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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성에 오르자 북문을 제외한 삼면에 문이 나 있었던 해미읍성은 낙안읍성이나 고창읍성과 같이 행정 기능을 주로 담당하던 성이다. ⓒ 권기봉
가끔은 친구들과 음악을 크게 꿍꽝거리며 떠나는 것보다 아무 몰래 훌쩍 어디론가 떠날 때 그 묘미가 더하는 여행이 있다. 삽교호 지나 안면도를 향해 가는 길에 걸쳐 있는 해미가 그렇고 특히 해미를 둘러싸고 있는 해미읍성을 찾을 때면 그 고독의 맛이 더하다.

일단 혼자 가기에도 부담이 없을 만큼 사통팔달 교통이 좋아 찾아가기도 좋고 또 여장을 풀 수 있는 시설도 웬만큼 잘 되어 있어 혼자만의 여행을 떠날 때면 종종 찾는 곳이 바로 해미, 해미읍성이다.

그런데 그저 평범한 답사객이 혼란한 마음을 진정시킬 요량으로 찾는 해미이지만, 내심 알고 보면 손쉽게 찾을 만큼 호락호락한 곳은 아닌 듯 하다.

해미는 한반도에서 중국 쪽으로 돌출된 태안반도에 위치하고 있어 자연스럽게 군사적인 의미에 있어서도 중요한 지위를 누려왔다. 조선 건국 초기 태종 14년인 1414년에 충청병마절도사의 병영이 이곳으로 이전된 이후 성종 22년인 1491년에 이르러 성벽이 완성되었고, 효종 2년인 1651년에 병영을 청주로 옮긴 것으로 보아 근 60년간 해미는 서해안에 위치한 중요 군사기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해미읍성이 실제로 적과 직접 대치한 상황에서 전투를 주요 목적으로 하던 성은 아니었던 듯하다.

우리나라의 경우 성은 보통 도읍인 서울이나 경주 등을 의미하는 '도성'과 함께 주요 군사 방어 요충인 산정에 많이 세워지게 되는 '산성'들로 나누어지는데, 이곳 해미읍성은 다른 성들과는 달리 특이하게도 사방이 훤히 뚫려 있는 평야 한가운데 만들어진 '평지성'이다.

이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중앙의 행정력이 전국 곳곳에 미침에 따라 평지를 중심으로 만들어지는 '읍성'의 유형으로, 대개 군사적인 목적을 주요 기능으로 한다기보다는 주요 행정 기구들이 있음으로 해서 그 지위를 나타내주고 기능을 뒷받침하는 기능과 일반인들의 주거를 위한 성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해미가 갖는 가장 큰 특징 하나는 지리적 여건상 중국과의 교역이 상당히 발달했었다는 점일 것이다. 이는 비단 조선시대뿐만 아니라 백제와 고구려, 신라가 각축을 벌이던 시기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이야기로, 해미가 속해 있는 내포땅은 충청도 지역에서 선진문물이 다른 곳들보다 상대적으로 빠른 속도로 전파되던 곳으로 백제의 도읍이었던 웅진(공주)이나 사비(부여)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백제의 절터들을 보면 어느 정도 그 의미를 유추해볼 수 있으리라.

특히 18세기 들어 중국이 서양 여러 나라에 의해 급속히 개방되어 가면서 해미 역시 그 영향을 받게 된다. 특히 당시 조선이나 중국에 들어오는 서양 문물이란 것들이 대부분 천주교를 매개로 거의 동시에 들어오게 되는데, 이곳 해미 땅에서는 이를 조선의 그 어느 곳보다 먼저 받아들이게 된다.

지나침이 크면 화가 되는 법일까. 해미읍성 서문 밖에 있는 사형장이나 감옥에서는 1790년경부터 1870년대까지 약 1백년 동안 박취득과 이보현,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인 김진후 등 무려 3천여 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국사범으로 스러져갔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신자들을 잡아들여 열 명에서 열 다섯 명씩 포승줄로 묶어 큰 구덩이 세 개를 파고 생매장을 시켰는데 심지어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변심할 것을 걱정한 어떤 이들은 남보다 먼저 자진해서 구덩이 속으로 뛰어들기도 했다고 한다.

이후 유골들은 응암면 상흥리에 안치되었다가 1975년 이규남 신부가 해미읍성에서 1km 정도 떨어진 곳에 순교 기념탑을 세우면서 그리로 옮겨갔다고 한다.

실제로 해미읍성을 찾아가 홍예의 담쟁이덩굴이 멋스러운 진남루에서부터 발걸음을 떼면 그 분위기도 분위기려니와 왠지 모르게 불어오는 찬 바람에 비극의 역사가 온 몸에 느껴지는 듯하다.

해미읍성은 성벽을 따라 걸으면 한 시간 정도가 걸리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둘레 약 2km의 성으로, 일단 성 안으로 들어가면 저 멀리 보이는 큰 나무 앞으로 가보자. 해미영의 감옥 자리에 서 있는 이 나무는 6백년이나 먹었다고 전해지는 '호야 나무'로, 붙들려온 천주교 신자들을 매달아 놓고 고문하는 데 쓰였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특히 김대건 신부가 순교한 나무로 유명하다. 그런 과거가 있기 때문일까. 마치 그 말을 입증하려는 듯 가지에는 신도들을 처형하기 위해 줄을 매달아 생긴 듯한 자국이 있는 것 같이 느껴진다.

한편 1974년에 복원한 서문은 성 안에서 처형된 순교자들이 끌려나가던 문이다. 서쪽에서 온 사교이기에 서쪽으로 내다버렸던 것인지 그 이유야 알 수 없지만, 신도들의 소지품을 수거해 문 난간에 풀어놓고 지나가는 이들로 하여금 밟도록 했다고 한다.

이처럼 당시의 천주교라는 것이 조선의 문호를 개방하고자 하는 일단의 정치적 목적과 아무런 상관 관계가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지만, 큰 틀에서 보자면 유교라는 전통 질서와 기독교라는 새로운 문화의 충돌은 당시 기존 질서가 승리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등, 당시에는 다양한 사회적 질서와 사상들이 교차하고 있었다.

해미읍성을 답사함에 있어 김밥이라도 싸들고 가 잔디밭에 앉아 간만에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것도 틀린 일은 아닐 테지만 그것보다는 새로운 사상의 유입과 그로 인해 현재 나타난 변화들을 살펴보는 것이 더 뜻 있는 일이 아닐까.

(추천 사이트)
http://www.livetourcast.com/travel_info/chungnam/seosan
/heami/heami.html

http://www.autoever.com/intershoproot/eTS/Store/en/html
/car&life/travel/ae_travel_culture_haemi.html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월간 'PC사랑'과 www.SNUnow.com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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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기억 저편에 존재하는 근현대 문화유산을 찾아 발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저서로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알마, 2008), <다시, 서울을 걷다>(알마, 2012), <권기봉의 도시산책>(알마, 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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