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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대통령 선거 때마다 단골메뉴로 등장했던 '색깔론'이 이번에도 어김없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현재 전개되고 있는 색깔논쟁이 이전과는 그 양상을 전혀 달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주로 정통성이 부족한 여당 후보가 야당 후보를 공격하기 위해 색깔론을 제기했고, 야당 후보가 그 색깔론에 일방적으로 시달려왔다.

박정희에게 사상논쟁을 제기했던 민정당 대선 후보 윤보선. 출전: 윤보선 회고록 <외로운 선택의 나날>.
3대 대선(1956년)에서 진보당의 조봉암 후보가, 7대 대선(1971년)과 14대 대선(1992년)에서 신민당과 민주당의 김대중 후보가 전형적인 색깔론의 희생자였음은 일반 국민이 주지하고 있는 사실이다. 물론 당시 색깔론을 제기한 장본인은 이승만, 박정희, 김영삼 전 대통령 등 모두가 여당 후보였다.

여야 뒤바뀐 색깔론 공세

그런데 어쩐 일인지 이번에는 여당 후보, 그것도 여당 경선에서 1위를 달리고 있는 노무현 후보가 색깔론의 표적이 되고 있다.

그러나 사실 대통령 선거에서 색깔론에 휘말려 곤욕을 치른 최초의 여당 대선 후보는 '반공의 화신' 박정희 전 대통령(이하 직책 및 존칭 생략)이었다.

박정희가 누군가?

이른바 '혁명공약' 1장으로 반공(反共)을 내걸고 쿠데타를 일으키고, 권력을 손에 쥐자마자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 등 진보주의자를 간첩으로 몰아 살해하고, 1997년 15대 대선 당시 이회창, 이인제 후보가 정치적 우상으로 떠받들던 인물이 아닌가.

그러나 그런 박정희마저도 5대 대선(1963년) 당시 색깔론의 덫에서 전혀 자유롭지 못했던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박정희는 색깔론이 얼마나 한국정치의 고질적 굴레인가를 온몸으로 보여준 상징적 인물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 이인제 고문이 지난 3월 28일 경남 진주 대의원 간담회에서 했던 발언은 의미심장하다.

이날 그는 두 가지 주장을 했는데, "좌쪽으로 치우친 사람이 후보가 되면 12월 대선에서 한나라당에 필패한다"와 "박정희 대통령은 근대 한국의 아버지다"라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해둘 것이 있다. 이인제 후보는 과연 자신이 '근대 한국의 아버지'로 섬기고 있는 박정희야말로 해방 정국 당시 '좌쪽으로 치우친 사람'의 수준을 넘어 아예 대한민국을 전복시키고 공산혁명을 일으키려 했던 '남로당의 군사 총책'이었다는 사실을 알고나 있는 것일까. 실제로 박정희는 이 무시무시한 전력 때문에 1963년 대선에서 심각한 홍역을 치러야 했다.

'좌익전력'의 박정희를 존경하는 이인제

이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뒤로 미루기로 하고 우선 최근 전개되고 있는 색깔논쟁부터 정리해 보자.

2002년 16대 대선을 앞두고 제일 먼저 색깔론을 제기한 장본인은 여당의 대선 후보 중 한 명인 이인제 민주당 고문이었다.

모든 국민이 알고 있듯이 그는 예상치 못했던 노무현 태풍을 잠재우기 위해 처음에는 '음모론'을 제기한 바 있다. 정작 이 고문 자신이 1997년 대선 당시 음모론(<조선일보>와 <중앙일보>가 집중적으로 제기한 김영삼의 이인제 지원설과 김현철 정치자금의 국민신당 투입설)의 피해자였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 고문은 '잠들지 않는 노풍'에 물불을 가릴 처지가 못 되었던 모양이다.

음모론마저 씨알이 먹혀들지 않고 광주경선 이후 여론조사에서 계속 뒤지는 것으로 나타나자 그가 마지막으로 들고 나온 것이 바로 색깔론이다. 그는 과거 노무현 고문이 했던 발언이나 기고 중에서 몇 대목을 전후 맥락을 생략한 채 문제 삼는 고전적 수법을 썼거니와, 그와 <조선일보> 기자 출신인 그의 측근이 목청을 높이며 폭로한(?) 색깔론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노무현 고문이 노동자가 주인 되는 세상을 만들자고 했다." "노동자들에게 악법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1990년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하는 재야단체의 성명서에 서명했다." "강연에서 '해방정국 당시 통합세력은 패배하고 분열세력이 득세했다'고 했는데 이것은 수정주의 역사관이다." "국가보안법을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사모에 한총련 학생들이 참여하고 있다는 의혹이 있다." "노 고문의 장인이 좌익에 부역했다."

이인제 고문의 폭로가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앙일보> 등 수구언론의 '아낌없는 중계보도'에 의해 증폭되면서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켰음은 물론이다. 다만 색깔론의 약효가 예전만 같지 않아 속들이 꽤나 타는 모양이다. 하긴 그 동안 얼마나 우려먹었는데, 약효가 남아나 있겠는가.

멍석이 깔리자 한때 '대쪽'으로 불렸던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도 색깔논쟁에 가세했다. 그는 지난 4월 3일 경선 출마 기자회견에서 "급진세력이 좌파적 정권을 연장하려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노무현 고문과 김대중 정부의 사상이 의심스럽다"는 여론을 조성하겠다는 의도를 숨김없이 드러낸 것이었다.

색깔론 '중계보도'하는 조중동

그렇다면 이회창 전 총재가 '김대중 정부=좌파적 정권'의 근거로 내세운 것은 무엇인가. 남경필 한나라당 대변인이 제시한 근거 중 대표적인 것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대북정책: "무조건 퍼주기식 사업은 안보 위협을 가중시키는 친북정책이다."
△복지정책: "잘 사는 사람이나 못 사는 사람이 똑같은 수준의 의료서비스를 받는 평등주의적 정책은 좌파적이다."
△경제정책: "빅딜정책은 시장원리를 무시한 사회주의적이고 계획경제식 발상이다."
△교육정책: "능력의 차이와 우열을 인정하지 않는 교육평준화는 사회주의적 발상이다."

그러나 그것은 원내 제1당이 제기한 색깔론치고는 너무나 부실하고 졸렬한 논리라는 비판에 직면해야 했다. 무엇보다 먼저 한나라당이 시비를 건 교육정책, 즉 교육평준화는 자신들이 정치적 원조로 여기고 있는 박정희 정권이 1973년부터 추진한 정책이 아닌가.

오죽했으면 평소 반김대중 성향을 강하게 보여왔던 손호철 서강대 교수마저 한나라당의 색깔론 제기에 한심하다는 반응을 보였겠는가. 실제로 손 교수는 4월 6일자 <중앙일보>에 '색깔론 제대로 알고 하자'는 제목의 칼럼을 게재하고 한나라당의 주장에 대해 이렇게 조목조목 반박했다.

△대북정책: "햇볕정책은 경제교류 등을 통해 북한을 변화시켜 장기적으로는 흡수통일하려는 '세련된 흡수통일론'으로서 클린턴 정부의 노선과 일치한다. 따라서 햇볕정책을 좌파라고 하는 것은 클린턴이 좌파라고 우기는 것과 진배없다…국가보안법 개정 주장이 좌파적인 것 아니냐고 할지 모르지만 그렇다면 이를 촉구해온 유엔이 좌파라는 주장에 다름 아니다."
△복지정책: "생산적 복지 프로그램이 좌파적이라고 할지 모르나 이 역시 대처의 프로그램이다."
△경제정책: "현 정권의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이 좌파라면 IMF도 좌파라는 이야기이자, 현 정부의 신자유주의에 반대해온 진보세력의 입장에서는 '좌파에 대한 모독'이다."

그러면서 손호철 교수는 이회창 전 총재에게 이렇게 일침을 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 같은 문제점을 알면서도 이 총재가 대선을 색깔론으로 몰고 가기 위해 좌파정권 운운하고 나섰다면 비판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 보수와 좌파의 뜻을 제대로 몰라 정말로 그렇게 믿고 있다면 더더욱 문제다…김대중 정부가 좌파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결국 자신이 얼마나 냉전적이고 수구적인가를 보여주는 방증일 따름이다. 히틀러의 입장에서는 우파 정치인이었던 드골도 좌파로 보일 뿐이다."

자, 이제 타임머신을 타고 1963년 5대 대선 당시로 날아가 보자.

1963년 9월 24일.

공화당의 박정희 후보와 박빙의 대결을 벌이고 있던 민정당 대선 후보인 윤보선 씨(이하 존칭 생략)가 투표일(10월 15일)을 20일 앞두고 기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요지의 충격적인 발언을 했다.

"여수·순천반란사건의 관계자가 우리 정부에 있다는 것을 상기해야 합니다. 박정희 의장의 사상이 의심스럽습니다. 우리 야당은 '이질적(異質的) 민주주의'와 대결하고 있습니다."

집권 여당의 대선 후보인 박정희가 여순사건에 연루됐으며 사상이 의심스럽다는 야당 대선 후보 윤보선의 폭로로 선거정국은 갑자기 경색되기 시작했다.

물론 윤보선은 처음부터 사상논쟁, 즉 색깔론을 제기할 생각은 없었다고 자신의 회고록 <외로운 선택의 나날>에서 밝힌 바 있다. "처음부터 그렇게 심한 말로 그를 공격할 생각은 없었"는데 박정희가 먼저 시비를 걸어왔다는 것이 그의 해명이다. 실제로 박정희는 전날 방송연설에서 "윤모(尹某)는 참다운 민주주의를 하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발언했는데, 윤보선은 이에 "참으로 분격"한 나머지 색깔론을 제기했다고 한 것이다.

윤보선이 굳이 이렇게까지 해명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대다수 국민들이 이념의 대립과 전쟁으로 엄청난 상처를 입었을 뿐만 아니라 연좌제(連坐制) 등이 상징하듯 그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는 상황에서 색깔론을 제기하는 것은 한 나라를 이끌어가겠다는 정치지도자로서는 결코 떳떳치 못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정치지도자들은 최소한 그런 상식과 도리는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윤보선의 분격과 '색깔론' 제기

그러나 윤보선의 적극적 해명과 달리 민정당의 색깔론 제기는 이미 그 이전부터 준비된 선거전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윤보선의 기자회견이 있기 하루 전인 9월 23일 전남 여수 민정당 선거유세에서 찬조연설자인 윤제술 씨가 이미 다음과 같은 '감상적이고 선동적인' 연설을 했던 것이다.

"이곳은 여순반란사건의 핏자국이 묻은 곳입니다. 그 사건을 만들어낸 장본인들이 죽었습니까, 살았습니까? 살았다면 대한민국에서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를 여러분은 아십니까, 모르십니까? 여러분이 모른다면 저 종고산은 알 것입니다."

종고산은 여수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1948년 발생한 여순사건의 악몽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던 약 8천명의 청중은 잔뜩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순사건의 장본인'이 결국 박정희를 겨냥한 것임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상논쟁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그들은 온몸으로 체득한 뒤였다.

이후 민정당은 파상적인 색깔론 공세를 펼쳤거니와, "박정희는 국방경비대 시절 좌익에 관련했었다" "박정희는 여순반란사건 때 군사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박정희의 형도 대구 10·1폭동 때 활약했다" 등의 주장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투표일이 다가올수록 색깔론은 더욱 가열되었다. 9월 25일 서울 교동국민학교에서 열린 재야 6당 공명선거투쟁위원회의 시국강연회에서 김준연 자민당 대표최고위원은 1961년 5월 26일자 <타임>지 박정희 프로필 기사를 인용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박정희 소장은 전에 공인된 공산주의자였습니다. 그는 여순반란사건을 조직하는 데 협력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승만 씨의 장교들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전향하여 반란군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고 사형을 면제받았습니다."

9월 28일. 이번에는 대선 후보인 윤보선이 직접 나섰다.

박정희는 1963년 대선에서 색깔론에 시달렸다.
"삼천만의 이름으로 박정희의 사상을 규탄하는 바입니다. 박정희는 자유민주주의자가 아닌 것이 뚜렷합니다. 박정희가 민족적 민주주의 운운하는데 보통 공산주의자들이 혁명을 할 때 민족적 민주혁명이라고 합니다."

박정희 사상논쟁은 이른바 '황태성 사건'을 계기로 더욱 격화됐다. 황태성 사건이란, 박정희의 형 박상희의 절친한 친구이자 일제시대부터 공산주의 이론가로서 대구 10·1사건 당시 경상북도 인민위원회 선전부장을 지낸 황태성이 북한에서 무역성 부상(차관)이라는 고위직에 있다가 5·16 직후인 1961년 9월 박정희와의 비밀회담을 위해 밀사로 내려온 것을 말한다.

대선 와중에 불거진 '황태성사건'과 박정희

그런데 박정희는 황태성을 체포해 간첩죄로 재판을 진행하면서도 이를 외부에 공개하지 않고 황태성의 인도를 요구하는 미군측의 강력한 요청을 계속 거부해 그의 사상에 대한 의구심을 증폭시키는 위험한 상황을 자초한 바 있다.

투표일이 가까워오자 "이북에는 김일성이 있고 남한에는 박정희가 있다. 이북에는 공산당이 있고 남한에는 공화당이 있다. 공화당 창당 자금은 황태성이 댔고 그로부터 공화당 창당에 대한 밀봉교육을 받았다"는 무시무시한 내용을 담은 삐라가 시내에 뿌려지기도 했다.

야당의 색깔론 공세로 코너에 몰린 채 침묵을 지키고 있던 박정희는 "나를 매카시즘이란 후라이팬에 달달 볶아 새빨간 빨갱이를 만들려는 수법이다"라며 반박했지만, 목소리에는 그리 힘이 없었다.

그렇다면 박정희가 좌익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야당의 주장은 사실인가?

박정희를 여전히 반공투사이자 애국자로 섬기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것은 사실이다.

1917년 경북 선산에서 출생한 박정희는 일제시대에 문경소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중 '진충보국 멸사봉공(盡忠保國 滅私奉公)'이라는 혈서(血書)를 쓴 덕분에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더욱이 그는 일본육사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뒤 관동군 장교로서 독립군 토벌에 나섰다. 그 무렵 그는 '다까끼 마사오(高木正雄)'라는 일본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박정희 개인에겐 불행하게도(?)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왔다. 독립군 토벌의 지울 수 없는 원죄 때문에 그의 인생은 거기서 끝나는 듯했다. 그러나 1946년 5월 귀국한 그는 그해 가을 별 문제 없이 미군정 산하의 국방경비대에 입대할 수 있었다. 미군정 당국이 장교를 양성하면서 친일 부역자 출신을 전혀 문제삼지 않았고, 국방경비대는 이미 박정희의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사 출신 선배들이 석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1947년 아주 불가사의한 일이 발생했다. 박정희가 남로당에 입당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출세주의자이자 대세주의자인 박정희에게는 그리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미 일제시대에 나폴레옹 같은 위대한 장군이 되고 싶다는 일념으로 식민지 조국을 배신한 채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조국을 되찾겠다는 동포 독립군들을 사냥하는 일에 나서지 않았던가.

더욱이 해방 정국 당시 한반도를 주도하고 있던 것은 사회주의였다. 실제로 미군정이 1946년 실시한 국민여론조사에 따르면 당시 국민 중 약 70%가 사회주의를 지지하고 있었다. 그러한 분위기가 군에도 그대로 투영되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체질적으로 공산주의를 싫어했고, 이론적 무장이 없었지만 박정희에게 그것이 문제될 것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일본군이든, 남로당의 일이든 박정희가 자신의 분야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이며 맡겨진 임무에 최선을 다했던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실제로 나중에 공개된 재판기록과 미군정 정보보고서에 따르면, 박정희의 당시 남로당 직위는 '군사 총책'이었다. 그는 남로당 고위 간부인 이재복, 최남근 등과 함께 군대 조직 특히 그가 중대장으로 있던 육사 내부에 남로당 세포를 침투시키고 무력혁명을 획책하는 활동을 했다.

그러나 1년만에 출세를 향한 박정희의 꿈은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1948년 10월 19일 전남 여수 14연대에서 지창수 상사 등 남로당 하부 세포가 주도한 반란이 일어난 것이다. 이른바 여순사건이었다. 이승만 정부는 반란이 진압된 후 대대적인 숙군(肅軍) 작업을 전개했는데, 이 과정에서 육군본부 정보장교로 근무하던 '고정간첩' 박정희도 검거된다.

남로당 조직원 불고 목숨건진 '배신자 박정희'

그런데 여기서 다시 박정희의 놀라운 생존술이 발휘된다. 그는 연행되자마자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군부 내 남로당 조직체계와 명단을 고스란히 숙군 작업을 주도하고 있던 김창룡 등에게 제공한 것이다. 덕분에 당시 숙군 작업으로 남한 국군 중 약 5%인 4700명이 빨갱이로 몰려 처벌되고 수백명이 총살형과 징역형을 당했지만 정작 군부 내 남로당 최고위층이었던 박정희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박정희는 그 후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불명예 파면되었지만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5일만에 군으로 복귀할 수 있었고, 그로부터 정확히 11년 후에는 쿠데타를 통해 그렇게도 꿈꾸던 최고의 권력을 거머쥘 수 있었다.

앞에서 설명한 내용은 MBC 특별기획 <이제는 말할 수 있다> 43편 '박정희의 레드 콤플렉스-황태성 간첩 사건'에서도 자세히 볼 수 있다.

그렇다면 1963년 대선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 그리고 색깔론은 선거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1975년 신민당 김영삼 총재와 함께 한 윤보선. 김영삼은 1992년 대선에서 상대 후보인 김대중에 대해 색깔론을 제기했다. 출전: 윤보선 회고록 <외로운 선택의 나날>
그해 10월 17일 발표된 개표 결과는 박정희 470만표, 윤보선 455만표. 15만표 차이의 아슬아슬한 승부였다.

여야의 승패 요인은 대략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무엇보다 먼저 민정당은 조직력과 자금력에서 공화당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박정희는 정치규제를 통해 야당 정치인의 손발을 모두 묶어놓은 뒤 김종필의 중앙정보부를 통해 공화당을 사전에 조직해 놓은 상황이었다. 더욱이 여당의 정치공작에 놀아나 야당은 통합하지 못한 채 분열을 거듭하고 있었다.

둘째, 민정당의 전략적 패착도 한몫을 했다. 우선 민정당은 '야비한' 색깔론을 전면에 내걸면서 야당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역설적으로 '진짜 빨갱이'였던 박정희는 야당이 제기한 색깔론의 피해자(?)가 되면서 '진보주의자'가 되고, 윤보선은 분단체제의 덕이나 보려는 '보수주의자'가 돼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여당도 아닌 야당이 색깔론을 제기한 이유는 무엇일까. 방송작가 김교식 씨는 자신의 저서 <다큐멘터리 박정희>에서 당시 민정당이 색깔론을 선거전략으로 선택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조직력이 약한 야당 후보가 선거에서 부동표를 자신들 쪽으로 흡수하기 위해서는 붐을 일으킬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10·15선거에서는 야당측의 분열로 국민들의 기대가 크게 무너졌고 붐을 형성할 이슈도 제시되질 못하고 있었다. 사상논쟁은 침체된 선거 분위기에서 비장의 카드로 숨겨두었다가 막판 선거 분위기를 한꺼번에 휩쓸어 담을 정략적인 무기로 꺼낸 것이었다."

당시의 일반적인 국민여론은 쿠데타를 일으킨 여당 후보 박정희의 집권을 바라지 않는 분위기가 매우 강했다고 한다. 그러나 국민들은 분열을 거듭하며 실망만 안겨주다 선거 막판에 색깔론을 '정략적인 무기'로 들고 나온 야당 후보에게서도 희망을 느낄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상황에서 역설적으로 박정희는 분단시대의 순교자(?) 행세를 할 수 있었다. 실제로 그는 막판 유세에서 다음과 같은 연설을 하기도 했다.

"싸우다 힘이 부족하면 빨갱이라는 모략을 하는 것은 과거의 한민당이 주로 쓴 수법인데 오늘의 야당도 이와 똑같은 수법을 쓰고 있습니다. 3권을 쥐고 있는 최고회의 의장을 빨갱이로 모는 구정치인들이 정권을 잡는다면, 앞으로 우리나라에는 그들이 밉게 보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빨갱이로 몰리는 무서운 분위기가 될 것입니다."

2002년 대선에서 다시 불거진 색깔론 공방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색깔론에 그렇게 호되게 시달렸던 '진짜 빨갱이' 출신의 박정희가 1971년에는 거꾸로 야당의 김대중 후보에게 색깔론을 제기하면서 '무서운 분위기'를 연출한 것이다. 이후 색깔론이 선거 때마다 여당이 야당을 억압하는 '정략적인 무기'로써 '전가의 보도'로 활용됐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2002년 4월.

우리는 그로부터 40년만에 또 다시 한국정치의 가위를 누르는 색깔론의 망령을 목도하고 있다.

더욱이 1997년 15대 대선 당시 한 수구언론이 만들어낸 '박정희 신화'에 편승하여 머리 스타일마저 '진짜 빨갱이' 출신 박정희를 흉내 내며 서로 자신이 박정희의 '정치적 적자'라며 경쟁했던 두 명의 정치지도자가 2002년 16대 대선을 앞두고 또 다른 한 정치지도자의 몇 마디 발언을 거두절미한 채 색깔론 공세를 펼치고 있는 것을 우리는 과연 어떻게 보아야 할까.

한편 색깔론과 관련해 최근 언론의 '부적절한 행태'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조선일보>를 비롯한 수구언론들은 불합리한 색깔론을 뜯어말리거나 비판하기는커녕 도리어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하거나 나아가 기름을 끼얹는 역할을 도맡고 있다.

그렇다면 <조선일보>는 1963년 당시 '진짜 빨갱이' 출신 박정희에 대한 색깔론이 제기되었을 때 과연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 자유민주주의가 헌법으로 보장하고 있는 노동조합마저 제대로 활동하지 못하고 있던 시절에 "노동자가 주인 되는 세상을 만들자"고 했던 한 정치지도자의 한마디 발언에서마저 사상검증의 필요성을 느꼈던 그들이라면 '남로당 군부 총책' 출신의 사상을 검증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아마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달려들지 않았을까.

이와 관련 1963년 5대 선거 당시 <조선일보> 미국특파원이었던 문명자 씨가 월간 <말> 1997년 10월호에 발표한 '박정희·김종필의 좌익전력'이란 글은 시사적이다.

1963년 10월 대통령 선거 국면에서 '황태성 사건' 등 박정희 사상논쟁이 벌어졌을 때 문명자 씨는 미국 국회도서관에 있던 박정희 관련 자료들을 찾고 있었다. 그러던 중 5·16에 반대했다가 미 국방성의 배려로 국방성 장학생으로 워싱턴에 와 있던 강문봉 장군(자유당 시절 육군 정보국장·작전국장 역임, 중장으로 예편)이 그녀에게 귀가 번쩍 뜨일 얘기를 해주었다.

"미군 정보기관인 G2의 비밀정보원 출신으로 한국에 주재하면서 '황태성 사건'을 제일 먼저 알아챘던 래리 베이커라는 사람이 박정희에 의해 추방돼 자기 고향인 네브라스카에 돌아와 있다고 합니다."

강문봉 장군은 과거 자기 군 동료들을 통해 그 같은 정보를 입수한 모양이었다. 래리는 한국군 창설 이후 육군참모총장의 군사고문을 역임하는 등 가장 오래 한국을 담당한 하우스맨 밑에서 일하던 사람인데 한국에서는 한 보험회사의 세일즈맨으로 가장하고 있었다고 한다. 5·16 후 외교관 추방 1호가 그레고리 핸더슨 문정관이고 민간인으로서는 래리가 추방 1호인데, 그 이유는 바로 그가 황태성 사건에 달라붙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문명자 씨는 강문봉 장군에게 부탁해 래리의 집 전화번호를 알아내 곧 그에게 연락했다고 한다. 래리 베이커는 문 씨의 취재에 협조하겠다는 의사를 밝혀 왔다. 그래서 문 씨는 그에게 황태성 사건에 대한 질문서를 보냈는데, 곧 다음과 같은 요지의 회답이 왔다.

"황태성과 박상희는 박정희가 남로당에 입당할 때의 신원보증인이다. 5·16 이후 황태성이 박정희와 접촉하기 위해 내려왔을 때 박정희는 김종필에게 그를 만나보도록 했다. 나는 이 정보를 입수해서 상부에 보고했는데 상부에서는 황태성·김종필이 회동하는 반도호텔을 감시하라고 했다.

그때 김종필은 중앙정보부를 조직하느라 반도호텔 한 층을 온통 차지하여 사용하고 있었다. 나는 두 사람이 반도호텔 8층 몇 호실에서 몇 시간 동안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를 모두 조사해 상부에 보고했다. 황태성이 내려온 목적은 박정희와의 연대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같은 정보를 입수한 미국측은 황태성을 미 정보기관에 인도하라고 박정희에게 계속 압력을 가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석연치 않은 이유로 황을 인도하지 않고 계속 시간을 끌었고, 오히려 그 사건을 추적하는 나를 한국에서 추방했다."

조선일보, '황태성 기사'로 김형욱에 융자받아

문명자 씨는 리래 베이커의 증언을 즉시 기사화해서 <조선일보> 본사로 타전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이 기사는 보도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만 하더라도 크게 문제의식을 갖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이 기사만이 아니라 5·16 이후 보낸 기사 중 상당수가 편집국장의 휴지통으로 들어가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역시 군사정권의 압력을 받아 그렇게 되었거니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데 문 씨는 1971년 뉴욕에서 우연히 만난 김형욱 씨(전 중앙정보부장)로부터 그 이유를 전해듣게 되었다. 다음은 두 사람이 나눈 대화 내용이다.

"문 기자가 보낸 황태성 관련 기사 말이요. 그거 보고 나는 사실 문 여사가 굉장히 무섭게 생긴 여성인 줄 알았소."
"래리 베이커가 증언한 기사 말이죠?"
"맞아요. 그런데 문 여사가 보낸 그 기사 말이요. 그거 사실은 내가 가지고 있었지."
"그게 왜 김 부장한테 갔습니까?"
"방일영 씨(당시 <조선일보> 사장)가 그 기사 가지고 나한테 왔습디다. 받아서 읽어보니 식은땀이 나더구만. 얼른 비서실장 불러 금고에 넣으라고 하고 '뭘 도와 드릴까요' 했지요."
"그래서요?"
"방일영 씨가 '융자 좀 해 달라'합디다. 그래서 결국 한 3억 해줬지 아마."
"뭐라고요?"

문명자 씨는 다음과 같은 사례도 증언했다.

당시 강문봉 장군은 여순사건 무렵 박정희의 정치적 위치에 대해서도 문 씨에게 중요한 증언을 해주었다고 한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박정희는 여순사건 당시 남로당 군책으로서 체포돼 재판을 받았는데 재판장이 5·16 후 미국방성 장학금을 받아 미시간에 와 있던 최석 장군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군 선배인 정일권, 백선엽, 이용문 장군 등이 박정희를 구출하는 데 힘써서 결국 박정희는 3천명에 달하는 국군 내 남로당원 명단과 조직체계를 넘겨주고 자신은 구명 받아 문관으로 군에 복귀할 수 있었다는 충격적인 내용도 증언해주었다.

문명자 씨는 미국 국회도서관에서 당시의 신문과 미군 정보자료 등을 입수해 강문봉 장군의 증언을 보강해 박정희의 전력에 대한 기사를 본사에 보냈는데, 기사의 첫줄은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박정희가 여수·순천반란사건 당시에 남로당 군책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러나 이 기사는 <조선일보>에 보도되지 않았다. 도리어 문명자 씨는 이 기사 때문에 주미대사관 파티에 참여했다가 '인민재판'을 당하는 곤욕을 치러야 했다. 그녀는 결국 <조선일보>에 보낸 그 기사가 보도가 되기는커녕 거꾸로 권력측에 제공되어 자신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것을 눈치채게 되었다.

따라서 문명자 씨가 이 글의 말미에서 했던 다음과 같은 발언은 매우 시사적이다.

"박정희 시대와 그 연장인 5∼6공 시대에 박정희의 좌익 전력에 대해 침묵하면서 그 밑에서 영화를 누렸던 자들, 그리고 현재까지도 박정희의 망령을 미화하고 있는 자들은 색깔론을 시비할 자격이 없습니다."

광주학살 직후 신군부 세력의 주도로 일어났던 아람회(재야인사), 오송회(교사), 한울회(기독교) 사건은 5공시대의 대표적인 공안조작사건이다. 이인제 고문과 이회창 총재가 당시 이 사건 관련자들에게 유죄를 선고했던 대전지법과 대법원의 판사였다는 사실은 그래서 예사롭지 않게 다가온다.

덧붙이는 글 | * 이 내용은 4월 5일 CBS 라디오 <변상욱의 시사터치>에서 방송된 것으로 CBS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다시 들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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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환 기자는 월간 말 취재차장으로 일하고 있으며 언론, 지역, 에너지, 식량 문제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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