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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실'은 율곡(栗谷)과 도산(島山)이 주도한 사회개혁 사상과 실천의 핵심어였습니다. 17세기 후반을 산 율곡은 그 시기를 조선의 창업기(創業期)와 수성기(守成期)를 지난 중쇠기(中衰期)로 인식하고 경장(更張)이 필요한 시기라고 판단했습니다. 20세기 초반을 산 도산은 그때를 조선이 독립을 되찾기 위해서 힘을 길러야 할 때라고 여기고 일대 개혁(改革)이 필요한 시기라고 판단했습니다.

두 사람의 경장(更張)과 개혁(改革)의 중심에는 '선비(士)를 기르자'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율곡은 '속된 선비(俗儒)'나 '썩은 선비(腐儒)'들은 경장을 이룰 수 없으며 '진짜 선비(眞儒)'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도산도 개혁을 이끌고 독립을 쟁취할 선비가 필요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조직한 단체 중의 하나가 '선비를 일으키는 모임' 즉 흥사단(興士團)이었습니다.

율곡과 도산은 또 조선의 경장을 추진할 진짜 선비들과 조선의 독립을 쟁취해 낼 선비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실(務實)임을 강조했던 점에서도 같습니다. 율곡은 <동호문답>이라는 저서에서 무실이 진짜 선비들의 '자기를 닦는 일의 가장 중요한 일(務實爲修己之要)'이라고 했습니다. 도산은 흥사단을 조직하면서 거기서 선비들이 일어나기 위해서 함께 수련해야 할 네 가지 정신 중의 첫째로 무실(務實)을 제시했습니다.

율곡과 도산의 무실(務實)은 '선비들의 단결(團結)'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도 공통됩니다. 무실은 선비들의 도덕성 함양의 방법이자 사회 개혁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이지만 그 두 가지 목표는 '선비들이 힘을 모을 때에만 가능하다'는 점을 율곡과 도산은 깨닫고 있었습니다.

율곡 당시에는 사림파가 훈구파의 탄압을 견디고 서서히 관직에 등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율곡의 등용 자체가 사림파의 득세와 훈구파의 몰락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러나 훈척(勳戚)이 퇴조하고 사림(士林)이 성장하면서 조정은 다시 사림파 내의 분열조짐을 내비치기 시작했습니다.

조선 개국 이래 왕들은 대체로 유학을 장려하면서 문치(文治)에 힘을 썼기 때문에 학자와 관료의 공급원으로서의 유림(儒林)은 활기에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평화로운 공존을 유지해 온 유림은 세조의 쿠데타로 일대 분열을 일으킵니다. 우선 세조의 쿠데타에 대한 입장 차이로 유림은 훈구파(勳舊派)와 절의파(節義派), 사림파(士林派)와 청담파(淸談派)의 네 부류로 갈라졌습니다.

훈구파는 세조의 쿠데타에 적극 가담한 집단으로 쿠데타가 성공한 덕분에 높은 지위와 많은 녹전을 차지한 사람들입니다. 절의파는 세조의 쿠데타를 절대 반대한 생육신을 중심으로 한 일파입니다. 청담파는 중국의 죽림칠현을 모방해 현실 정치를 등지고 서울 동대문 밖 죽림에 모여 세월을 보낸 일파입니다. 사림파는 세조의 쿠데타를 못마땅하게 여긴 점에서는 절의파, 청담파와 통하지만 기회를 얻으면 조정에 들어가 정치를 해 보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조정의 실권을 잡은 훈구파의 적은 당연히 사림파였습니다. 절의파와 청담파는 조정에서 제거됐기 때문입니다. 훈구파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사림파를 제거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고, 무오, 갑자, 기묘사화를 통해 숱한 사림파 선비들을 죽이거나 유배를 보냈습니다.

정치적으로 몰락했던 사림파 선비들은 명종 말기부터 다시 정치무대에 진출하기 시작했습니다. 선조가 즉위하면서 신진 사림들이 중앙의 주요 관직에 대거 등용되어 확고한 정치세력을 꾸리게 됐습니다. 율곡과 서애 유성룡 등이 바로 그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사림의 중앙 진출과 함께 훈구파는 몰락하기 시작했고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서의 사림파는 훈구파의 처리를 둘러싸고 첫 번째 대립을 보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림파가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으로 나뉘게 되는 발단이 됐습니다. 젊고 강경한 동인들은 훈구파를 가혹하게 숙청할 것을 주장한 반면 다소 나이가 많고 온건했던 서인들은 훈구파를 가혹하게 다룰 필요가 없다는 주장을 폈습니다.

요즘 율곡을 흔히 서인의 대표적인 인물로 분류하지만 그것은 올바른 일은 아닙니다. 율곡은 원래 동서의 나뉨을 극구 막으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그것은 그의 양시양비론(兩是兩非論)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선비들이 국사를 위하고자 하니 둘 다 옳다 할 수 있지만 틈이 생기고 서로 배척하는 지경에 이르러 자신만 생각하게 됐으니 양쪽이 모두 그르다고 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 것입니다.

율곡의 양시양비론은 논리적이고도 합리적입니다. 동서(東西)가 이미 나뉜 상황에서 이를 해결할 경우의 수는 세 가지뿐입니다. 동인과 서인의 한쪽이 전멸할 때까지 싸우는 것이 첫째이고, 동서를 모두 조정에서 몰아내는 것이 둘째이고, 동서가 화해하고 화합하는 것이 셋째입니다.

율곡은 우선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의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괴멸시키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모두 훈척의 부패와 비리를 척결하고 조선 사회를 경장(更張)하자는 공통의 목표를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왕이 동서 양인을 모두 조정에서 몰아낸다면 조정은 비게 되고 훈구파의 비리와 부패는 계속될 것이므로 역시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남은 길은 동서가 서로 삼가고 공경하는 군자의 논의를 거쳐서 화해와 화합의 정치를 펼쳐야 한다고 본 것입니다.

물론 당시의 동서 양파는 입으로는 화평을 주장했습니다. 그것이 '옳아 보이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율곡은 당시 입으로는 화평을 주장하면서도 마음으로는 배척을 주장하는 당파적 모순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율곡은 당시의 당쟁을 동인과 서인의 대립이라고 보지 않고 화평과 배척이라는 두 입장의 대립이라고 보려고 했습니다. '사람의 대립'을 '입장의 대립'으로 전환시킨 것입니다. 배척의 논리는 논의에 앞서 상대방 자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대화와 조화가 아예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화평의 논리에서는 상대를 인정하면서 양시양비(兩是兩非)의 자세를 견지할 수 있기 때문에 대화와 협력이 가능하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내 잘못도 있고 네 잘못도 있으니 잘못된 것은 서로 버리고 잘된 것은 서로 합하자며 대화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율곡은 더 나아가서 공시공비론(公是公非論)을 제시했습니다. 내 입장과 네 입장이라는 편당적인 입장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인심이 보편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공시(公是)와 공비(公非)를 논의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율곡은 공시공비론에 대한 더 구체적인 논의를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흑백논리를 극복하고 화합과 통일을 위한 척도로 이를 제시한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한마디로 "상식적으로 모두 인정할 수 있는 옳고 그름"에 따라 "같이 일하자"는 것이지요. 시비(是非)의 객관성과 보편성을 확보하자는 주장이었습니다.

율곡은 분당이 일어난 1575년부터 이조판서에 임명을 받았던 1582년까지 동인과 서인의 대립을 완화하고 화해시키려는 노력을 계속합니다. 그러나 율곡은 동인과 서인 양파로부터 모두 비난을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율곡으로서는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는 왕에게 올린 상소문에서 자신의 억울한 심정을 다음과 같이 토로했습니다.

"사람을 관찰하는 도리는 오직 사정(邪正)만 분간할 뿐이지 어찌 동인이냐 서인이냐를 분별할 것이겠습니까? 신으로 말하더라도 당초에 사류(士類)에게 죄를 얻은 것이 아니라 다만 양쪽을 조제(調劑)해 국사를 함께 하려 한 것뿐인데, 사류로써 그 의도를 모르는 사람이 잘못 서인을 부호(扶護)하고 동인을 억누른다고 지목하여, 한번 흠을 지적 당하자 점차 의심하게 되어 온갖 비방이 따라 일어나고, 마침내 성균관과 사학(四學)의 유생들도 혹 업신여기기에 이르렀습니다."

특히 이시기에 득세하기 시작한 동인으로부터 서인으로 지목되어 서인을 교묘하게 비호한다는 탄핵을 받게 되면서 율곡은 심한 좌절감에 빠지게 됩니다. 특히 그가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역설한 십만양병설이 동인파인 유성룡의 반대에 부딪혀 좌초되자 율곡의 좌절은 극에 달했습니다.

1582년 12월 병조판서로 임명받은 율곡은 다음해 2월 선조에게 육조계(六條啓)라고 제목을 붙인 '시급한 여섯 가지 정책(時務六條)'를 건의합니다. 6개 조항 중에서 양군민(養軍民: 군사와 백성을 양성할 것), 고번병(固藩屛: 지방의 병영을 튼튼히 할 것), 비전마(備戰馬: 싸움에 필요한 말을 준비할 것)의 3개 조항이 직접적인 국방문제입니다.

율곡은 육조계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같은 해 4월 왕을 가르치는 경연을 통해 십만양병을 재차 주장합니다. 그러나 십만양병설은 사사건건 율곡의 개혁안에 반대하던 영의정 유성룡에 의해 다시 한번 좌절됩니다. 평화시에 군대를 양성하는 것은 '호랑이를 길러 화를 남기는 것(養虎遺患)'이라고 일축해 버린 것입니다.

게다가 그는 그해 6월 동인파가 장악한 삼사(三司)의 탄핵을 받습니다. 죄목은 '권력을 제멋대로 휘두르고, 임금에게 교만을 부렸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탁핵안은 선조에 의해 거부됐지만 율곡은 스스로 <6소후청죄계>라는 상소를 통해 임금께 벌주기를 자청했고 결국 병조판서를 사임했습니다. 임금이 율곡 자신만을 아끼고 동인에 속한 신하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왕과 동인의 입장이 모두 곤란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율곡은 그를 아끼는 선조의 부름을 받고 그해 9월 재차 이조판서에 임명됩니다. 하지만 동인과 서인의 갈등이 노골화되는 가운데 율곡은 제대로 정책을 펴보지 못한 채 4개월 후인 1584년 1월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결국 조선은 아무런 방비없이 임진왜란을 맞아 국토가 초토화되고 임금과 조정은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피난을 가야하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율곡은 생전에 유성룡을 이렇게 평한 적이 있습니다.

"이현(而見:유성룡의 호)은 재주는 훌륭하나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시기하는 병통이 있어 나와 함께 일을 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네가 죽고 나면 그 재주를 펼 것이다."

중국의 도움으로 간신히 왜란이 평정된 뒤에 유성룡은 <징비록>을 쓰면서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율곡은 참으로 성인이다. 만일 그의 말을 시행하였다면 나라 일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랴! 또 그 전후의 계책을 혹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의 말이 모두 척척 들어맞는다. 만일 율곡이 있으면 반드시 오늘에 맞는 일을 할 것이니 참으로 오래 기다릴 필요도 없는 명백한 일이다.'

유성룡의 말대로 율곡은 선견지명이 있는 학자요 정치가였습니다. 율곡의 말대로 유성룡은 재주가 있는 사람이었고 왜란 중에도 율곡의 유언같은 제안을 기억해 내어 이순신과 권율을 등용하는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런 현재들이 붕당과 당쟁에 휩쓸려 서로 힘을 합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분열과 대립은 파괴적이고 자기소모적입니다. 심지어는 분열과 당쟁을 합리적인 사고로 방지하고자 했던 율곡의 노력조차도 당쟁으로 치부될 정도였으니까요.

율곡의 경장(更張)과 개혁(改革)을 위한 노력은 선비들의 무실(務實)을 추진력으로 합니다. 그러나 무실(務實)은 그 전제조건으로 선비들의 단결(團結)을 필요로 합니다. 단결된 힘이 없다면 무실자체가 가능하지도 않고 효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덧붙이는 글 | 참조: 율곡사랑 홈페이지(http://www.yulg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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