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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신-광주에 투입된'어느 특전 병사'를 만나러 떠난다

80년 오월 광주는 고립된 섬이었다. 그 고립된 섬은 많은 사람들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20년이 흘렀다. 그러나 광주를 향한 우리들의 마음은 여전히 무겁다.

나는 오늘 20년전 그날 광주에 투입됐던 '어느 특전병사'를 만나러 강원도 횡성으로 떠난다.

이경남(44) 목사. 79년 그는 신학대학 졸업을 앞두고 군대로 도피의 길을 떠났다. 그러나 불행히도 도피처로 삼은 군대는 24세의 청년을 참혹한 현장으로 몰아넣었다.

그 참혹한 현장에서의 기록이 처음 공개된 것은 99년 당대비평 겨울호에서 였다. 특전병사로 투입된 군인의 생생한 기록은 오월 광주를 더 아프게 만들었다.

그리고 올해 이경남 목사는 당대비평에 실렸던 글을 수정,보완해 제9회 전태일 문학상 생활·기록문 부분에서 우수상을 수상했다. [5월의 회고- 어느 특전 병사의 기록]은 그렇게 세상에 나왔다.

4월 29일 전태일 문학상 시상식장에서 그가 "이번 상은 그 어떤 상보다 개인적으로 의미가 크다"며 환하게 웃었던 기억이 난다.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일을 앞두고 그는 요즘 바쁘다. 16일에도 광주에 다녀왔고 18일에는 정운영의 100분 토론 패널로 예정돼 있어 다시 광주로 가야 한다.

17일 하루 밖에 시간이 없는 그를 만나러 강원도 횡성에 위치한 개전감리교회로 떠났다.


제2신 - " 늘 광주에 대해 뭔가를 쓰고 싶었습니다"

그는 그날의 기억으로 도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될 수 있으면 멀리 떠나고 싶었으리라. 그러나 그는 멀어질 수 없었다.
서울에서 3시간이 좀 넘게 걸렸다. 원주를 벗어나 횡성에서 10여분 정도 들어선 길 옆으로 그가 담임 목사로 재직중인 개전 감리교회를 발견할 수 있었다.

마당이 넓직했다. 파란 잔디 위에서는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아이들이 뛰어 놀고 있었다.
그는 내일 광주에서 생방송으로 진행될 정운영 100분 토론을 위해 인터넷으로 자료를 검색하느라 분주했다.

"준비가 하나도 안됐어요. 어제 광주를 다녀오는 바람에... 그래서 지금 인터넷을 통해 정식 없이 자료 찾고 있습니다"
그는 어제도 광주에 다녀왔다. 한국일보에서 광주 망월동에서 '사진 한 장' 찍자는 부탁을 해와 새벽6시에 집에서 나갔다가 밤 12시에 들어왔다.

이경남 목사는 10여분 동안 인터넷을 검색하느라 정신이 없어 차를 가져온 부인 윤남혜씨(38)와 먼저 이야기를 시작했다.

- 이곳 횡성에 오신지 얼마나 되셨지요

"10년 정도 됐어요. 특별이 연고가 있어서는 아니구요. 목사님이 워낙 시골을 좋아하셔서"

윤씨는 남편을 목사님이라고 불렀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도시로 많이 빠져나가는 바람에 신도가 좀 줄어들었다고 그는 말했다. 전체 신도는 총 40명 정도가 된다고.

컴퓨터를 잠시 끄고 마주 앉은 이경남 목사에게 기자는 '80년 5월 광주' 이후에 언제 처음으로 광주를 찾았냐고 물었다.

"올해 3월달이지요. KBS기자들과 취재 때문에 갔었고, 이번 달 들어서는 시사저널과 한국일보에서 취재를 요청해서 2번 다녀왔습니다. 내일(18일) 가면 세 번째가 되겠네요"

- 어떻게 광주에서의 경험을 글로 옮길 결심을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그날 이후 늘 광주에 대한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95년 이후 광주에 대한 평가가 공식화 되면서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정보를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객관적 정보가 없는 상황에서는 뭔가를 쓰고 싶어도 쓸 수 없었으니까요."

이경남 목사의 서재에는 벽면 가득 책이 꽂혀 있었다. 책상에는 성경책이며 찬송이 놓여 있었다. 76년 대전에 있는 목원대에서 목회 공부를 시작한 이경남 목사는 4학년이 되던해 도피하듯 군대에 입대했다. 그는 성서 속의 요나처럼 가야 할 길을 피해 군대로 도피의 길을 선택했다.

"졸업이 다가오는데 통 자신이 없었어요. 영적 생활에 자신도 없고, 목회를 잘 할 수 있을 지 의심도 들고... 사회는 정말 뒤숭숭한데 지방에 있어서 정보도 없는 것 같고, 답답했었죠.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목회의 길을 걸을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군대가서 있으면서 생각들을 정리해보자고 다짐했어요."

그렇게 도망친 군대는 이씨를 특전사라는 힘겨운 바다에 빠뜨렸다. 고통스러웠지만 그러나 그는 그 곳에서 나름대로 도리를 지키려고 노력했다. 80년 5월 20일 조선대 앞에서 그는 초죽음이 됐던 시민 한 사람을 발견해 부대를 이탈해 주변에 있는 교회로 피신 시켰다.

당시 부대 이탈은 즉결 처형감이었지만 그는 지휘관에게 "여기는 전쟁터이니 제발 정신 좀 차리고 바로 행동하라"는 말과 심하게 두들겨 맞는 것으로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


-목사님의 글에서 보면 신군부가 계획적으로 광주사태를 만들었다는 대목이 나오는데

"80년 새해부터 특전 병사를 위해 파격적인 200%의 봉급과 500%의 낙하수당 인상을 약속했어요. 그리고 지휘관들이 특전사령관 훈시 한번 듣고 오면 '좋은 때가 온다. 우리의 시대가 온다'며 들떠서 돌아다니곤 했었죠. 신군부들이 미리 충성스러운 친위대를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선심 정책을 폈던 거지요"

-김대중 대통령 집권 이후 5공 세력과 화해가 이야기 되고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그는 목소리를 높였다) 군부세력들이 여전히 반성하지 않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들은 여전히 착각을 하고 있어요. 사과할 줄도 모르고 자신들의 죄과에 대해 수긍하지 않고 있습니다.

양비론 적인 언론과 정치인들이 가장 큰 문젭니다. 물론 DJ야 승자니까 그들에게 면죄부를 줄수도 있겠지만 일반 국민들의 정의적 정서로는 도저히 용납 할수 없는 일입니다"

그는 이 부분에 대해 할말이 많은 듯 했다. 역사의 심판을 피해가는 세력이 존재하는 현실에 분통이 터진다고 열변을 토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성경의 가르침이 있지 않느냐"는 기자의 우문(愚問)에 대한 그의 답은 명쾌 했다.

" 뉘우치지 않는데 용서하는 것은 그들을 제압할 수 없기 때문에 취하는 일종의 비굴한 행동입니다. 그들을 처단 할 수 없는 한계가 존재하는 상황이라면 진정한 의미의 용서는 이루어 질 수 없습니다"

제3신 - "광주는 제게 아름다운 추억입니다 "

인터뷰를 하는 1시간 동안 3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모두 언론사에서 온 전화였다. 이경남 목사는 기자라는 사람은 믿을 만한 사람이 못된다고 딱 잘라 말했다.

직업적으로 새로운 뉴스가 쫓다보니 항상 5월에만 '5.18'에 관심을 갖는 것 같다고 일침을 가했다. 어제 기자의 강권에 못 이겨 광주에 다녀온 것을 몹시 후회하는 눈치 였다.

-조금 후에 수요 예배를 진행하실 텐데. 어떤 내용의 설교를 준비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지금 솔직히 정신이 없어서 아직 모르겠어요. 빨리 인터뷰 끝내고 준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

- 설교 하실 때 광주의 경험도 가끔 신도들에게 이야기 하시는지

"이야기를 할 수 없습니다. 농촌이라는 곳이 역사적 문제들과 너무 분리돼 있어 쉽게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 목사님 글에 보면 가족들과 함께 광주에 꼭 방문하고 싶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아이들이 아직 초등학생이라 감당하기 힘들 것 같아서...고등학생 정도가 되면 그 때의 사진도 보여주고 광주를 찾아 많은 것들을 말해 줄 계획입니다"

이경남 목사는 이사야서에 있는 "황무지가 장미 꽃같이 피는 것을 볼 때에"로 시작되는 구절을 성경에서 가장 좋아한단다. 이스라엘 백성이 새로운 신천지를 갈망하면서 부른 그 구절을 이 곳 횡성에서 실현시키고 싶은 것이 그의 소박한 꿈이다.

"자본주의는 자기 성공만을 꿈꿉니다. 놀부적 가치가 흥부적 가치를 휠씬 앞지르는 사회가 바로 자본주의 사회죠. 삼성이나 현대에 들어가 엘리트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기능인으로 전락해 살고 있는 이 시대에 생활 공동체도 대안적 가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습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는 지역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쳐낼 생각이다. 지금이야 항상 교회일에 매달려 있지만 10년전 이곳에 와서 공동묘지를 일구어 교회를 세운 뚝심으로 새롭게 뭔가를 시도해 볼 계획이다. 황무지가 장미 꽃 같이 피어나는 농촌 공동체를 일구어낼 수 있도록 말이다.

끝으로 80년 광주는 이경남 목사에게 무엇이냐고 물음을 던졌다.

"광주는 아름다운 추억입니다. 끔찍한 살육의 현장이 물론 저에게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상처이기도 했었지만 양심과 신앙에 따라 명령을 어기고 시민을 구할 수 있었고, 양심에 따라 행동할 수 있었으니까요. 몸은 군인 이었지만 마음은 그들 편이였기 때문에 부끄럽지 않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광주는 그래서 제게 아름다운 추억입니다"

관련기사 [5월의 회고-어느 특전병사의 기록] (이경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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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시민은 기자다'라는 오마이뉴스 정신을 신뢰합니다. 2000년 3월, 오마이뉴스에 입사해 취재부와 편집부에서 일했습니다. 2022년 4월부터 뉴스본부장을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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