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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병진
이 책은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가 쓴 <제국 Empire>이 작년 말에 번역되어 출간된 후 불과 석 달도 채 되지 않아 나왔다. 그렇다고 <제국>의 유명세에 편승하려는 아류 정도로 보아서는 곤란하다.

저자가 <제국>의 논의에 일정하게 빚을 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제국>에서 제기하고 있는 광범위한 논의를 한국사회의 맥락에서 읽어내려 애쓴 흔적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이 점은 저자의 남다른 이력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저자는 1989년 창간된 <노동해방문학> 운동에 참여하던 중 수배를 받아 1999년 말까지 무려 10년이 넘는 수배생활을 하였다. 이처럼 긴 수배생활을 하면서 그는 본격적으로 맑스, 레닌의 원전들을 탐독할 수 있었고 이원영이라는 필명으로 여러 권의 책들을 번역해 오다가, 1994년경에 이르러 "자율주의적 선회"라는 커다란 사상적 전환점을 겪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그가 동구 사회주의권의 붕괴 이후 다수의 진보 운동가들이 겪은 사상적 혼란과 이념 공백기에 철저한 모색과정을 거쳐 비로소 선보이는 결과물의 하나가 바로 이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전반부는 <제국>에서 말하는 중요 내용을 요약하여 다루면서 9.11 테러를 둘러싼 논의를 <제국> 이론에 비추어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9.11 테러와 아프칸 전쟁의 성격을 제국적 내전으로 규정하면서 제도화와 테러리즘에 대한 호소는 문제핵심 자체를 건드리지 않으려는 무력감에서 비롯된 발상이라 지적한다.

요컨대 자본의 지구화가 드러내는 무차별적 폭력에 맞서기 위한 방법은 제도에 대한 탐닉이나 범죄의 함몰을 넘어선 것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대항 방식은 권력에 호소하는 반전운동의 평화주의적 전망이 아니라, 다중의 항구적 자치를 위한 투쟁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이와 함께 제국에 속하면서 그에 대항하는 다중은 제국의 지배형식을 넘어 새로운 삶의 양식을 창출하는 계획적 분리의 운동으로서 코뮨주의적 전망을 세울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2부에서는 갈수록 그 중요성이 더해 가고 있는 사이버스페이스의 등장 배경과 안고 있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이 새로운 공간에서 다중의 사이버 코뮨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다.

저자는 사이버스페이스가 프랑스 68혁명 이후 계속된 자본과 노동간의 지난한 투쟁 가운데서 자본이 노동자들을 공장에서 추방하고 그 축적의 토양을 사회적 삶 전체로 확장하기 위해 자본주의적 생산에 대한 총체적 과정의 디지털화를 추진하면서 배태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생활세계의 복잡성과 우발성을 무시한 채 과학기술 발전의 동인을 자본과 노동간의 모순이라는 단순도식 속에서 이해하려는 저자의 편견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사회적 두뇌로 등장한 사이버스페이스의 독특한 성격은 노동과 삶의 경계를 서서히 허물어 가고 있으며, 전통적 현실공간을 포섭한 이 공간을 기초로 제국에 저항하는 다중의 새로운 코뮨이 탄생할 것임을 예고하는 저자의 말은 귀담아둘 만하다.

마지막 3부는 제국의 한국적 지형을 다음 몇 가지 측면에서 비판하고 있다. 먼저 9.11 테러 이후 한국의 좌파 내에서 제국주의론이 슬며시 부활하고 있음을 꼬집고 이것은 지금의 자본주의적 지구화에 대한 민족주의적 대응에 힘을 실어줄 뿐이라고 경계한다.

그러면서 한국에서의 신자유주의가 어떻게 전개되고 있으며 그 성격은 무엇인지를 분석하고, 변화된 세계 속에서 학생운동과 노동운동간의 관계를 다시금 정립할 것을 제기하고 있다.

즉 자본의 신자유주의 전략의 일환으로 시행되고 있는 대학의 학부제적 재편은 수업의 강제 노동적 성격을 드러냄과 동시에 학생의 노동 계급적 지위를 뚜렷이 하고 있다고 밝힌다.

결국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은 이제 둘 다 노동계급이라는 존재론적 위상과 운동의 계기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앞으로는 노학"연대"가 아닌 "공명"(共鳴 resonance)의 방식으로 서로의 작은 울림에 주목하고 귀기울이면서 함께 그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외에 최근 우리 사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일상적 파시즘(임지현)이나 분단체제론(백낙청), 똘레랑스(홍세화) 와 같은 담론들이 정당한지를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저자 입장은 이들 담론이 긍정적인 면이 있음에도 자본의 신자유주의적 전략과 운용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함으로 오히려 그에 봉사할 수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특히 똘레랑스의 윤리정치학 비판은 눈여겨 볼만하다. 저자에 따르면 똘레랑스는 권력과 다중의 길항이 표현되는 공간이며 똘레랑스를 보편적 가치로 승격시키는 것은 권력과 다중의 갈등관계를 영속시키는 것이다. 저자는 그것이 중도, 중용 그 무엇으로 표현되더라도 권력과 다중의 갈등 지속은 다중에 대한 권력의 지배가 관철되는 형식일 뿐이라고 말한다.

국가권력을 넘어 자율과 자치로서 똘레랑스까지 규율해야한다면서 아우또노미아(자율주의를 내세우는 좌파운동)를 역설하는 저자의 주장을 보면서 오래 전에 읽은 한 칼럼이 떠올랐다.

이현주 목사가 한겨레신문에 쓴 "무너지는 나라, 일어서는 백성"이라는 제하의 글이다. 무수한 나라가 부침을 거듭했건만 민중은 항상 존재했다는 것. 과연, 저자가 희구하듯이 국가권력을 넘어선 민중의 전지구적 자율과 자치의 시대가 열리는 날은 멀기만 한 비현실적 이상에 불과한 것일까?

지구 제국

조정환 지음, 갈무리(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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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솔샘교회(solsam.zio.to) 목사입니다. '정의와 평화가 입맞추는 세상' 함께 꿈꾸며 이루어 가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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