

서울에서 출발하든 부산에서 출발하든, 일단은 88올림픽 고속도로가 거쳐가는 함양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하자. 승용차를 이용하든 '뚜벅이' 여행자든 여기서부터 시작하는 게 가장 낫지 않을까 싶다.

다음으로 거연정으로 가자면 함양 시내의 학사루나 상림 등을 돌아본 뒤 함양에서 북쪽으로 18km 정도 떨어져 있는 안의로 가서 버스를 탈 필요가 있다.

안의에서 거연정까지는 9km 남짓 되는 거리인데, 도중에 농월정과 동호정, 군자정 등이 있으니 그저 거연정만을 목표로 삼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만 걷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을 수 있으니 시내버스를 이용하는 것도 한 방법일 텐데, 안의에서 화림동계곡을 거쳐 서상면 소재지까지 가는 버스가 30분 간격으로 있어, 이를 이용한다면 '뚜벅이' 여행자들에게도 별 무리가 없을 듯 싶다.

다만 유의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승용차로 편히 가든 버스나 기차를 몇 번 갈아타며 가든, 정작 가치 있는 것은 거연정이라는 목적지가 아니라 거기까지 가는 과정에 여행의 묘미가 있다는 점.
/ 권기봉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신촌클럽(www.shinchonclub.com)'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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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기억 저편에 존재하는 근현대 문화유산을 찾아 발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저서로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알마, 2008), <다시, 서울을 걷다>(알마, 2012), <권기봉의 도시산책>(알마, 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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