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필자생각: <다시 쓰는 남행록>에 보내주신 독자 여러분의 뜨거운 관심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기사를 쓰면서 계속 새로운 제보와 사연이 발굴되는 바람에 현재 취재·조사와 기사 작성을 병행하고 있는 중입니다. 능력이 닿는 한 일주일에 2∼3회 꼴로 계속 연재할 계획인데, 적으면 30회, 많으면 50회까지 갈 것 같습니다. 제보나 의견 있으신 분은 lowsaejae@dreamwiz.com으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우종창 <월간조선> 기자가 영화 <애기섬>에 대한 색깔공세를 가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제시한 근거가 정작 고등학교 국사교과서 수준의 역사인식에 불과했음은 앞에서 지적한 바 있다.

실제로 우종창 기자는 <월간조선> 10월호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에 '공산주의자들이 남한의 5·10총선거를 교란시키기 위해 일으킨 무장폭동'이라고 규정한 제주4·3사건을 이 영화에서는 4·3항쟁이라는 용어를 사용, 폭동을 의거 수준으로 미화시켰으며 여순 14연대 반란사건도 그냥 여순사건이라 호칭했다.

그러나, <월간조선>과 우 기자는 고등학교 국사교과서 수준의 고정된 역사인식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며 시비를 걸기 이전에 다음과 같은 '한탄'과 '분노'의 목소리에 먼저 귀를 기울여야 했다. 다음은 <시사저널> 10월 25일자에 실린 기사 중 '한탄'의 소리다.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이영일 소장은 "고등학교 국정 교과서에도 '여수순천10·19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사회단체와 연구학자들이 50년만에 어렵게 바로세운 '여순사건'을 <월간조선>이 다시 '여순반란사건'으로 만들어 놓았다. <월간조선>은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려 하고 있다"고 한탄했다.

다음은 '분노'의 소리다. 이것은 <월간조선>과 우 기자가 정말이지 가슴에 손을 얹고 들어야 할 고통의 소리이기도 하다.

지역사회의 민감한 정서 때문에 사건 발생 53년이 지난 올해 겨우 출범한 여순사건유족회 여수지역 회장 김상태 씨는 "유족의 아픔을 이해한다면 더 이상 색깔론으로 매도해서는 안 된다"라며 분노했다.

그런데 <시사저널>이 기사 앞에 붙인 <10·19 여순 '영화불발' 사건>이라는 제목이 예사롭지 않게 읽혀진다. 53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의 강이 흐르면서 유족들의 마음에 샘물처럼 솟구치던 상처도 어느덧 조금씩 말라가던 와중에, 우리는 그 말라붙은 상처에 사상검증의 쇠꼬챙이를 쑤셔대는 '또 하나의 여순사건'을 목도하게 된 것이다.

▲ <시사저널> 10월 25일자 기사에 따르면, 여수지역 재향군인회 간부가 "<월간조선> 기사는 기자가 지역의 정황을 알아보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자기 의견을 쓴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 것으로 되어 있다.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 '창작의 자유'에 대한 사상검증이라는 냉전시대의 구태도 가당치 않거니와, <월간조선>이 국사교과서에 실린 역사적 사건에 대한 개념 규정까지 버젓하게 왜곡해서 소개하는 데에 이르러서는 이성적 인내의 한계를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우종창 기자는 <월간조선> 10월호 기사에서, 마치 국사교과서에는 '여순 14연대 반란사건'이라고 명백하게 규정되어 있는데 이것을 영화 <애기섬>이 감히 '여순사건'이라고 주장한 것처럼 강변했다. 그러나 그것은 '객관적 주장'이 아니다.

▲ <월간조선>의 설명과는 달리 고등학교 국사교과서 <국사(하)>에는 여순사건이 '여수·순천10·19사건'이라는 중립적 용어로 명명되어 있다.
정작 국사교과서는 한국현대사의 이 비극적 사건을 명명하면서, 중립적 입장을 취했다. 물론 이 사건에 대해 '국가를 전복하려는 의도가 있는 반란'이라고 '설명'(說明)했지만, 사건의 명칭에 대해서는 '여수·순천 10·19사건'이라고 '명명'(命名)한 것이다.

실제로 국정 고등학교 국사교과서인 <국사(하)> 197쪽에는 분명히 '여수·순천 10·19사건'이라는 '중립적 용어'가 등장한다. 국사교과서의 '건국 초기의 국내 정세' 항목 어디에도, <월간조선>이 강조한 '14연대'라는 용어는 나오지 않는다. 197쪽에 실린 국내 정세 약도에도 '여수·순천 10·19사건'이라고 되어 있지 '여순 14연대 반란사건'이라고 되어 있지 않다.

(처음 이 글을 읽는 독자를 위해 한마디 드린다. 나는 지금 여순사건 중 발생한 '반란군의 봉기와 살육'을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봉기를 일으킨 뒤 일부 친일파, 경찰관, 극우단체 간부 등을 죽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 사건의 배경에는 친일파가 여전히 득세하던 당시 경찰계와 이승만의 친일파에 대한 옹호에 대한 민중의 분노 등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진압 과정에서 수많은 민간인이 군경에 의해 억울하게 죽어갔지만 반공국가 속에서 반세기 동안 아무런 말도 못한 채 가슴앓이를 해왔던 것도 사실이다. 나는 여순사건을 말할 때 이 모든 것이 함께 언급돼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까지 편향된 정보만을 너무나 일방적으로 제공받았다. 따라서 이 글을 처음 읽는 독자는 앞의 글부터 차분하게 읽어보실 것을 권한다.)

이왕 국사교과서를 펼친 김에 <월간조선> 식구들과 우종창 기자의 역사인식 확장을 위해 조금만 더 읽어보도록 하자. 여순사건에 대한 설명이 끝난 뒤 국사교과서에는 다음과 같은 부분이 나온다.

이러한 어려움을 딛고서 새로 출범하게 된 대한민국은 민주국가로서의 발전을 이룩하기 위한 기틀을 다지는 일에 온 힘을 쏟았다. 먼저 민족정기를 바로잡기 위해서 제헌국회에서는 친일파를 처벌하기 위한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제정하였다. …(중립)… 그러나 반공정책을 우선하였던 이승만 정부의 소극적인 태도로 인하여 친일파 처단에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여기서 <월간조선>과 조선일보에 한번 묻지 않을 수 없다. 당신들은 국사교과서에서 친일파 청산을 좌절시킨 당사자로 설명된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이니 '이승만과 나라 세우기'니 하며 요란을 떨면서 찬양했다. 내가 국사교과서의 이 대목을 근거로 "당신들 혹시 친일파 아냐?"하고 사상검증 한번 해볼까?

농담 한번 해봤다. 그런데 사실 이건 그냥 농담이 아니다. 나는 이 작업이 끝나는 대로 '조선일보 친일문제'에 대한 본격적인 다큐멘터리 기사를 쓸 생각이다. 조선일보 식구들의 열독을 권하는 바이다.

<월간조선>이 '전가의 보도'로 삼고 있는 국사교과서에 대한 또 하나의 이야기를 들려줄 차례가 왔다.

<월간조선> 식구들과 우종창 기자가 알면 경악할 일이겠지만, 사실 국사교과서를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 전향적으로 개편하려던 시도를 '색깔논쟁'을 동원해 좌절시킨 장본인이 있다. 충분히 예상했겠지만, 바로 조선일보다. 결국 조선일보의 새끼매체인 <월간조선>에겐 애시당초 국사교과서 타령을 할 자격이 없었다는 말이다.

문민정부 시절 조선일보가 불을 지르면서 '더러운 논쟁'에 휘말려 들었던 이른바 '국사교과서 준거안 파동'의 전말은 이렇다.

1993년 9월 문민정부 교육부는 제6차 교육과정 개편에 따라 '국사교육 내용전개 준거안 연구위원회'(위원장 이존희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를 구성하고 9명의 연구위원을 임명했다. 이들은 7개월에 걸친 공동연구를 통해 국사교과서 개편작업을 추진했으며, 마침내 1994년 3월 18일 심포지엄을 열고 연구위원 전원합의로 확정한 '준거안'을 발표했다.

특히 현대사 부분 준거안 중에서도 새롭게 보강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시선을 끌었다.

●일제가 자행한 민족말살 정책, 일본어 사용 강제, 신사참배 강요, 일본식 성명으로의 개조, 황국신민화 정책 등을 설명하되, 이 과정에서 노골적인 친일세력이 형성되었음을 설명한다.
●일부 민족지도자들이 일제 말 일제의 황국신민화 운동과 침략전쟁에 협력하였음을 간략히 기술한다.
●광복후 친일파 청산, 토지개혁, 통일국가 건설이 민족의 과제였음을 이해하게 한다.
●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좌우합작 운동이 어떻게 전개됐는가를 기술하고, 9월 총파업과 10월항쟁에 대해 간략히 언급한다.
●반민법 제정, 농지개혁 등 건국 초기의 활동과 제주4·3항쟁, 여순사건 등을 이해하게 한다.


이 준거안은 당시 역사학계의 학문적 업적과 수준을 객관적으로 반영한 것이었다. 우리는 마지막 항목에서 제주4·3항쟁이나 여순사건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반민법 제정과 반민특위 구성의 전말과 남한의 농지개혁과 북한의 토지개혁 추진 등에 대한 객관적 고찰 속에서 종합적으로 사유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특히 친일파나 그 후손들이 한국사회의 '메인 스트림'을 형성한 채 득세하고 있는 상황에서 친일파 문제가 정면으로 제기됐다는 것은 매우 시사적인 대목이었다.

사실 친일파 문제는 그 동안 국사교과서에서 철저하게 '성역과 금기'로 여겨지면서 다뤄지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 국사교과서 개편시안 작업에 나선 역사학자들은 '반공투사'라는 가면을 쓴 채 '친일매국'의 원죄를 꼭꼭 감추었던 무리들을 더 이상 눈감아줄 수 없었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 조선일보를 비롯한 수구언론의 색깔공세로 '사면초가' 신세가 된 국사교과서 개편시안. <국사교과서 민족사관 중심 개편-일제잔재 청산…독립운동사 대폭 보강>이라고 긍정적으로 보도한 문화일보 기사가 조선일보의 색깔공세 보도에 포위 당했다.
실제로 이러한 개편시안에 대한 여론은 처음에는 매우 호의적이었다. 이는 중앙일간지 중에 유일하게 심포지엄에 직접 참석한 문화일보 기자의 보도에서도 확인된다. 그가 쓴 기사의 제목은 <국사교과서 민족사관 중심 개편-일제잔재 청산·독립운동사 대폭 보강>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전혀 엉뚱한 곳에서 발생했다. 조선일보가 특유의 '마녀사냥' 전술을 동원해 시비를 걸기 시작한 것이다. 1994년 3월 20자 조선일보 기사는 이렇게 시작된다.

"해방 직후 4·3 제주도 봉기, 여순반군투쟁, 영남봉기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투쟁 속에서 민중은 현명한 지혜를 발동하여 도시대중시위, 농촌봉기, 산악유격전, 파업농성 등 다양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86년 8월 18일자 서울대 자민투의 기관지 <해방선언>에 실린 기사 내용이다. 그 비슷한 시기에 서울대 곳곳에서는 여순반란과 4·3사건을 '반제반봉건민중항쟁', 6·25한국전쟁을 '민족해방전쟁'이라고 주장하는 대자보가 나붙었다.

조선일보의 '눈부신 활약'을 필두로 한 수구언론의 여론조성 속에서 준거안은 멱살잡이를 당하기 시작했다. 특히 조선일보는 준거안 전체의 맥락을 읽기보다는 '항쟁'이냐 '사건'이냐는 등 용어 문제를 집중적으로 물고 늘어졌다. 동시에 <주사파 등 80년대부터 새 작업>, <북한 선전자료 복사판 우려> 등의 기사를 통한 전형적인 '색깔논쟁'을 유발해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었다.

세계일보(1994. 3. 25) 등 일부 언론이 "역사에서의 '고정관념'과 '이념편향'을 모두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학자가 만든 시안을 매카시즘적으로 매도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우려를 표명했지만 역부족이었다.

▲ 1994년 당시의 국사교과서 파동을 직접 지켜본 정재정 교수는 일부 언론의 무차별적인 여론재판식 공격이 역사교육 중립성 확보에 '멍에'가 됐다고 증언했다.
이와 관련해 당시 연구위원 중 한 명이었던 정재정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는 1998년 발간한 저서 <한국의 논리-전환기의 역사교육과 일본인식>에서 다음과 같이 토로했다.

이번의 근현대사 교육 논쟁에서는 인신공격성의 비난과 사상공세적인 위협이 난무하였다. 학문과 교육을 논한다는 자세가 크게 흐트러졌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교과서 문제에 정치와 여론의 입김이 너무 직설적으로 파고들었다. 이 점은 앞으로 역사교육의 독자성과 중립성을 확보해 나가는 데 있어서 적지 않은 멍에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정재정 교수는 보수적인 성향의 학자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런 그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당시 조선일보를 비롯한 수구언론의 '마녀사냥'은 심각해 보였던 모양이다. 그는 다음과 같은 증언도 했는데, '무차별적 공격을 감행한 일부 언론'이 과연 어떤 신문을 가리키는 것인지 충분히 알 수 있다.

우선 따져봐야 할 것은 연구자의 의도와 견해를 충분히 들어보지도 않고 여론의 힘을 빌어 무차별적 공격을 감행하는 일부 언론과 학자의 보도·토론 행태의 적절성 여부이다. 준거안은 학계 내외의 광범한 의견을 수렴하기로 했으므로 이에 대해 누구나 의견을 개진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대방의 의견도 존중하는 태도 위에서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설명을 통하여 차분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다면 조선일보가 '상대방의 의견도 존중하면서 합리적이고 논리적이고 차분하게' 의견을 개진하지 않고 도리어 '역사교육 중립성 확보에 멍에가 되는'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여기에는 엄청난 비밀이 있거니와, 그 내막에 대한 소개는 다음 순서로 미루기로 한다.


※ <다시 쓰는 남행록>과 관련한 몇 가지 소식 알려드립니다.

지난 토요일(11월 3일) 저녁 CBS <시사자키-오늘과 내일>에 출연해서 약 1시간 동안 오마이뉴스에 연재하고 있는 <다시 쓰는 남행록>에 대해 소개했습니다.

오늘(11월 5일) 오후 2시 여의도공원 광장에서 '민간인학살 희생자 전국합동위령제 및 전국유족회 재창립대회'가 열립니다. 행사내용은 길놀이, 진혼굿(한대수), 추모시, 추모춤(강혜숙 청주대 교수), 분향과 헌화, 공연(우리나라), 연대사(한상렬, 오종렬, 한상범, 정광훈) 등으로 구성돼 있고, 행사가 끝나면 곧바로 특별법 제정촉구 농성천막 설치에 나섭니다. 지난 반세기 동안 침묵을 강요당했던 유족들이 대거 참여합니다. 많은 분들의 동참을 바랍니다.


태그: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5,5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정지환 기자는 월간 말 취재차장으로 일하고 있으며 언론, 지역, 에너지, 식량 문제에 관심이 많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