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웃 런>(2016) 포스터

영화 <아웃 런>(2016) 포스터 ⓒ Persistent Visions


작년에 나는 퀴어 퍼레이드에 참석했다. 비가 정말 많이 오는 날이었고, 궂은 날씨에도 정말 많은 사람들이 시청 광장에 모였다. 자유와 해방의 기운이 광장을 감쌌고, 각자의 존재 화이팅을 연호하듯 축제에 참여한 사람들의 얼굴에는 슬픔이 파고들 구석이 없었다. 말 그대로 축제 현장이었고, 어느 축제보다도 강력한 삶의 기운을 느꼈다.

다큐멘터리 영화 <아웃 런>은 성 소수자 정당 래드래드당이 의석수를 차지하기 위해 벌이는 선거운동기이다. 트렌스젠더 리더를 포함한 3명의 후보자들은 필리핀에서 최초의 성 소수자 국회의원이 되기를 희망한다. 소수 집단의 의석을 보장해주기 위해 생긴 정당명부제를 통해 그들은 선거 운동 기간 동안 후보 자신과 자신의 정당의 정체성을 알리면서, 일정 득표수를 확보해 국회 입성을 꿈꾼다.

그들이 정당을 갖추고, 국회의원이 되고자 하는 까닭은 필리핀 내에 성 소수자에 대한 위상과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현재 필리핀에서는 성 소수자들의 사회 활동을 지극히 제한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미용사나 연예인을 하거나 미인 대회에 출전하는 성소수자들에게는 관대하지만, 그 경계를 넘어가면 낙인을 찍고서 곱지 않은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본다.

차별 폐지를 위한 정당, 비록 의석 확보에는 실패했지만

래드래드당은 단순한 관용을 넘어서 진정한 포용을 갖춘 사회를 원한다. 필리핀에서 살고 있는 대부분의 성 소수자들은 자금 지원도 받지 못하고 모든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직업의 기회조차 박탈 당해 가난을 면치 못한다. 래드래드당의 가장 중요한 선거 메시지는 차별폐지법(한국의 차별금지법과 유사) 제정이다. 존재를 위협 받지 않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법인 차별폐지법을 직접 국회에 들어가서 당사자인 자신들의 손으로 만들고자 한다.

그렇지만 선거 운동은 녹록지 않다. 선거 3개월 전부터 선거일까지 다큐멘터리는 시간적 추이로 그들의 선거 운동을 조망한다. 많은 사람들이 선거 기간 동안 고까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심지어는 직접 유세 현장에서 어깃장을 놓거나 방해하는 세력도 존재한다. 가톨릭이 국교인 필리핀에서 그들의 존재는 포용의 대상이 아니라 교정의 대상이다. 또한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그들의 선거 활동을 지켜보는 사람들도 존재하지만, 선거 후보로서가 아니라 단순 호기심과 유희 거리로서만 그들을 소비한다.

갖은 방해 공작과 조소에도 래드래드당 선거 후보, 함께 유세하는 사람들은 별로 괘념치 않는다. 자신들이 이미 예상했던 일이라는 듯 가볍게 웃어넘긴다. 혹은 혐오하는 사람들에게 더 짓궂은 방식으로 농담을 건네며 상황을 역전시키는 모습도 자주 빚어진다. 선거 승리라는 중차대한 일 앞에서도, 운동 상황에서 벌어지는 돌발적인 핍박과 경멸에도 유머와 흥겨움이 그들의 선거 운동에서 커다랗게 존재한다. 친구들이 많이 있는 미용실을 선거 본부로 삼아 지지를 호소하고, 또 진흙 레슬링 같은 새로운 선거 운동 전략을 짜기도 하고, 급기야 불특정 다수의 혐오 세력들을 자신들의 흥겨운 선거 운동으로 초대하면서 함께 어울린다. 사랑이 혐오를 이긴다는 말을 온몸으로 실천하는 모습이다.

마침내 선거일, 흥겨웠던 선거 운동의 결과는 실패한다. 실질적으로 1석이라도 노렸던 래드래드당이었지만, 아쉽게도 유권자의 선택을 받지 못한다. 하지만 그들의 실패를 과연 실패라고 할 수 있을까? 선거 운동을 통해 자신들의 존재를 알렸고, 차별을 폐지하자는 목소리가 필리핀 전역으로 울렸다. 그들과 그들의 존재, 그들의 선거 운동은 정당했고 새로웠다. 한 번의 선거로 그들은 위축될리 없고, 다음 선거를 준비할 것이고, 선거가 열리지 않는 기간에도 그들의 삶에서 생생한 목소리를 주변에 이야기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을 것이다.

일말의 가능성을 위해... 한국의 래드래드 당은?

다시, 한국을 떠올린다. 차별 금지를 포함했던 충남인권조례가 다수라는 패권으로 폐지되고, 방송에 멀쩡히 출연했던 한 사람이 단지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출연하지 못하게 되었다. 군 기강 차원이라는 어설픈 이유를 들면서 군대 내 동성애를 금지하고 심지어는 동성애자를 색출하기까지 하고 있다. 차별이 권리가 된 국가에서 관용을 넘어서 포용을 이야기하자는 래드래드당의 주장이 통용될 수 있을까?

그리고 실제로 한국은 정당을 설립하기 어려운 구조다. 5개 이상의 시·도당을 가져야 하며, 시·도당은 1천인 이상의 당원을 확보해야 한다. 즉 5개 시, 도당을 합쳐서 5천 명 이상의 당원이 있어야 정당 설립 요건을 갖춘다. 비례대표제를 통해 의석수를 확보할 수 있지만, 정당을 결성해서 도전하는 일은 실로 어렵다. 그나마 진보 정당의 비례대표 순서를 받아서 자신의 목소리를 확보할 수 있겠지만, 아주 제한적인 방식일 뿐이다. 소수자의 당사자성을 다수확보한 정당을 보는 일은 지금의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

그렇지만 불가능한 세계에서 가능성을 타진해야 한다. 부조리한 시스템과 폭력적인 말들이 시대를 휘감고 있지만, 희망을 길어 올리는 일은 게을리 여겨서는 안 된다. 우리는 보다 많은 말을 이어가야 할 것이고, 배제를 원리로 하는 제도의 미흡함을 보완하고 많은 사람들이 포용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나가야 한다. 지금의 시대에서 소수자, 아니 우리의 이야기는 수면 위로 올랐고, 그것을 두려워하는 세력들이 혐오를 양산하고 있을 뿐이다. 강한 자인 척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지만, 실은 자신들의 권위를 놓칠까봐 짓는 겁이 잔뜩 든 표정일 뿐이다. 곧 한국에서도 래드래드당을 볼 수 있을 것이고, 봐야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2016년 EBS 국제다큐영화제(EIDF)의 상영작이었고, 현재는 인터넷 스트리밍 서비스 왓챠플레이에서 볼 수 있다.
필리핀 성소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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