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기사엔 영화의 일부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아발론 호는 새로운 개척 지구 '터전II'를 향하는 초호화 우주선이다. 동면 상태의 승객 5000명과 승무원 258명을 태우고 120년의 여정을 떠난 아발론 호는 출발 30년 째를 맞은 어느날 소행성군과 부딪친다. 이 충격으로 동면기 하나가 고장나면서 승객 중 한 명인 짐(크리스 프랫 분)이 잠에서 깨어나고, 자신이 한참 이른 시점에 깨어난 사실을 안 짐은 다시 잠들기 위해 온갖 수를 쓰지만 소용이 없다. 그는 외로움 속에 1년을 보내던 중 동면 중인 또다른 승객 오로라(제니퍼 로렌스 분)의 존재를 알게 된다. 오로라에게 호감을 갖게 된 짐은 고심 끝에 그를 깨우고, 남은 90년을 함께 우주선에서 보내야 할 두 사람은 점점 가까워진다.
영화 <패신저스>는 마치 성경 속 창세기 구절을 우주공간에 옮겨놓은 듯한 작품이다. 우연히 깨어난 태초의 인간이 있고, 남성인 그가 태초의 여자에게 생명을 불어넣는다. 두 사람이 살아가는 터전은 '아발론'이란 이름의 에덴 동산이다. 이들은 아름답고 편안한 그 곳에서 아무런 걱정 없이 풍요와 평화 속 삶을 이어간다. 이 와중에 영화는 SF를 도구로 로맨스에 대한 그야말로 태초적 질문을 던진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단둘이 무인도에 살아도 행복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 말이다.
이상적이다 못해 사춘기 시절 일장춘몽 같은 질문이지만, 영화 속 아발론 호의 '스펙'을 보면 얘기는 달라진다. 아발론 호에는 커다란 침실과 식당은 물론이고 입맛대로 즐길 수 있는 레스토랑과 바, 창 밖으로 우주가 그대로 보이는 수영장도 있다. 최고급 홈 시어터 시스템의 영화 감상실에 농구, 가상현실 게임장 등 즐길거리도 폭넓다. 요리, 청소를 비롯한 모든 가사노동은 로봇이 대신하고, 아픈 곳이 있으면 최첨단 로봇 의료 시스템의 치료를 받을 수도 있다. 1km도 넘는 길이의 우주선 안에서, 이 모든 서비스를 단 두 사람이 독점한다.
"새 행성에서 새 세기를 맞겠다"는 꿈과 "우주선에서 단 둘이 남은 평생을 보내야 한다"는 현실. 이 둘 사이의 큼지막한 괴리는 영화를 관통하는 두 주인공의 갈등 요소이자 반드시 해결해야 할 숙제다. 그리고 1년을 함께한 짐과 오로라의 로맨스가 정점에 다다른 순간, 영화는 "짐이 나를 깨웠다"는 사실을 안 오로라를 통해 그 문제를 수면 위로 꺼내 든다. 짐은 오로라를 깨움으로써 90년 뒤 있어야 할 그녀의 새로운 삶을 죽였고, 오로라는 자신의 미래를 제멋대로 바꿔버린 짐을 결코 용서할 수 없다. 한번 깬 이상 다시 동면에 들 수 없는 짐과 오로라가 각각 느끼는 죄책감과 무력감은 그렇게 아릿하게 가슴을 짓누른다.
영화 후반부, 짐과 오로라의 갈등이 극에 다다른 시점 갑작스레 터지는 사건은 클라이맥스 역할을 톡톡히 한다. 외부적 요인 때문에 두 사람이 생존의 위협을 받고 서로를 위해 몸을 던지는 과정 끝에 결국 "너만 있으면 된다"고 부르짖는 전개는 절절하게 가슴을 울린다. 마치 여행 중 우연히 보게 된 불꽃놀이처럼, 두 사람을 향한 외부의 위협은 앞서 벌어진 모든 '잘못'들에 필연성을 부여하는 일종의 이벤트처럼 느껴진다.
다시 돌아와서, <패신저스>의 무대가 된 우주선 이름이 '영원한 휴식'을 취하려 아더왕이 찾은 섬 '아발론'이란 점은 새삼 의미심장하다. 누군가에겐 90년 동안 갇혀 지내다 죽게 될 감옥으로 여겨질 곳이 다른 누군가에겐 더할 나위 없이 평온한 안식처일 수 있는 것이다. 아직 가지 않은 곳이나 펼쳐지지 않은 미래를 동경하기보다 당장 곁에 있는 사람과 눈앞에 주어진 현실이 소중하다는 것. <패신저스>가 인생 열차의 승객들에게 남기는 교훈이다. 오는 1월 4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