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텍스트(Text)에는 맥락(Context)이 있습니다. 문화 콘텐츠도 마찬가지입니다. 100% 정치적인 예술이 존재할 수 없듯이, 100% 순수한 예술도 없습니다. 문화 공연을 때로는 인문학적으로, 때로는 사회과학적으로 읽어봅니다. 마음에 안 들면 신랄하게 태클도 걸어보고, 재미있으면 '우쭈쭈' 칭찬도 합니다. 공연을 정치·사회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항상 성공하지는 않을 겁니다. 시도가 비록 재미(Fun)는 없더라도, 최소한 '뻔'한 리뷰는 쓰지 않으려 합니다. [편집자말]
 지난 11월 29일, 서울 충무아트홀 소극장 블루 무대에서 뮤지컬 <명동로망스> 커튼콜 장면.

▲ 2015년에서 1956년으로 타임 리프 지난 2015년 11월 29일, 서울 충무아트홀 소극장 블루 무대에 오른 뮤지컬 <명동로망스> 커튼콜 장면. 주인공 장선호 역의 배우 고상호가 시간 이동을 하는 다락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 곽우신


대중문화 전반에서 시간을 거스르는 '타임 리프(Time Leap)'는 더는 신선한 소재가 아니다. 소극장 창작뮤지컬 <명동로망스>의 시놉시스를 처음 봤을 때, 그다지 구미가 당기지 않았던 이유도 그 때문이다. 2015년을 사는 9급 공무원 장선호가 1956년으로 날아가 그 시대를 살았던 예술가를 만나는 이야기 - "2015년 흔남, 1956년 훈남 되다"라는 홍보문구에서 드러나듯, 뻔하다면 뻔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웬걸. 뚜껑을 열자 기대 이상이었다. 흔한 코드라는 건, 진부함만 걷어낸다면, 경험적으로 대중에게 잘 먹힐 수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대중에게 익숙한 이야기에, <명동로망스>는 '예술의 참의미'라는 다소 무거운 메시지를 잘 섞었다. 관객이 메시지를 소화하다가 체하지 않도록 가벼울 땐 가볍게, 무거울 땐 무겁게, 강약을 조절했다.

호연은 관객 반응으로 이어졌다. 유료관객점유율 50% 이상을 꾸준히 유지했고, 지난 1일부터 3일까지 애초 마지막 공연이었던 5회차는 전석 매진이었다. 척박한 창작뮤지컬 시장에서 고무적인 성과다. 서울 충무아트홀 소극장 블루에서 2015년 10월 20일 개막해 지난 3일에 막을 내릴 예정이었던 <명동로망스>는 이같은 응원에 힘입어 5일부터 10일까지 연장 공연에 돌입했다.

3명의 예술가, 그리고 1명의 미래남

 지난 11월 29일, 서울 충무아트홀 소극장 블루 무대에서 뮤지컬 <명동로망스> 커튼콜 장면.

▲ 전혜린의 하트 뮤지컬 <명동로망스> 커튼콜. 지난 2015년 11월 29일, 서울 충무아트홀 소극장 블루에서 퇴장하는 배우들 사이로 조윤영 배우가 관객에게 하트를 그려 보이고 있다. 조윤영이 소화한 전혜린은 안유진의 전혜린과는 또 다른 개성이 있다. 전혜린은 예정된 죽음을 피하지 않고 남아, 자신의 작품을 써내려간다. ⓒ 곽우신


뮤지컬 <명동로망스>에 등장하는 3명의 예술가(박인환·전혜린·이중섭)가 1956년의 평범한 소시민을 대변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부르주아 출신의 인텔리였다. 박인환은 평양의전을 다니다 중퇴한 후 서점을 경영했고, <경향신문> 기자로 미국을 다녀온 '모더니스트'였다. 전혜린은 관료 출신 아버지의 후원에 힘입어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으며, 독일 유학 경험이 있다. 이중섭조차 본격적으로 생활고에 시달렸던 건 6·25 이후이며, 지주였던 외할아버지 덕분에 어린 시절은 풍요로웠다.

그러나 그들은 부잣집 도련님·아가씨라서, 겉멋이 들어서, 예술을 한 건 아니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고뇌했다. 오늘을 노래하고 내일을 꿈꾸는 게 예술이라면, 이들은 진정한 예술가였다.

"내가 누군지 어디서 왔는지 그런 건 모두 잊고. 나에 대한 기대와 세상의 눈초리, 그런 건 모른 체하고. 지금은 걷고 또 걸을래.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하나만 기억하고 싶어, 지금 이 순간 나 살아 있다는 것. 마음껏 돌아다니고 싶어. 집 없는 집시처럼. 욕심껏 들이마시고 싶어. 낯선 공기 속 자유를. 발끝부터 퍼지는 자유로운 이 느낌." - 뮤지컬 <명동로망스> No.11. '집시처럼'(전혜린) 중에서

"그런 세상 내 안에 있어. 내가 그리는 꿈같은 세상. 다른 세상 만날 수 있어. 내가 그리는 대로 이뤄지는 세상. 그런 세상 그 안에 있어. 한 번도 그려본 적 없다 하여도 마음 깊이 꿈꾸는 세상. 네가 바라는 너의 모습을 그려봐. 어딘가 있을 거야, 그런 세상. 내 앞을 막는 것 하나 없는 마음껏 꿈꿀 수 있는 세상. 그려봐 함께 그런 세상. 그런 세상이 있어." - 뮤지컬 <명동로망스> No.12. '그런 세상'(전원 합창) 중에서

전혜린처럼, 그들은 뜨겁게 오늘을 노래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들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오늘을 꿈꿨다. 동시에 합창처럼, 그들은 격렬하게 내일을 꿈꿨다. 그리고 꿈꾸는 내일이 현실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요절한 천재 이상을 추모하는 자리에서 이들이 부르는 '그런 세상'은 지금 우리가 예술을 되새기는 이유를 말해준다. 내일에 얽매여 있는 선호에게 전혜린은, 올지 안 올지 알 수 없는 내일이 오늘을 얽맬 수 없다고 말한다. 경찰 채홍익이 시도때도 없이 훼방 놓는 오늘이지만, 내일을 향한 새 희망 자체를 꺾지는 못했다.

현실에 짓눌려 살던 장선호가 마주한 1956년. 당시 예술가의 삶은 쳇바퀴 돌리듯 열심히 살아도 개선되지 않던 선호 자신의 삶과 대조된다. 내일을 위해 오늘을 담보로 잡지도 않고, 오늘 때문에 내일을 놓지도 않는 삶 - 60년 전에 이들이 품었던 이상향은 선호로 대변되는 지금의 우리에게, 다른 방향의 길도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공한다.

1956년 명동이 묻고 2016년이 답을 못하다

 지난 11월 29일, 서울 충무아트홀 소극장 블루 무대에서 뮤지컬 <명동로망스> 커튼콜 장면.

▲ 손 흔드는 이중섭 지난 11월 29일, 서울 충무아트홀 소극장 블루 무대의 뮤지컬 <명동로망스> 커튼콜 장면. 이중섭 역을 맡은 배우 김준원이 관객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이중섭이라는 예술가를 등장시킨 것은, 예술에 대해 잘 모르는 관객도 무대에 공감하게 하는 데 기여한다. 하지만 이중섭의 아픔이나 외로움, 예술가로서의 본능과 생활인으로서의 의무 사이의 갈등이 너무 평면적으로 그려진 것 같아 아쉽다. <명동로망스>는 콘셉트와 소재의 '뻔함'을 돌파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극의 완성도에서는 이런저런 아쉬움이 남는다. ⓒ 곽우신


 지난 11월 29일, 서울 충무아트홀 소극장 블루 무대에서 뮤지컬 <명동로망스> 커튼콜 장면.

▲ 성여인 역의 박범정 지난 2015년 11월 29일, 서울 충무아트홀 소극장 블루 무대의 뮤지컬 <명동로망스> 커튼콜 장면. 다방 '명동로망스'의 주인 성여인은 2015년과 1956년을 잇는 인물 중 하나이다. 그는 자신의 다방에서 일어났던 일을 기억하며, 전혜린의 글을 선호에게 전해준다. ⓒ 곽우신


박인환은 그의 문우였던 김수영 시인과 끊임없이 싸우며 비판받았지만, 결코 시를 버리지 않았다. 작품 활동은 하지 않고 있는 척만 한다는 비난에도, 전혜린은 자신이 써내려갈 문장에 대해 고민했다. 가족과 생활을 위해 그림을 버리겠다고 울부짖던 작품 속 이중섭은, 선호가 커피 위 거품에 그린 문양에 감명 받아 자기도 모르게 또 그림을 그린다.

그러나 2016년 지금의 대한민국은 어떤가. 미래에는 무슨 시를 읽느냐는 박인환의 질문에, 선호는 제대로 답하지 못한다.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 한 구절도 들어본 적 없는 선호는, 그저 한 점에 몇억 원씩 팔리는 이중섭의 그림만을 기억할 뿐이었다. 이중섭이 피를 토하며 그렸던 그림이지만, 선호의 머릿속에 이중섭은 사라지고 몇억 원이라는 숫자만 남아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역사 같은 건 잘 모른다고 웃어넘기는 선호에게 박인환은 지적한다. 역사를 잘 모르는 것은 결코 당당한 일이 아니라고. 그러나 스펙 쌓기에 머물러 있던 선호에게 역사는 잘 모르는 게 당연한 것이었다. 선호처럼, 지금의 우리도 역사를 잘 모르는 게 어느새 자연스러워졌다.

60년의 세월은 무엇을 바꿨길래, 전후 폐허 속에서도 술을 생명수로 여기며 낭만을 외치던 사람들에게서 예술혼을 빼앗았을까. 1956년에 존재하던 로망은 왜 단 두 세대만에 2015·2016년 대한민국에서 사라졌을까.

경찰 채홍익이 상징하는 것

 지난 11월 29일, 서울 충무아트홀 소극장 블루 무대에서 뮤지컬 <명동로망스> 커튼콜 장면.

▲ 채홍익과 박인환 지난 2015년 11월 29일, 서울 충무아트홀 소극장 블루 무대에서 배우 윤석원이 맥주를 마시는 걸 정민 배우가 지켜보고 있다. 극 중에서 시인 박인환과 경찰 채홍익은 서로 갈등하고 충돌하는 인물이다. ⓒ 곽우신


1956년, 경찰 채홍익은 예술을 매우 못마땅해 한다. 그는 예술인들이 예술인이라는 이름만으로 '이상한 짓'을 하는 게 용서되고, 특권층인 양 통제를 따르지 않는 것에 불쾌해 한다. 선호에게 예술인임을 증명하라고 윽박지르기도 하고, 예술인 등록제를 통해 예술인을 관리하는 방침에 기뻐한다. 또한 불온한 예술인들이 모이는 장소에서 선호가 이기붕의 당선을 위해 한마디 할 것을 종용한다.

수단이 바뀌었을 뿐, 지금의 대한민국도 마찬가지 아닌가. 정치권력은 역사교육의 방향을 획일화하여 알아야 할 역사와 몰라도 되는 역사를 나눴다. 경제권력은 예술을 상품화했다. 이제 사람들은 작품의 감흥보다 가격을 기억한다. 들판을 자유롭게 달리던 말에게 재갈을 물리듯, 권력은 언제나 예술을 길들이려고 했다.

채홍익은 아직 살아있다. 지난 2012년 5월 17일, 전두환 전 대통령을 풍자하는 포스터 50여 장을 전 전 대통령 자택 일대에 내걸었던 이하 작가는 현장에서 체포됐다. 지난 2015년 12월 11일, 대법원은 10만 원 과태료 선고를 유예한 원심을 확정했다.

이하뿐이 아니다. 이명박 정부부터 박근혜 정부까지, 권력을 향한 예술의 예봉은 무뎌지고 예술을 옭아매는 권력의 족쇄는 강해졌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을 풍자하는 작품은 정부 지원사업에서 탈락하고, 공연예술센터는 세월호가 연상된다는 이유로 연극 공연을 방해했다. 마치 이기붕 당선에 협조하면 선호에게 신분증을 만들어주고, 따르지 않으면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협박하는 1956년 채홍익처럼.

다시, 예술처럼

 지난 11월 29일, 서울 충무아트홀 소극장 블루 무대에서 뮤지컬 <명동로망스> 커튼콜 장면.

▲ 장선호의 변화 장선호는 꿈도 희망도 없는 평범한 9급 공무원이었다. 그는 언제나 '열심히' 살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없었으며, 꿈꾸라는 말에도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 하지만 일련의 사건을 겪은 후 큰 심경의 변화를 겪는다. ⓒ 곽우신


선호는 채홍익의 말을 따르려고 했다. 하지만 시인 이상을 추모하는 자리에서 사람들 앞에 나선 선호는, 결국 이기붕 당선의 당위를 설명하는 대신 자신이 꿈꾸는 세상을 선창한다. 자신이 말하고 노래하는 것은 자신이 결정하기로 마음먹었기에.

박인환의 죽음을 목격한 후에도, 전혜린과 이중섭은 죽음이라는 예정된 내일을 회피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마지막까지 1956년이라는 시대에 남으려고 했다. 그들이 발붙인 시대를 노래하기 위해.

지금을 살아가는 관객은 자연스레 장선호에 감정이입하게 된다. 1956년으로 선호와 함께 날아갔다가 현재로 돌아온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이 작품은 전혜린의 마지막 글을 전달받은 후 선호의 삶에 대해 묘사하지 않는다. 하지만 암전이 된 후, 선호가 어떻게 살았을지 떠올려 보는 건 어렵지 않다.

별거 없다. 예술가의 삶과 작품을 지켜봤던 선호처럼, 우리는 그들 옆에서 그들이 표현하는 예술을 마주하면 된다. 시를 읊고, 소설을 읽고, 그림을 보면 된다. 예술가의 옆에서 그들의 작품을 기억하는 것만으로, 잊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오늘에 열광하고, 내일을 꿈꾸면 된다. 예술처럼.

뮤지컬 <명동로망스> 포스터 서울 충무아트홀 소극장 블루에서 지난 10월 20일 막을 올린 뮤지컬 <명동로망스>의 포스터. 짜임새가 다소 아쉽지만, 소재와 메시지가 적절하게 조화된 꽤 '괜찮은' 뮤지컬이다. 오는 1월 3일까지 공연한다.

▲ 뮤지컬 <명동로망스> 포스터 서울 충무아트홀 소극장 블루에서 지난 10월 20일 막을 올린 뮤지컬 <명동로망스>의 포스터. 짜임새가 다소 아쉽지만, 소재와 메시지가 적절하게 조화된 꽤 '괜찮은' 뮤지컬이다. 오는 10일까지 공연한다. ⓒ (주)장인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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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오마이뉴스 선임기자. 정신차리고 보니 기자 생활 20년이 훌쩍 넘었다. 언제쯤 세상이 좀 수월해질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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