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혜진은 박지수가 등장하기 전까지 한 시즌 건너 한 번씩 MVP에 선정되던 리그 최고의 선수였다.

박혜진 ⓒ 한국여자농구연맹


정선민호가 라트비아를 상대로 기분좋은 2연승을 거뒀다. 정선민 감독이 이끄는 대한민국 여자농구 대표팀은 8월 19일 청주체육관에서 열린 KB국민은행 초청 여자농구 평가전 2차전에서 연장전까지 가는 접전끝에 라트비아를 71-66으로 제압했다.
 
한국은 전날 열린 1차전에서도 치열한 공방전 끝에 56-55, 단 1점차로 신승한 바 있다. 1차전에서는 한때 11점 차까지 앞섰다가 4쿼터에 맹추격을 허용하며 역전패 직전까지 몰리기도 했다면, 2차전에서는 오히려 한국이 11점 차 점수를 뒤집는 투지를 보여줬다.
 
전반을 34-34로 팽팽하게 맞섰던 양팀은 3쿼터들어 라트비아의 외곽슛이 터지기 시작하여 단 3분여만에 35-46까지 점수차가 벌어졌다. 위기 상황에서 강이슬과 박혜진이 연속 득점을 성공시키며 공격의 물꼬를 텄다. 수비를 빠르게 재정비하여 점수차를 좁혀가면서 경기는 다시 접전 양상으로 흘러갔다.
 
양팀은 4쿼터들어 일진일퇴의 공방을 펼쳤다. 라트비아가 도망가면 한국이 곧바로 따라붙는 흐름이었다. 한국은 4쿼터 중반 약 3분여간 라트비아의 공격을 자유투 1점으로 틀어막으며 박지현이 자유투로 60-60 동점을 만들었고, 종료 35초 전에는 박혜진이 기어코 역전골까지 성공시키는 뒷심을 발휘했다. 한국은 종료 17초를 남겨두고 63-61, 2점차로 앞선 상황에서 라트비아의 파울작전으로 자유투까지 얻어내 승리에 한걸음 더 다가섰다.
 
하지만 박지현이 중요한 고비에서 자유투 2개중 한 개를 실패한 것이 화근이 됐다. 3점차에서 마지막 수비에 나선 한국은 3점슛만 내주지 않으면 승리할수 있는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종료직전 포인트가드 제이콥소네에게 뼈아픈 3점슛을 허용하며 경기는 연장전으로 넘어갔다.
 
근본적인 문제는 박지현의 자유투 실패보다도 외곽 수비에 있었다. 정선민 감독은 실점을 하더라도 돌파를 유도하여 2점을 내주는 수비를 지시했으나, 스위치 디펜스 상황에서 선수들이 우왕좌왕하며 어정쩡하게 위치해있다가 슈팅할 공간을 내준게 뼈아팠다. 슈팅을 시도한 순간 이미 들어갈 것을 직감한 정선민 감독은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못했다.
 
자칫 흐름을 내줄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해결사는 박혜진이었다. 양팀 모두 연장전들어 급격한 체력 하락으로 야투 난조와 실책이 남발하는 가운데, 종료 1분 32초를 남기고 66-66으로 맞선 상황에서 박혜진이 과감하게 기습적으로 쏘아올린 딥 쓰리(장거리 3점)이 골망을 갈랐다. 박혜진의 강심장을 보여주는 명장면이었다.
 
조급해진 라트비아는 연이어 외곽슛을 시도했지만 모두 불발됐고 실책까지 속출하며 공격권을 헌납했다. 이어 박혜진이 진상대의 파울로 얻어낸 자유투 2개까지 침착하게 성공시키며 승부에 쐐기를 박았다.
 
박혜진은 이날 양팀 최다인 22점을 올렸다. 이중 12점이 후반과 연장전에서 뽑아낸 점수였다. 박혜진은 연장전에서 얻은 7점중 5점을 책임지며 박지수가 빠진 대표팀의 에이스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2022 FIBA 농구월드컵에 출전하는 이번 대표팀은 소집 전부터 악재가 닥쳤다. 팀의 기둥인 박지수가 공황장애 증세를 호소하며 전열에서 이탈했고, 설상가상 배혜윤과 이해란 또한 부상으로 낙마했다. 높이가 현저히 약해진 대표팀은 극심한 전력누수로 자칫 본격적인 시작도 하기전에 사기가 크게 떨어질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라트비아와의 평가전은 분위기 전환을 위한 중요한 계기였다. 여자농구가 국내에서 해외팀을 초청하여 평가전을 치른 것은 사상 최초였다. 그동안 보기힘든 평가전 효과로 미디어와 팬들의 주목을 받으며 모처럼 여자농구 대표팀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여기에 박지수가 빠진 상태에서 만만치않은 전력의 유럽팀인 라트비아를 상대로 연승을 거두며 자신감 회복과 함께 장신팀에 대한 학습효과까지 얻었다.
 
현실적으로 박지수를 대체할수 있는 카드는 없다. 예상대로 박지수가 없는 한국은 리바운드와 페인트존 싸움에서는 라트비아에 크게 밀렸다. 그럼에도 한국이 라트비아와 대등한 대결을 펼칠수 있었던 것은 외곽슛과 속공, 수비에서 앞섰기 때문이다. 진안은 국제무대에서는 언더사이즈 빅맨이지만 준수한 스크린에 이어 저돌적인 골밑플레이로 라트비아의 장신숲에 맞섰다. 강이슬-박혜진-최이샘 등은 라트비아의 높이에 주눅들지않고 찬스가 나면 과감하게 중장거리슛을 쏘아올렸다.
 
라트비아는 한국을 상대로 2경기에서 무려 35개의 실책을 저질렀다. 이는 그만큼 한국의 수비가 강력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한국은 기동력과 활동량에서 우위를 점하며 다양한 트랩과 스위치 디펜스로 라트비아를 괴롭혔다.
 
물론 국제농구연맹 랭킹 24위의 라트비아를 상대로 연승한 것에 지나치게 도취될 필요는 없다는 신중론도 있다. 라트비아는 월드컵 본선진출에 실패한 팀이고 심지어 이번 아시아 원정에서는 주축 선수들이 대거 빠진 2군에 가까웠다.
 
박지수가 결장한 한국과 대등한 대결을 펼쳤던 라트비아를, 앞서 상대했던 일본은 두 차례의 평가전에서 모두 20여점차 이상의 완승을 거두기도 했다. 190cm 이상의 장신은 많았지만 기술과 스피드가 떨어지고 외곽슛의 기복이 심한 라트비아는 한국이 월드컵 본선에서 만나게될 강호들보다는 수준이 크게 떨어진다.

정선민 감독이 라트비아를 상대로 고전한 이유에 대하여 '몸싸움과 체력'을 거론한 것은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한국 여자농구는 기술과 스피드에서 라트비아보다 우위에 있었지만, 상대의 높이와 파워에 알고도 당하는 장면이 많았다.
 
국제대회는 몸싸움이 국내보다 훨씬 치열하다. WKBL에서 접해보지못한 강한 몸싸움에 우리 선수들이 자리를 잡지못하고 외곽으로 밀려나오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볼회전이 단조로워지면서 외곽슛에 대한 의존도가 더 커지는 효과로 이어졌고, 선수들의 체력도 더 빨리 저하되는 것이 두드러졌다. 박지수가 없는 상황에서 신장이 낮은 한국이 몸싸움과 체력마저 밀린다면 농구월드컵에서는 전혀 승산이 없다.
 
이런 부분은 선수들의 투지나 정신력으로만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 꾸준한 경험을 통하여 경쟁력을 끌어올려야 필요가 있다. 해외팀과의 A매치 평가전은 일회성 이벤트로만 그칠게 아니라 꾸준히 유치해서 선수들이 외국 선수들에 대한 생소함과 두려움을 극복하는 경험을 쌓아야한다.
 
또한 현재 WKBL은 외국인 선수제도를 폐지하며 국내 선수들로만 리그를 소화하고 있다. 토종 빅맨들에 대한 보호, 국내 선수들의 주도권과 창의성 향상, 외국인 선수 영입 따른 구단들의 비용 절감, 코로나19로 인한 방역문제 등 여러 가지 현실적 이유가 반영된 결정이었고 나름의 성과도 있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다양한 외국 선수들과 경쟁할 기회가 사라지며 선수들이 '우물 안개구리'가 될 위험도 크다. 선수 개개인의 수준 향상과 대표팀의 국제경쟁력 강화를 위해서라도 또다른 변화를 고민해봐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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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트비아 여자농구대표팀 농구월드컵 박혜진 박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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