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의! 이 글에는 영화 <독전>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 <독전> 포스터

영화 <독전> 포스터 ⓒ (주)NEW


영화 <독전>이 개봉 31일 현재 누적 관객 수 250만 명을 돌파, 흥행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독전>은 두기봉 감독의 2013년 홍콩영화 <마약전쟁>을 리메이크한 작품으로, 마약 제조 공장에서 발생한 의문의 폭발 사고 후, 오랜 기간 마약 조직을 추적해 온 형사 원호(조진웅)가 유일한 생존자인 락(류준열)과 손을 잡으며 거대 마약 조직 보스 이선생을 추적하는 내용의 누아르이다.

그간 한국 영화사에서 누아르 장르는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다. 하지만 페미니즘 물결이 날로 거세지며 예민해진 젠더 감수성에 대응이라도 하듯 <독전>은 초기 대본 작업 당시 남성이었던 캐릭터에 김성령을 캐스팅하고 주연으로 앞세워 화제를 낳기도 했다. 그렇다면 <독전>은 한국 누아르계 새로운 지표를 열었다고 할 수 있을까.

수정, 연옥... 오히려 도구로 쓰인 여성 캐릭터

원호가 오랜 기간 마약 조직을 추적해 온 것이 인물의 전사이긴 하지만, 그가 이선생을 본격적으로 체포하겠다고 다짐하는 계기는 수정(금새록)의 죽음으로부터다. 수정은 마약 복용으로 인해 한때 소년원에 복역했던 소녀로, 원호가 그녀를 "조카 같은 아이"라고 표현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둘 사이가 꽤 각별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수정은 영화가 시작한 지 10분도 채 되지 않아 살해당한다. 수정이라는 인물이 원호가 이선생을 쫓기 위한 자극제 역할에 지나지 않게 쓰인 것으로 보일 여지가 있다.

여성이 도구로 쓰였다는 점 외에 스토리 전체를 놓고 보더라도 수정의 짧은 분량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영화는 원호와 수정이 어떻게 각별한 사이가 되었는지 한 신도 보여주지 않는다.

 영화 <독전>의 한 장면

영화 <독전>의 한 장면 ⓒ (주)NEW


오연옥(김성령)은 초기 각색 당시 원래 '오연학'이라는 남성 캐릭터였지만, 이해영 감독이 그 자리에 김성령을 캐스팅하며 탄생한 인물이다. 실제로 김성령은 남성 배우들 사이에서 당당히 포스터의 자리를 차지했고 제작보고회와 무대인사 등 다양한 영화 관련 행사에 참여하며, <독전>의 주연 자리에 매김한 것 같았다.

하지만 거기에만 의의를 둬야 했던 걸까. 그녀도 극이 제대로 시작도 하기 전에 스크린에서 사라진다. 이는 많은 대중의 반발을 샀다. 애초에 오연옥의 분량이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것이었다면, 그녀를 셀링 포인트로 삼은 것은 소비자를 기만하는 것이었다는 지적도 많았다.

실제로 그녀의 분량은 여타 조연들과 비교해도 적은, 고작 5분 남짓이다. 그녀를 '주연'이라고 말하는 데 어폐가 있어 보이는 이유다. 주연만 중요하고 조연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흔히 마케팅에 있어 진두에 나서는 배우들을 주연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경험에 의해 쌓아 올린 관습적 사고이다. 오연옥이 서사의 중심에 있지 않음에도 마케팅 할 때는 그녀가 마치 주연인 것처럼 보이게 만든 것은 문제일 수 있다.

또 하나의 문제점은 오연학을 오연옥으로 수정한 것을 과연 '새로운 시도'라고 볼 수 있냐는 점이다. 스크린을 찢듯 나타난 오연옥은 등장부터 몹시 임팩트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명실상부 처음으로 사건을 진행시키는 역이다. 하지만 그녀는 말 그대로 '사건만 진행시키고' 스크린에서 퇴장당한다. 결국 사건을 촉발하는 '도구' 역할에 지나지 않는 배역에 성별을 바꾸면서까지 여자 배우를 캐스팅한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오연옥을 다채롭게 활용하지 못한 점은 상영시간 내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강렬한 여성을 표현하는 방식은 오로지 노출?

<독전>에는 임팩트 있는 또 다른 여성 캐릭터가 등장한다. 바로 보령(진서연). 그녀는 아시아 마약시장 최대 거물 진하림(김주혁)의 아내이며 '센 여성'으로 표현돼 원호와 락을 당황시키기도 하는 등 남성 캐릭터에 견주어도 전혀 뒤지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그녀가 마약에 취한 연기는 그야말로 압권이다.

 영화 <독전>의 한 장면

영화 <독전>의 한 장면 ⓒ (주)NEW


허나, 그 방식은 관객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 만다. 보령은 자신이 강한 여성임을 어필하기 위해 짧은 길이의 스커트를 입고 보란 듯이 다리를 벌려 앉고, 상의 목 부분을 늘어뜨려 가슴을 노출한다. 의상 또한 문제적이다. 그녀가 착용하는 의상은 가슴 부분이 깊게 파인 상의와 짧고 타이트한 스커트인데, 이는 원작 <마약전쟁>에서 보령 캐릭터가 털코트, 정장 스커트 등 평범한 의상을 입었던 것에 비하면 불필요한 노출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간 한국 누아르 영화에서 '센 여성'은 대부분 자신의 신체를 노출하는 방식으로 강함을 표현했다. <범죄와의 전쟁>의 여사장, <타짜>의 정마담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로부터 약 10년이 흘렀지만 <독전>의 보령은 똑같은 방식에 머물렀다. 시대는 변했는데 왜 스크린 속 강한 여성은 천편일률적으로 야하게 표현되어야만 할까. 원작 <마약전쟁>에서 보령 캐릭터가 유교적인 여성상으로 그려지는 데 반해, <독전>에서 그녀의 캐릭터에 변화를 꾀한 것은 실로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그 방식이 새롭지 않았다는 점에는 적지 않은 아쉬움이 남는다.

소연(강승현)은 원호의 부하 형사로, 다른 부하 형사들에 비해 극 중에서 자주 다뤄지는 것은 맞다. 때문에 분명 그녀는 원호를 제외한 형사들 중 관객들 기억에 가장 깊이 남는 형사일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보령으로 위장하는 것 외에 더 이상 무언가를 하던가.

영화가 클라이맥스에 달했을 때 마약조직의 경호원들과 형사 무리는 격투를 벌인다. 원호가 남자 경호원들과 맞붙는 동안 소연은 그 뒤쪽에서 여자 경호원들과 싸운다. 다시 말해 액션 신은 남-남, 여-여의 구도를 따른다. 이는 소연에게 '경찰'이라는 직업적 정체성은 지워 버리고, '여자'라는 성적 정체성만을 남긴 장면처럼 보인다.

'탈 코르셋'은 실현했지만... 여성 혼자로는 불완전한 존재?

 영화 <독전> 스틸 컷.

영화 <독전> 스틸 컷. ⓒ (주)NEW


마약 제조 기술자인 청각장애 남매 중 동생 주영(이주영)은 짧은 숏컷머리, 헐렁한 티셔츠, 5부 바지, 슬리퍼 차림으로 등장한다. 이는 우리가 흔히 아는 대부분의 여성성이 지워진 캐릭터다. 외형에서 여자 배우들에게 강요되었던 긴 머리, 화장한 얼굴, 타이트한 옷차림, 높은 하이힐을 고수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탈 코르셋'(사회가 여성에게 강요하는 외모 꾸미기 압박에서 벗어나려는 운동을 가리키는 신조어)을 실현한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주영이 독특한 캐릭터였음에도 활용 면에서 소극적이었단 점에서 관객들의 아쉬움을 자아낸다.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독전>은 다양한 여성 캐릭터를 썼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이는 한국사회에서 누아르 영화가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던 점에 비춰보면 상당한 시도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첫 발에 너무 큰 기대를 한 걸까. <독전>의 시도는 의미 있었지만, 그 방식에는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 앞으로는 <독전>을 계기로 한국 누아르 영화에서도 남성만큼이나 매력 있는 여성 캐릭터를 더욱 많이 볼 수 있기를 바라본다.

영화 독전 페미니즘 김성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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