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슨 본 VS 제임스 본드 그 승패의 이유는 무엇일까.

▲ 제이슨 본 VS 제임스 본드 그 승패의 이유는 무엇일까. ⓒ Grant Gilchrist


그동안 007 시리즈는 무려 50년간 23편이라는 적지않은 편수를 자랑하며 꾸준히 개봉했을 정도로 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아온 작품이었습니다.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특유의 여유와 유머를 잃지않는 젠틀함과 기상천외한 첨단무기들, 그리고 치명적인 매력의 본드걸들은 이제 007시리즈의 전통으로써 우리를 환호하게 만들었죠. 그러나 냉전시대 탄생한 캐릭터인 제임스 본드는 시대의 변화 앞에서 끊임없이 비난을 받아왔습니다. 지나친 제국주의나 마초이즘, 그리고 점점 더 유치해져가는 신무기와 설정들. 그러나 제임스 본드가 반백년을 버텨올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이 시대의 흐름에 적응하는 뛰어난 위장 기술이었습니다. 냉전시대에나 통할 법했던 구 소비에트 연방의 악당들(007 위기일발, 나를 사랑한 스파이 등)은 제3 세력의 악당집단과 내부의 적(007 골든아이, 스카이폴)으로 바뀌었고, 21세기로 접어들면서 MI6의 국장인 M이 여성으로 교체되는 등 시대가 원하는 것, 그리고 그에 따른 대중이 원하는 것을 캐치하여 끊임없이 변화했던 것. 그것이 바로 007 시리즈가 오늘날까지 우리의 사랑을 받고 있는 이유입니다.

이처럼 007 시리즈는 50년이라는 세월을 잘 버텨왔지만, 그 세월 내내 항상 흥행한 시리즈는 아닙니다. 80년대 말부터 007 시리즈는 서서히 힘을 잃어갑니다. 티모시 달튼이라는 새로운 배우로 본드를 교체하기까지 하지만, 이미 007 시리즈는 유치하고 한물 간 첩보물이라는 멍에와 함께 관객들의 외면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2000년대로 접어들며 피어스 브로스넌으로 본드를 다시 교체하며 다시 빛을 보는가 싶더니, 이내 사그러져 버리고 맙니다. 바로 이때 혜성같이 새로운 첩보물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바로 오늘날까지 액션영화의 판도를 바꿔버린 본 시리즈였습니다. 그리고 무섭게 등장한 이 새로운 첩보원 제이슨 본은 제임스 본드를 단번에 제압합니다.

사실 제이슨 본 역시 냉전시대의 산물입니다. 그의 첫 등장은 80년도 출간된 로버트 러들럼의 소설 <본 아이덴티티>로 부터였습니다. 우리가 영화로 접한 본과는 많이 다른 인물로, 기억을 잃은 스파이라는 큰 줄기는 같지만 소설 속에서 그는 냉전시대를 배경으로 당시 최고의 암살자인 카를로스 자칼을 추척합니다. 또한 애초에 그는 본드의 영향을 많이 받은 캐릭터입니다. 본드와 많은 면에서 대척점을 이루고 있는 본은 작품 내내 한명의 여자만을 사랑하며, 그 어떤 지원과 도움도 없이, 자신의 조국이 아닌 기억을 구하기 위한 여정을 벌입니다. 일종의 본드의 안티테제임과 더불어 오마쥬이기도 한 캐릭터인 것이죠. 이런 제이슨 본이 2000년대에 영화화 되면서 더더욱 본드와는 다른 노선을 걸어가면서 007을 압도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불을 지핀 결정적 계기는 바로 2001년 9월 11일 일어났던 비운의 참사. 바로 9.11 테러 사건이었습니다.

본 아이덴티티의 클라이맥스 장면은 본이 건물 맨 꼭대기 층에서 적과 함께 떨어지며 악당들을 사살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장면은 거대한 건물 폭파 장면으로 촬영 될 예정이었죠. 하지만 촬영 직전 9.11 테러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 사건은 향후 몇년간 헐리웃 영화들의 방향성에 큰 영향을 미치는 사건이 됩니다.

물론 본 아이덴티티도 예외는 아니었고, 원래 영화의 하이라이트 장면이었던 건물 폭파 시퀀스는 지금의 총격 시퀀스로 수정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9.11 테러 사건은 할리우드 영화들이 관객들에게 끔찍했던 그 사건의 트라우마를 떠올리지 않도록 폭파장면을 줄이게 만드는 것으로만 그치진 않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당시 미국 국민들은 공포에 당면합니다. 월드 트레이드 센터라는 미국의 상징적 구조물의 붕괴와 더불어, 무적의 경찰국가 국민이라는 자긍심과 믿음 역시 붕괴되는 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9.11 테러 이후 미국 내에선 현 정부에 대한 수많은 음모론이 터져나왔습니다. 이후 미국이 세계적으로 떨쳐왔던 수퍼 파워에 대한 회의적 시선과, 안보라는 이름으로 자행했던 전쟁과 첩보활동에 대한 비난여론 역시도 급격히 늘어나게 됩니다. 이러한 시선을 가진 영화들도 9.11 테러 사건 이후로 더욱 활발히 제작되기 시작됩니다. 이 타이밍에 <본 아이덴티티>의 속편인 <본 슈프리머시>의 감독으로 폴 그린그래스가 선정됩니다. 그는 본 시리즈 연출 이전엔 72년 북아일랜드에서 IRA에 무력 행사에 반대하며 일어난 평화시위를 과잉진압한 사건인 '블러디 선데이'에 대한 동명의 영화를 연출했습니다. 또한 본 시리즈 이후 이라크 전쟁에 비판적인 시선을 담고있는 <그린존>을 연출합니다. 이러한 그의 자유주의적 시선이 본 시리즈의 녹아들자, 미국에 대한 불신과 반성의 공기가 흐르고 있던 대중들에게 제대로 어필되어 그야말로 대히트를 기록하는 새로운 첩보물이 탄생하게 됩니다.
놀라운 액션으로 우린 매혹시켰던 제이슨 본. 2000년대 액션의 기준은 본 시리즈 이전과 이후로 나뉘게 된다.

▲ 놀라운 액션으로 우린 매혹시켰던 제이슨 본. 2000년대 액션의 기준은 본 시리즈 이전과 이후로 나뉘게 된다.


그렇게 그동안 세계평화를 지키기 위해 외부의 적과 싸워온 본드는 잠시 주춤하게 되고, 내부의 적을 상대로 사투를 벌이는 본의 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본드가 거대한 악의 조직인 '스펙터'를 비롯한 수많은 테러리스트, 킬러, 범죄자를 상대하는 반면 본은 끊임없이 진실을 은폐하고, 또 이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CIA와 맞붙습니다. CCTV나 전화, 컴퓨터 등 모든 것을 통제하고 감청하는 CIA의 모습은 미국 내 자국에 대한 불신이 얼마나 커졌는가를 보여줍니다. 이를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장면은 바로 <본 슈프리머시> 후반부에서 본이 자신이 죽였던 타깃의 딸을 찾아가 용서를 구하는 장면입니다. 그 타깃은 러시아 하원의원이고, 타깃의 딸이 살고 있는 곳도 러시아입니다.

과거 냉전 시절 미국의 가장 큰 적이 러시아였던 것을 생각해보면 이 영화를 통해 감독이 과연 누구를 '적'으로 생각하고 있는지를 잘 나타내줍니다. 진짜 위험한 건 외부가 아닌 내부에 있다는 것이죠. 이러한 설정은 본 시리즈를 이끌어나가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며 극의 긴장감을 상승시킵니다. 그리고 이 내부의 적과의 본격적인 싸움을 그린 <본 얼티메이텀> 이후, 007은 본의 망령에 시달립니다. 실례로 007 22번째 작품인 <퀀텀 오브 솔러스>는 본 시리즈의 무술감독을 고용하면서 액션 면에서 많은 부분 본 시리즈를 차용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본드만의 매력을 잃고, 본의 아류가 되어버린 본드는 비평면에서 좋은 점수를 얻지 못하고 맙니다.
본 레거시의 주인공 아론 크로스 그는 과연 제이슨 본의 바톤을 제대로 물려 받은 것일까.

▲ 본 레거시의 주인공 아론 크로스 그는 과연 제이슨 본의 바톤을 제대로 물려 받은 것일까.


그리고 드디어 이 두 시리즈가 지난해 격돌하게 됩니다. 한달 간격으로 본 시리즈의 속편 <본 레거시>가, 007 시리즈의 23번째 작품인 <007 스카이폴>이 개봉하며 두 스파이 간의 대결이 펼쳐졌습니다. 결과는 우리 모두 알듯이 멋지게 돌아온 제임스 본드의 압승이었습니다.

이 싸움은 단순히 감독과 배우의 교체로 힘을 잃은 본 시리즈와, 50주년 기념으로 빵빵한 지원을 받은 본드의 싸움이라고 볼 순 없습니다. 물론 이러한 요소도 무시할순 없겠지만, 두 작품은 애초에 지향하고 있는 목적지가 너무나 다른 작품이기 때문이죠.먼저 본 레거시를 보면 이 작품은 기존 작품으로부터의 탈피와 혁신을 지향합니다.

워낙 대단했던 폴 그린그래스와 맷 데이먼의 조합보다 더 나은 것을 찾아내긴 분명 어려웠을 겁니다. 그렇기에 더더욱 "우린 너희들이 알던 본이 아니야, 우린 더 새롭지" 라는 것을 어필하는데 문제는 이게 너무 대놓고 눈에 보인다는 것입니다. 본이 우리에게 보여준건 세 편에 걸친 활약이 전부입니다. 그나마 그 중에서도 <본 아이덴티티>를 제외하고, 우리가 열광하는 것은 <본 슈프리머시>와 <본 얼티메이텀>에서 보여주었던 본의 모습이었죠. 내부의 적, 킬러와의 1대1 격투, 정신없는 카체이스 등, 본 시리즈만의 '전통'을 정립해왔고 또 우리는 이번 속편에서도 그것을 기대했는데, <본 레거시>는 새로운 것을을 보여주기 급급해서 기존의 팬들이 바라는 것들을 부숴버렸다는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계속해서 새로운 주인공인 아론에게 감정 이입을 할 수 있도록 아론이라는 캐릭터에 대한 이런저런 설명을 계속합니다. 하지만 작중 내내 본이 등장합니다. 본의 이름, 본의 사진. 하지만 이러한 본의 그림자는 본과 아론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어필하며, 관객들에게 본을 잊고 아론에게 몰입하는 포인트가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도 못한다는 것이죠. 확실히 약을 찾아 돌아다니는 주인공보다는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 동분서주하는 주인공이 관객들에게 있어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원래 본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궁금하게 만듦으로써 훨씬 더 많은 매력을 보여주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본을 잊고 다른 캐릭터의 이입하기엔 우린 본이 아직 궁금합니다. 23편이라는 긴 편수는 본드의 여러가지 모습을 보여주기 충분한 편수입니다. 23편 동안 본드는 젠틀함, 야수성, 냉철함, 로맨틱함, 서툼등등 많은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본이 세 편동안 보여준 건 아직 적고, 대다수의 관객들은 아직 본의 더 다양한 모습을 보길 원합니다. 이처럼 본이라는 캐릭터에 대해서 궁금해 함은 물론이고, 본이 <본 얼티메이텀> 마지막에 도망쳐서 어떻게 되었는지, 지금 잘 살고 있는지 플롯적인 궁금증도 충분합니다. 하지만 <본 레거시>는 기존 본 시리즈의 새로움을 조금 더 맛보고 싶어하는 찰나, 새로운 맛을 보여주려 노력하는 작품입니다. 이처럼 본 레거시는 결국 계속 새로운 것만 제시하다가 Moby의 Extreme ways를 울려버립니다. 마치 본 트릴로지와 아론 트릴로지 사이를 연결하는 예고편을 2시간으로 늘려놓은 것에 그쳐버리고 말죠.
<스카이폴>에서의 본드. 세월의 흐름은 곧 노련함이다.

▲ <스카이폴>에서의 본드. 세월의 흐름은 곧 노련함이다.


이와 반대로 007 23편인 스카이폴의 지향점은 클래식으로의 회귀입니다. 이미 50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활동한 본드는 대중들에게 있어 구시대적 캐릭터이며, 냉전시대에 탄생한 이 캐릭터가 대체 왜 지금까지 있어야 하는가라는 회의적인 시선에 시달리는 캐릭터입니다.

본드는 지금껏 이러한 비판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온갖 전술과 전략을 동원해온 캐릭터였구요. 그렇기에 스카이폴의 제작 소식이 들려 왔을 때 "과연 본드는 또 어떻게 변화해서 살아남을 것인가?" 라는 궁금증을 자아내게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스카이폴에서 본드는 정말 새로운 변화를 보여줍니다. 바로 클래식으로 변화하는 것이죠. 007 시리즈는 본과 다르게 길고 탄탄한 역사를 자랑합니다. 본드에겐 본드만의 확고한 전통이 있다는 것이죠.

때문에 지금껏 계속 새로움을 강조해왔던 본드가 클래식함을 무기로 들고 돌아왔을 때, 관객들은 오히려 새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동시에 이 작품에선 끊임없이 지금까지 본드가 존재해야하는 이유를 이야기합니다. 하루가 다르게 첨단화되는 시대에 왜 본드같이 발로 뛰는 인물이 존재해야 하는가를 말이죠. 그의 적인 실바가 컴퓨터 해킹을 통해 MI6를 공격하는 반면, 본드가 사용하는 첨단 무기는 총과 수신기가 전부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실바와의 결전에서 본드가 실바를 쓰러뜨리는 무기는 지문센서가 부착된 발터 PPK도, 강력한 화력의 첨단 병기도 아닙니다. 바로 구식 단도죠. 이처럼 <스카이폴>에선 많은 대사와 소품들이 지난 50년간 쌓아온 본드의 내공이 우습게 볼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아낌없이 상징해서 보여줍니다. 본이 갖지 못했지만 본드만이 갖고 있는것. 지난 해 벌어진 두 스파이 간의 싸움은 바로 이 전통이란 무기를 제대로 사용한 본드의 승리로 돌아가게 됩니다.

아직 두 첩보원이 보여줄 것은 많다. 다시 돌아올 그들을 기대하며, 두 시리즈의 장수를 빈다.

▲ 아직 두 첩보원이 보여줄 것은 많다. 다시 돌아올 그들을 기대하며, 두 시리즈의 장수를 빈다. ⓒ film school rejects


본이 호수에 빠져 더 깊은 심연속으로 헤엄쳐나가 자신의 존재를 숨긴것과는 반대로, 본드는 스카이폴 후반부에서 호수 심연으로부터 더 빛나는 물 밖을 향해 헤엄쳐나갑니다. 부활이 취미라는 본드의 말처럼, 스카이폴에서 본드는 끊임없이 부활합니다. 그리고 이 스카이폴이라는 작품 자체로, 본드는 멋지게 부활해 대중들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물론 언젠가 본드는 또 다시 노쇠하고 지칠 것 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스카이폴 역시도 본드의 전통 중 하나가 되어 본드의 부활에 또다른 신호탄이 될 것임을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안타까웠던 본의 재기도 다시금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요? 전통이란 것은 그만큼 오랫동안 시리즈가 이어져야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리즈의 장수를 가능케하는 것은 바로 탄탄한 팬덤입니다. 전통이 팬을 만드는 것이 아닌, 팬이 전통을 만드는 것이죠. 비록 본이 사라진 본 시리즈에 대한 실망감이 클지라도, 본 시리즈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기대가 있다면 충분히 본 역시도 멋지게 부활할것이라 기대해봅니다. 두 첩보물의 향후 귀추를 기다리며 마무리하겠습니다.  

제임스 본드 007 제이슨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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