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과 달리 기아 타이거즈의 가방을 가지고 다니는 김선현. 물론 기아 타이거즈에서 뛰고 있는 형 김선빈이 물려준 것이다.

친구들과 달리 기아 타이거즈의 가방을 가지고 다니는 김선현. 물론 기아 타이거즈에서 뛰고 있는 형 김선빈이 물려준 것이다. ⓒ 이승훈


64회 청룡기 고교야구가 한창인 19일 오후 목동 야구장. 나이키나 미즈노 같은 메이커의 로고가 박힌 야구장비 가방을 메고 있는 보통의 선수들과는 달리 기아 타이거즈의 호랑이 로고가 선명한 가방을 메고 있는 선수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다른 점은 가방뿐이 아니었다. 그의 키는 주위에 서 있던 다른 선수들보다 한뼘은 족히 작아보였다. 혹시 기아 타이거즈의 김선빈? 그러나 이날은 기아가 LG 트윈스와의 광주 홈경기를 벌이는 날이었다. 김선빈은 목동 야구장이 아니라 광주 무등경기장에 있을 것이었다.

가까이 다가가 정체를 확인해야 했다. 그의 등번호는 15번, 김선빈의 3번은 아니었고 유니폼에는 영어 알파벳 'HWASUN'(화순)이 선명했다. 그는 '김선빈의 축소판'이라고 불린다는 동생 김선현(18)이었다.

기아 타이거즈의 가방을 맨 고등학생

 형과 동생... 기아 김선빈(왼쪽)과 그의 동생인 화순고의 김선현. 김선현은 형에게 야구를 배웠다.

형과 동생... 기아 김선빈(왼쪽)과 그의 동생인 화순고의 김선현. 김선현은 형에게 야구를 배웠다. ⓒ 이승훈


소문대로 동생은 형을 빼다박았다. 형처럼 팀에서 유격수를 맡고 있고, 날쌘 움직임을 자랑하는 야구 스타일도 판박이다. 게다가 아직 성장기이긴 하지만 키도 165cm로 형과 같다. 고등학교 시절의 형처럼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팀에서 톱타자나 중심 타선에서 활약하고 있기도 하다.

야구를 시작한 것도 형 때문이다. 초등학교 시절 야구 유니폼을 입은 형의 모습이 너무 멋있어 보여서 부모님을 졸랐다. 부모님은 '형이 야구를 하니까 너는 공부를 해야지'라고 말렸지만 고집을 꺾지 못했다.

"제가요, 야구가 너무 좋아서 무조건 하겠다고 우겼어요. 형하고 캐치볼하는 것도 정말 재미있었고요."

하지만 찬찬히 뜯어보면 다른 점도 제법 있다. 우선 김선빈은 오른쪽 타석에 들어서지만 김선현은 오른손으로 공을 던지고 타격은 왼쪽 타석에서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성격만 보면 둘이 형제라는 사실에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김선빈은 말이 없고 표정 변화가 거의 없지만 김선현은 활달하고 입가에 웃음을 달고 산다.

형제를 키운 어머니 정미화(40)씨는 "선빈이가 진지한 노력형이라면 선현이는 애교도 많고 야구를 즐기는 스타일인 것 같다"며 "아들들이 다치지 않고 항상 즐겁게 야구를 하는 게 바람"이라며 흐뭇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형은 나의 야구 선생님

 타격 연습을 하고 있는 김선현

타격 연습을 하고 있는 김선현 ⓒ 이승훈

선현이는 형에게 야구를 배우며 자랐다. 3살 터울이라 중고등학교 시절 한 팀에서 뛴 적은 없지만 야구가 잘 되지 않을 때마다 집에 돌아와 형과 함께 연습했다. 형은 때론 수비 코치로, 때론 타격 코치로 변신해 선현이의 부족한 점을 메워줬다.

"사실 형이 겉보기와 다르게 재밌는 사람이에요. 야구도 잘했고 항상 저한테 많은 이야기를 해줬어요. 함께 연습도 많이 했죠. 요즘도 내가 대회에 출전하면 TV로 보고 전화로 이런저런 조언을 해줘요."

어엿한 프로선수가 된 김선빈이 도움을 주는 것은 '말'뿐이 아니다. 선현이가 쓰는 배트, 배팅 장갑, 가방 등은 모두 형에게서 나왔다. 지금 메고 다니는 기아 타이거즈 가방도 형이 쓰다가 물려준 것이다.

"(자신의 배팅장갑과 스파이크를 가리키며) 이거 다 형이 준 거예요. 가방도 형이 줬고 배트도 몇 자루 줬는데 그건 다음 대회에 쓰려고 아껴두고 있어요."

형 자랑을 하던 선현이가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싱긍벙글 웃었다. 김선빈 같은 형을 둔 그는 분명 행복한 고교 야구선수다.

"이용규 선수 닮고 싶다면 형이 실망할까요?"

그렇다면 선현이가 가장 닮고 싶은 선수는 누굴까. '립 서비스'로라도 형 김선빈을 지목할만 한데 대답은 무척이나 솔직했다.

"기아 타이거즈의……,(약간 뜸을 들이다) 이용규 같은 선수가 되고 싶어요. 키는 작지만 타격할 때만큼은 스윙이 매섭잖아요. 저는 수비보다 타격이 재밌는데 그런 스윙을 닮고 싶다는 거죠. 근데 이러면 형이 실망할까요?"

이토록 난해한(?) 질문을 던져놓고는 그가 방긋 웃었다. 그래도 프로 데뷔 시즌 '야구는 키로 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증명해 보인 형에게서 선현이가 많은 용기를 얻은 것도 사실이다. 어머니 정미화씨가 살짝 귀띔해 줬다.

"사실 선빈이가 운동신경은 타고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체격이 너무 작아서 과연 프로에 갈 수 있을까 걱정을 많이 했어요. 조금만 더 컸으면 좋겠다는 아쉬움도 컸죠. 기아에서 지명받았다고 연락왔을 때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프로에서도 버틸 수 있을까 염려가 되기도 했죠. 근데 첫해부터 기대 이상으로 출전 기회를 많이 잡고 활약해서 다행이다 싶었어요. 그리고 그런 형의 모습을 보면서 선현이가 체격이 작아도 할 수 있다는 용기를 많이 얻었어요. 더 잘해야겠다는 욕심도 생긴 것 같고."

"형이 유격수하고 내가 2루수 하면 어떨까"

 형처럼 나도 유격수... 화순고 유격수 김선현의 수비 모습.

형처럼 나도 유격수... 화순고 유격수 김선현의 수비 모습. ⓒ 이승훈


함께 야구를 하는 다른 친구들처럼 선현이의 목표는 형의 뒤를 이어 프로팀의 유니폼을 입고 뛰는 것이다. 지금은 유격수로 뛰고 있지만 프로에 갈 경우 희망 포지션은 2루다. 아무래도 유격수보다는 2루수가 수비 부담이 적어 재밌는 타격에 좀 더 집중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게 선현이의 설명이다.

그리고 만약 형이 팀의 주전 유격수가 되고 선현이가 바로 그 팀의 2루수가 된다면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첫 '형제 키스톤 콤비'의 탄생도 가능해진다.

"언젠가 형에게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어요. 한 팀에서 '형이 유격수하고 내가 2루수 하면 어떨까'라고. 형은 아무 말 없이 웃기만 했는데 우리 둘이 키스톤 콤비로 한 팀에서 뛴다면 호흡도 더 척척 맞고 재밌을 것 같긴 해요. 근데 저는 열광적인 팬들을 가진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하는 게 꿈인데 어쩌죠?"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다시한번 난해한(?) 질문을 던지는 그에게 "롯데에 가고 싶어도 기아가 먼저 지명해 버리면 못가, 사람 일은 모르는 거지"라는 별 도움이 안되는 대답을 들려주고는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진행 중이던 경북고와 경남고의 경기가 7회 콜드로 끝날 조짐을 보여 경기 준비를 서둘러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날 광주일고와의 32강전에서 화순고는 연장 승부치기까지 가는 접전 끝에 아쉽게 패하고 말았다. 3번 타자로 경기에 나선 선현이는 9회초 화순고가 3점 차로 뒤진 상황, 만루에 타석에 들어서 싹쓸이 2루타로 동점을 만드는 활약을 펼쳤다. 하지만 연장 10회 초 승부치기에서는 삼진으로 물러나 타점을 올리지 못했고 10회말 광주일고가 1점을 추가해 경기는 그대로 끝이 나고 말았다.  

아들의 2루타에 환호하고 삼진에 안타까워하던 어머니의 얼굴에 아쉬움이 겹쳤다. 하지만 아직 실망하기엔 이르다. 환상의 호흡을 자랑하는 '키스톤 콤비'를 향한 형제의 꿈은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김선현 김선빈 화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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