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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이 화냥년아!"
요즘 젊은이들이 하는 말로 '꼭지'가 돌아버릴 욕이다. 이 욕을 듣고 가만히 앉아 있을 여인네가 있을까? 보통 여인네들끼리 싸울 때 한방 날리는 '메가톤급' 욕이기도 한 이 욕은 본래 '환향녀(還鄕女)'을 일컫는 말이었다. 오마이뉴스 여성독자여! 일단 숨을 고르고 들어보라.

환향녀는 1637년 조선이 병자호란을 거치며 청나라로 잡혀갔다 고국에 돌아온 여자를 통칭하는 말이었다. 한나라의 어버이라 할 수 있는 임금부터가 청나라 황제에게 무릎을 끓고 머리를 조아렸으니 아무런 힘없이 바람에 흔들리는 들꽃같은 민초들이야 더 말해 무엇하랴!

10대 소녀에서부터 나이든 여성에 이르기까지 청나라 사람들의 손길 발길질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어 그 '되놈'들에 잡혀간 여인네 수가 무려 50만명. 제주도 인구와 맞먹는다.

하나의 일화.
1650년 조선조 효종 원년에 청나라 구왕은 조선의 공주에게 장가들겠다고 청혼을 해온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평민의 처녀를 골라 보내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훗날이 두려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임금을 비롯한 조정의 대신 각료들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이 때 종실의 금림군 이개균이 자신의 딸을 청나라에 보낼 것을 자청하고 나섰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그녀를 '의순공주'라 칭하고 청나라로 떠나보냈다. 나라에 충성하는 일편단심 그 하나 때문에 딸을 청나라로 보내는 부모의 가슴은 터질 것만 같았다.

부모에게 작별인사하고 일행과 함께 평안도 정주땅에 이른 '의순공주' 역시 압록강에 이르자 정든 고향산천과 부모형제를 생각하매 가슴이 미어졌다.

'짐승만도 못한 오랑캐 나라의 구왕에게 아첨하며 욕되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낫겠다' 그렇게 생각한 의순공주는 가마를 멈추게 하고 가파른 벼랑아래로 몸을 던지고 만다. 갑자기 일어난 사건에 당황한 노복들이 곧 정신을 차리고 벼랑으로 내려가 시신이나마 건지려 했으나 아무것도 찾지 못하고 겨우 족두리만 건져와서 의정부시 금오동 선영의 아버지묘 밑에 장사를 지냈다. 지금도 이곳은 '족두리산소'라 불리며 매년 4월경에 동네사람과 후손들이 제사를 지낸다.

그러나 여성수난은 고국을 떠날 때보다 돌아와서가 더 컸다. 돈있는 집안에서는 큰 돈을 물고 아내와 딸을 집으로 데려왔다. 그리고 일부는 청나라 주인의 눈을 피해 도망쳐 오기도 했다. 집안에 돈이 없거나 도망칠 용기조차 내지 못하는 여인네들은 붉게 노을지는 남녘 하늘만 쳐다 보며 매일 밤 속울음을 울 수밖에 없었다.

중국 동북부지역을 여행하다보면 마주치게 되는 '고려보'라는 마을이 바로 그들이 고국을 그리워하며 둥지를 틀고 살다간 곳이다. 하지만 고국으로 돌아온 여인네들이라고 웃음꽃이 만발하지는 않았다. 어버이도 몸을 더럽힌 여식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나가라'고 호통을 치는가 하면 같은 어미배에서 태어난 오라버니도 '나같으면 목숨을 끊고 말았을 것이다'고 살을 도려내는 듯한 모진 말을 서슴치 않았다.

시집을 간 여인은 말할 것도 없었다. 툭하면 시부모로부터 손가락질을 받기 일쑤였다. 그렇다고 남편이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을까? 그들은 도리어 한술 더 떠 '이혼청구소송'하기에 바빴다. 몸을 더럽힌 여자를 데리고 살 수 없다는게 이유. 더 고상한 이유는 가문의 명예를 더립힌 여자라는 것.

남편들은 환향녀를 '화냥년'으로 대했다. 그러나 인조 임금은 이혼을 허락치 않았다. 이 덕분에 환향녀들은 다행히 이혼만은 면했으나 남편들이 첩을 얻어 재장가를 드는 바람에 언제나 이불속은 차가웠다.

이처럼 병자호란때 북쪽 내륙 지역의 여인네들이 수모를 받았다고 한다면 이보다 45년 앞선 임진왜란때에는 남쪽 해안지역의 여인네들이 똑같은 삶을 살았다. 이 때도 남편들은 이혼을 요청했다.

그러나 선조임금은 "상황은 충분히 이해하나 정절을 잃었다고는 볼 수 없으므로 이혼은 허락할 수 없다"고 못박는다. 그대신 남편들은 세컨드를 얻느라 문턱이 닳아지도록 중매쟁이를 불러들였다.

이같은 여성수난의 역사는 1592년 임진왜란부터 1895년 청일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됐다. 한나라의 임금이 정치를 잘못한 탓에 우리네 꽃다운 여인들이 낯설고 물설은 타국으로 끌려가 온갖 육체적 수모와 모욕을 당하다 드디어 목숨을 걸고 고국으로 도망쳐 찾아왔지만 이미 고국은 예전의 고국이 아니었다.

부모도 이웃도 형제도 남편도 그들을 반갑게 맞아주기는 커녕 '저 년은 더러운 년'이라며 돌을 던져 나무에 줄을 매다는 경우가 허다했다. 오랑캐가 순결을 빼앗았다면 오히려 고국은 목숨을 앗아갔다.

그럼 청나라의 패배로 3백년에 이르는 우리나라의 '화냥년' 역사는 끝났을까?

최근까지 국가간 현안으로 부각되고 있는 정신대문제도 따지고 보면 '환향녀' 문제와 별반 다를게 없는 '20세기의 현실'이다. 한국인 신랑과 중국인 신부가 알콩달콩 살아가는 국제결혼시대에 맞지 않는 그저 괜한 질문이지만

"'화냥년!' 그욕은 사라졌는가?" 21세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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