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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의 <한완상 죽이기>가 또 다시 시작되고 있다. 신임 부총리 한완상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의 발언을 시비 삼아 포문을 열고, 역사를 거꾸로 돌리려는 반동적 수구논리를 매우 졸렬하게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일보의 입장에서는 안됐지만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 시절 통일부총리였던 그를 집중 공격하여 실각시키는 데 성공했던 전례가 이번에도 통할 수 있을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때와는 남북간의 상황이 매우 달라짐으로써, 조선일보의 논리가 먹혀 들어갈 수 있는 자리도 변변치 않을 뿐만 아니라 그 논리 또한 언제나 그랬지만 대단히 저열하기 때문이다.

조선일보의 한완상 교육인적자원부 부총리에 대한 공격의 제1탄은 1월 30일 사설, <눈뜨면 바뀌는 교육 총수>였다. 이 사설에서 조선일보는 백년대계의 교육 책임자를 왜 이렇게 자주 바꾸냐고 질타하면서,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과는 달리 어찌해서 교육부 장관을 부총리로 격상하여 작은 정부론의 약속을 어겼느냐고 논박하고 있다.

조선일보도 인식하고 있으며 부정하지 못하듯이 교육이 그렇게 중요한 과제라면 당연히 교육부의 비중은 나라의 백년대계를 위해 진작부터 부총리급의 위상을 가졌어야 했다.

교육부의 총책임자를 원칙 없이 자주 바꾸는 것은 물론 잘못된 일이다. 이 점에 대해서만큼은 장기적 안목에서 교육문제의 비전을 명확히 제시해 오지 못한 정부의 공손한 해명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교육 인적자원부>의 구성은 현정부의 교육관에 중대한 경계선을 긋는 작업이다. 기존의 교육정책에 일대 혁신이 일어나고, 새로운 교육 정책의 틀과 원칙이 마련되는 계기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일보의 "원칙 없는 교체와 이로 인한 교육혼란"이라는 비난은 오로지 비난을 위한 억지일 뿐이다. 교육 인적자원부의 구성과 한완상 장관의 취임은 바로 이 원칙 없는 교육정책과 교육현장의 혼란을 막고 21세기의 민족사를 위한 교육의 기초적 입지를 바로세우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한완상 장관의 일성(一聲)이 "공익적 인간, 사회적 약자를 품어내는 인간"을 지향하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오늘날 한국사회의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이기적 충돌을 빚어내는 출세 지향적이고 개인주의적인 현실을 극복하는 새로운 비전을 가지고 헌신할 수 있는 인재를 길러내려는 의지의 표명이라는 점에서 교육인적자원부의 시대적 취지와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따라서 이것은 장관의 잦은 교체라는 차원에서 볼 일이 아니라,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는 작업으로 인식해야 한다. 새로운 과제에는 새로운 인물이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것은 마땅하다. 조선일보가 지적하고 있는 "교육현장의 붕괴"나 "행정당국의 무원칙과 횡포"를 극복하기 위해서도 기존의 방식과는 결별해야 한다.

잦은 장관의 교체가 정책의 일관성을 해친다고 하지만, 바로 그 일관성이 조선일보가 비판하고 있는 교육현장의 문제를 낳고 있는 요인이라는 점에서도 이 이른바 "일관성"이 구태의연하게 지속시켜온 기존질서를 타파할 개혁적 계기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한완상 장관의 등장이 "장관의 잦은 교체"라는 논리로 비판받을 이유는 없다.

그러나 조선일보가 한완상 부총리의 등장에 대해서 정작 시비를 걸고 나선 까닭은 여기에 있지 않다. 한완상 장관이 싫은 것이다. 조선일보는 이렇게 사설을 맺고 있다.

"한완상 새 교육총수가 <지나친 친북성향 인물, 교육부 총리 안 된다>며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선 <바른 통일과 튼튼한 안보를 생각하는 국회의원 모임> 등 보수적 시각을 지닌 많은 국민들의 우려가 기우이기를 바랄 뿐이다."

<바른 통일과 튼튼한 안보를 생각하는 국회의원 모임>이라는 조직이 어떤 정치인들의 모임인지도 모르겠거니와, 이들의 반대표명이 어찌 해서 "많은 국민"들의 의사를 대변하고 있는지 의아하다.

한완상 신임 부총리는 어떤 사람인가? 전쟁을 막고 민족의 평화를 위해서는 무력을 기초로 한 냉전체제를 해체하는 것이 급선무이며, 이를 뒷받침할 인식의 변화가 중요하다고 믿는 지식인이자 독실한 신앙인이다. 그의 기본적인 가치관은 무력사용을 반대하는 평화를 지향하는 것이며, 민족의 공영의 길을 모색하고 남과 북의 민족적 동질성을 회복하는 일이다. 이러한 인물이 통일부총리를 역임하고, 교육정책의 총수가 된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렇지 않아도 남과 북이 서로 아웅다웅 싸우지 말고 이제부터는 친하게 지내자고 하는 판에, 그가 북을 적대시하고 사사건건 문제를 삼는다면 민족교육의 장래에 얼마나 큰 장애가 생기겠는가? 명색이 교육이라는 것이 싸움박질하는 것을 가르쳐서야 되겠는가? 조선일보도 한국의 정치가 싸움박질로 엉켜 있다고 탄식하지 않는가? 민족의 장래를 도모할 교육이란, 어떻게든 평화를 추구하고 화해하는 방법을 일깨우고 약자들의 사연과 삶을 보듬어 나가는 인정 많고 따뜻한 존재, 시대적 사명에 비전이 서 있는 그런 능력 있는 존재를 길러내는 일이 아닌가?

조선일보는 북한에 대한 적대감에 사로잡혀서 민족분열을 조장하고 민족적 적대정책을 지속시키다가 여하한 일이 발생했을 때에는 무력을 사용하는 일에 주저함이 없는, 그런 가치관을 가진 인물이 교육의 지표를 이끌기를 바라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무력의 가치를 숭상하는 강경 극우 군사주의자가 교육부 장관에 제격일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인물은 교육현장에서 구시대의 파쇼적 억압을 강화할 것이며, 일방적 명령주의를 위주로 하는 관료주의를 추구하고 창의적 발상을 위험한 것으로 간주하는 정책을 펴게 될 것이다.

조선일보는 이러한 제1탄의 공세로서는 부족하거나, 아니면 자신들이 기껏 밀어낸 인물이 고위직으로 재등장한 것에 대하여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공직인사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도 갖추지 않은 채 <"한완상씨"의 북한 퍼주기 비판>이라는 사설을 2월 1일 내걸었다.

조선일보는 <북한 퍼주기 주장과 속도 조절론은 한반도 평화를 원치 않은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것>이라는 요지의 발언이 "사실을 왜곡했다"면서 이를 중심으로 그를 비판하고 있다. 조선일보의 논지를 살펴보자.

"현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비판은 대북지원의 규모 그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북한의 수용태세와 상관없이 우리 쪽이 너무 일방적으로 양보하고 너무 저자세로 이끌려 가고 있는 접근 방식 때문이다."

정말 그런가? 조선일보는 대북지원의 규모가 커지면 우리 경제에 대한 부담으로 작용한다면서 난리를 친다. "우리도 힘든 판국에 누굴 퍼주는가?"라는 것이 조선일보의 대북지원 반대의 주된 논리이다. 이 논리는 따라서 현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조선일보의 비판은 "대북지원의 규모 그 자체에 있다기보다는"이라는 말을 스스로 뒤집고 있는 셈이다. 조선일보는 제발 이 말처럼 그 규모를 가지고 시비를 거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그리고 "북한의 수용태세와는 상관없이 우리 쪽이 너무 일방적으로 양보하고 너무 저자세로 이끌려 가고 있다"는 것은 도대체 어떤 근거로 내세우고 있는 주장인가? 대화와 협상은 언제나 서로의 입장 차이를 확인하고 그것이 일으키게 될 부정적 파장을 최소화하면서 상호접근을 시도하게 되어 있는 법이다. 북한에 대한 경제적 지원은 향후 민족경제의 기초를 닦아내기 위한 매우 중대한 기본투자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기반 위에서 우리는 군축을 바탕으로 하는 평화체제를 지향해나갈 수 있는 힘을 기르게 된다.

우리는 지금 그러한 과정을 매우 조심스럽게 밟아나가고 있다. 지난 해 6.15 남북 정상회담이 선언한 민족 내부의 화해와 협력을 통한 실질적인 작업이 일부 사항에서 서로의 생각이 차이가 있어 조절기를 거치고 있을 뿐, 각 분야에서 특별한 갈등과 잡음 없이 진행되고 있는 것은 실로 다행스러운 일이며, 이러한 일은 좀더 전면적이고 신속하게 추진되어야 하는 형편에 있다.

그래야만이 민족사의 발전을 정체시키고 있는 장애를 제거하고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민족 내부의 적대관계를 풀고 민족 전체가 웅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정부가 너무 일방적으로 양보하고 너무 저자세로 임했다는 근거와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이것은 명백한 사실 왜곡이다.

조선일보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덮어놓고 무엇을 준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도 아니며, 경우에 따라서 무턱대고 주는 것은 상대방을 교만하게 만들고 비타협적으로 만들 소지가 더 많다." 조선일보가 한완상 부총리를 비난하면서 공연히 없는 말을 만들어서 하는 그의 저의가 무엇인지 묻고 싶다고 했는데, 정말이지 우리는 바로 이 말을 고스란히 조선일보에게 되돌려 주고 싶다. 남쪽 정부와 국민 가운데 어느 누구도 덮어놓고 무엇을 준다거나 무턱대고 주는 식의 생각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공연히 없는 말과 발상을 누군가에게 무턱대고 덮어 씌우지 말라.

만일 까다로운 조건을 달지 않고 대북지원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모두 "덮어놓고"도 아니요, "무턱대고"도 아닌, 민족의 평화와 발전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교육이 장기적 안목을 가지고 임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통일문제도 깊고 넓고 길게 보고 해야 하는 작업이다. 조선일보처럼 대결주의적 단견과 그 속에 꽉 응어리진 적대감, 그리고 병통이 된 냉전의식으로는 한완상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의 생각과 경륜, 그리고 민족과 국가에 대한 헌신을 이해하기는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조선일보는 또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한 부총리는 또 <지금 경제가 어려운 것은 대우 같은 대기업이 망했기 때문이지 북한에 퍼줘서 망했느냐>고 했다. 우리가 알기로는 북한에 대한 무비판적이고 비효율적인 지원을 거론한 사람 누구도 우리 경제가 북한 때문에 어렵게 됐다고 말한 것은 듣지 못했다. 공연히 없는 말은 만들어서 하는 그의 저의가 무엇인지 묻고 싶다." 조선일보는 분명히 금강산 문제 등을 거론하면서 북한에 퍼주는 바람에 우리 경제가 더욱 어렵게 되고 있다고 되풀이 강조한 바 있다. 이것은 지난 신문철을 들추면 당장에 확인되는 일이다. 자기가 한 말도 이런 식으로 하지 않았다고 하는 판국이니 이런 신문을 우리가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그 저의가 무엇일까?

조선일보는 마지막 부분에서 첫번째 사설과 동일한 맥락의 메시지를 또 한번 밝히고 있다. "한 부총리의 발언이 새삼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그가 단순한 대북 유화론자가 아니라 우리의 2세교육과 한국의 인적자원을 다루고 책임지는 자리에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한 부총리는 작년 10월 노동당 창건 기념일 행사 참관단장으로 출발하면서 <그리운 형제의 명절에 사랑과 축하의 마음을 가득 전한다>고 했다. 과연 노동당 창건 기념일이 겨레의 명절인지도 묻고 싶다."

아니, 언제 한완상 부총리가 노동당 창건 기념일을 <겨레의 명절>이라고 표현했는가? 공연히 없는 말을 만들어 내서 하는 그 저의가 무엇인지 묻고 싶다. 북한의 국가가 세워진 기초인 노동당 창건을 북한이 국가적 명절로 기념하고 남쪽 인사들을 초청했고 이를 받아들인 이상, 축하의 인사는 마땅하다. 그리고 이들이 명절로 인식하고 있는 행사에 대하여 덕담을 하는 것은 참관 단장의 당연한 자세이며, 이것은 서로의 체제를 인정하고 공존하기로 한 남북 대화의 원칙에도 어긋나지 않는다. 그렇지 않고 참관단장이 노동당 창당 기념을 시비 걸기 위해 다녀오고, 그로써 남북 관계의 긴장완화를 역전시켜 대결상황을 격발시켰으면 칭찬할 셈이었는가?

이제 조선일보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논리를 가지고 남북화해와 평화를 추진하려는 시대적 사명을 더 이상 훼손하지 말라. 한완상 부총리의 등장을 경계하면서 냉전체제의 반동적 수호를 꾀할 수 있다고 믿지 말라. 조선일보가 이렇게 저열하고 치졸한 방식으로 사태를 오도하면 할수록 조선일보는 장래에 설 자리가 없게 될 것이다.

성서에 이런 요지의 말씀이 있다. "(하늘의 진실, 그 육성을 억압하려고 들면) 돌들이 소리 치리라." 일반대중들의 역사관을 깔보고, 자기들의 논리로 함부로 좌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 오도된 역사관의 독선과 오만이 조선일보의 미래를 붕괴시키는 함정이 되고 말 것이다. 전도서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을 인용하면서 조선일보의 맹성을 촉구하는 바이다.

"구덩이를 파는 자는 거기에 빠질 수가 있고, 담을 허무는 자는 뱀에게 물릴 수가 있다. 돌을 떠내는 자는 돌에 다칠 수가 있고, 나무를 패는 자는 나무에 다칠 수가 있다.(전도서 10장 8절-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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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웅 기자는 경희대 교수를 역임, 현재 조선학, 생태문명, 정치윤리, 세계문명사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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