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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선거의 해가 시작된 모양이다.

주말드라마의 인기에 버금가는 당내 경선 과정을 거쳐 선출된 민주당 대선 후보 노무현 씨에 이어 한나라당에서도 과정상 많은 문제점이 지적되기도 했지만 어쨌든 전 당총재였던 이회창 씨가 대선 후보로 선출되었다.

하나같이 국민과 나라를 위해 나섰다고 하는 이들이 바로 대선 후보라는 사람들인데, 예나 지금이나 한 국가를 경영한다는 사람들은 크게 보아 두 가지 중요한 것들을 기본적으로 충족시켜야 할 것이다.

먼저 정통성 측면에서의 정정당당함이다. 광복 이후 몇몇 정통성을 획득하지 못한 정권이 들어서긴 했지만 그래도 요즈음에는 국민들의 공정한 선거를 통해 대통령이 선출되고 있다.

한편 근대 이전 시기에는 주로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권력이라는 의미로서의 왕권이 중심이었는데, 그 과정에서 그 선왕들의 위패를 모셔 놓고 제사를 지냄으로써 그 정통성을 인정받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창경궁 근처에 있는 종묘가 대표적인 예로, 역대 왕들의 신위를 모아두고 매년 제사를 지냄으로써 왕권이 갖는 불변성을 강조함과 동시에 그 권위를 내세웠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지도자 및 지도층의 정통성이라는 것이 '과거적' 성격을 갖고 있음과 동시에 국민 생활에 있어 절대절명의 중요성을 갖는 것은 아니라면, '시민들의 행복'은 현재적 혹은 미래적 의미를 갖음과 동시에 일상 생활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시민들의 행복이라고 하는 것이 매우 광범위한 개념이긴 하지만,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 있어서 행복을 나타낼 지표로 가장 손쉬운 것이 피부로 느끼는 경제적 여유가 아닐까 한다.

물론 이를 증명할 만한 구체적 증거는 없다. 다만 경제가 활발히 순환해야 그 정권의 경제정책이 성공했음을 인정하는 의식이 일반적임을 감안할 때, 정통성은 없어도 박정희 전 대통령을 추모하는 열기가 아직까지 사그라질 줄 모르는 것이나 최초의 문민정부라는 일정 정도의 정통성을 부여받기는 했지만 정권 말기에 이르러 국가 경제가 파탄나는 경험을 한 김영삼 정부의 경우에는 아직까지 국민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고 있다. 그런데 이것이 비단 현대 정치에만 나타나는 양상으로 보이진 않는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한반도 땅에 막 들어서던 무렵, 새 수도로 선정된 한양에는 왕이 거처할 궁궐과 함께 두 가지의 중요한 건조물이 만들어지게 된다.

종묘와 사직이 그것이다. 조선 태조 4년인 1396년에 종묘와 궁궐이 준공되게 되는데 이때 사직단도 함께 만들어지게 된다. 종묘가 갖는 의미는 앞서 말한 바와 같아 일단 이번 답사에서는 논외로 하고 사직의 의미를 살펴보자면 당시의 경제를 활성화시키기 위한 방편의 하나라고 추정해볼 수 있다.

이때 '당시의 경제'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농업을 기반으로 한 경제 구조였다. 즉 왕까지도 내농포 등을 통해 농경에 관심을 쏟긴 했지만 아직 영농과학이라고까지 부를 만한 수준의 기술이 나와 있지 않은 상황에서 일반 백성들에게 '어필'할 수 있던 수단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었을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제사를 지내던 곳이 사직단으로, 우리나라의 경우 그 역사는 삼국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전해진다.

사직단에 가려면 우선 경복궁에서부터 발걸음을 떼는 것이 상책이 아닐까 한다. 사직단이란 곳이 왕이 중심이 되어 제사를 지내던 곳이었으니 왕이 갔었을 법한 길을 따라가는 것이니만큼 느낌이 다르지 않을까. 일단 경복궁 광화문 앞을 아슬아슬하게 지나치는 율곡로에서 창덕궁·창경궁 방향이 아닌 반대쪽, 즉 독립문 방향으로 걷자.

이전의 조선총독 관저 자리로 이전한 청와대가 주위에 있어 어색해보이기만 하는 사복 전경들이 깔려 있어 도시 미관을 해치지만 개의치 않고 걷자. 횡단 보도 몇 개 건너고 경사가 심하지 않은 오르막길을 따라 가다보면 이내 오른쪽으로 사직공원을 알리는 팻말이 보인다.

말 그대로 지금은 제사의 기능을 잃어버린 한낱 공원이다. 짐작하다시피 일제시대 때 공원으로 개조되어 울창하던 소나무는 온데 간데 없고 어디서 왔을지 모를 벚나무들이 잔뜩 심겨져 있다. 뿐만 아니라 60년대에 들어 도시계획에 따라 도로를 내고 넓히느라고 사직단의 정문은 원래 위치에서 14m 정도 뒤로 나앉게 되었다.

제자리를 잃고 뒤로 나앉은 것이 광화문과 그 앞 해치들 말고 여기 또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무시무시한 권력의 광풍이 휘몰아치던 70년대에는 사라져 버린 여러 부속 건물들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주위에 도서관과 수영장 등의 시설을 들임으로써 본 모습을 더 잃어가다가 그나마 85년경부터 복원 사업을 시작하여 미미하나마 단이나 그 일대 일부가 복원되었다.

사직단이 놓인 곳은 경복궁을 중심으로 할 때 오른쪽에 있다. 당시에는 모든 것이 왕 중심이었기에 중국에서 들여온 법식에 따라 궁의 오른쪽에 사직을 마련하고 반대쪽에 종묘를 들였다. 바로 그 사직단의 정문은 안타깝게도 도로에 밀려 담장도 없이 홀로 서 있는데 경복궁 동십자각이나 덕수궁이라 불리는 경운궁의 수많은 담장 잃은 형제들처럼 쓸쓸해보이기만 한다.

정문 뒤에 있는 간이 농구대에서 운동을 하는 일군의 고등학생들로 보이는 이들을 지나 사직단 담장을 왼쪽으로 끼고 조금만 가면 붉은 색의 문이 왼쪽에 서 있음을 알게 된다. 신이 출입하는 문이라고 해서 '신문'이라 불리는 문으로 다른 문들이 한 칸 규모인 것과는 달리 유독 삼문 구조를 하고 있다.

특히 그 문을 기점으로 사직단 안쪽으로 3단으로 된 길이 나 있는데, 왕궁이나 종묘 등에서 보던 길과 흡사하게 생겼다. 한편 길이 꺾이는 부분에는 다른 곳과는 달리 검은 색 판석으로 네모 반듯한 공간을 구성해 놓았는데 제사 등을 지낼 때 왕이 서는 자리로, 종묘 등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한편 특이하게도 바깥 담장과 안의 제단 사이에 사람 키보다 약간 낮아 보이는 담장이 둘러쳐져 있다. 이는 '유'라고 불리는 것으로 신성한 구역인 성계와 인간들의 세상인 속계를 구분하는 울타리이다.

이번 답사에서는 직접 들어가 볼 수 없어 답답하기만 했지만 사직단의 중심은 뭐니뭐니해도 단 그 자체가 아닐까 한다. 비록 바깥 담장 밖에서 멀뚱히 쳐다볼 수밖에 없었지만 단이 갖는 의미와 역사에 대해서는 쉽게 다가오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사직단의 단은 크게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사(社)'를 위한 단과 '직(稷)'을 위한 단이 그것인데, 여기서 '사'는 대지의 신을 의미하며, '직'은 오곡의 신을 의미한다.

즉 사직단은 대지의 신과 오곡의 신을 동시에 기리고 있는 형식인데, 사단을 동쪽에 배치하고 직단은 왼쪽에 배치하는 형식을 따른다. 각각의 단들은 다섯 가지 색깔의 흙으로 덮여지는데 보통 오방색이라고 하는 청색과 백색, 적색, 흑색이 동서남북 방위를 따라 덮여지며, 마지막으로 중심 부분은 이전부터 황제나 중심을 의미하는 황색으로 덮여지게 된다.

한편 사직단에서는 당시의 건축물들이 그냥 아무 뜻 없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일정한 규칙에 의해 만들어졌음을 살펴볼 수 있는데, '천원지방(天圓地方)'이 그것이다. 즉 땅은 네모나고 하늘은 둥글다는 의미에서 땅과 곡식에 관련된 신들을 모신 곳이니 아니나 다를까 두 단이 모두 네모 반듯한 모양을 하고 있다.

이는 중국 베이징의 천단(天壇)이 원형을 하고 있는 것을 고려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또한 예로부터 숫자 3을 길한 수로 생각했었기 때문인지 공교롭게도 두 단의 높이가 3척일 뿐만 아니라 각각의 장대석도 3개 층으로 쌓아올려 만들었다.

보통 사직은 왕 혹은 그 나라의 안녕과 동일시된다고 한다. 이를테면 텔레비전 사극 등에서 국가가 풍전등화의 위기 상황에 있을 때 '전하, 사직이 위태롭습니다' 등의 표현을 한다든가, 종묘와 함께 '전하, 종사를 보존하시옵소서'라고 말하는 등 사직은 정통성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는 종묘와 함께 나라 그 자체를 의미해 왔다.

그런 의미에 있어서 답사를 통해 만나는 사직단의 의미가 새삼 다르게 전해져 오는데, 종묘와는 달리 사직단은 전국 곳곳에 세워 지방 원님이 제사를 지낼 수 있어 당시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보다 더 친숙하게 다가오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양대 정당의 대선 후보가 모두 선출된 지금, 과연 그들은 사직단에서 왕들이 해마다 봄과 가을, 겨울 및 다른 날에도 수시로 땅과 곡식의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며 풍년이 오기를 기원하는 것에 버금가는 절실한 마음이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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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기억 저편에 존재하는 근현대 문화유산을 찾아 발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저서로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알마, 2008), <다시, 서울을 걷다>(알마, 2012), <권기봉의 도시산책>(알마, 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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