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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밥과 생수를 나를 오토바이들. 번호판에는 '이명박이 배후다' '고시철회' 등의 문구가 적힌 플래카드가 붙여져 있다.
 김밥과 생수를 나를 오토바이들. 번호판에는 '이명박이 배후다' '고시철회' 등의 문구가 적힌 플래카드가 붙여져 있다.
ⓒ 이주현/김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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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0일 저녁 8시. 광화문 동화면세점 왼편 주차장 바닥에 박군(닉네임. 31)이 쓰러져 있다. 갑자기 찾아온 허리통증 때문에 박군은 움직일 수 없었다. 옆에 있던 친구들은 휴대폰을 들어 이리저리 연락을 돌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구급차를 부를 수도 택시를 부를 수도 없었다. 광화문과 시청 일대는 촛불을 든 시민들로 가득 메워져 있어 제 속도로 걷기도 힘든 상황이다.

겨우 SBS 취재차량에 올라타 병원에 가게 된 박군. 두 시간쯤 뒤 멀쩡한 모습으로 돌아와 "간호사가 너무 예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는 농담을 던졌다. 진통제를 맞고 통증이 잦아지자 다시 친구들 곁으로 돌아온 것이다.

박군은 커뮤니티 웹사이트인 디시 인사이드(DC Inside)의 '라이더스 갤러리' 회원이다. 오토바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만든 공간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라갤러'(라이더스 갤러리에서 활동하는 사람들)라고 부른다. 박군 역시 열혈 라갤러답게 세 대의 오토바이를 가지고 있다.

"50cc, 100cc, 1200cc 이렇게 세 대가 있는데 짐 실을 땐 스쿠터가 짱이죠."

스쿠터를 몰고나온 그는 오늘 김밥과 생수를 나르는 임무를 맡았다. 동화 면세점 주차장에는 10여대의 오토바이가 줄맞춰 주차되어 있다. 라갤러들은 이날 김밥 9000줄, 생수 9000병, 초코파이와 초코바 4500개를 날라야 했다. 지난 주말엔 김밥 6000줄과 생수 5000병을 운반했다.

촛불 집회에 참석하는 시민들이 배고프지 않도록 김밥과 생수를 나눠주자는 생각을 처음 한 사람은 디시 '음식(기타) 갤러리'의 한 회원이었다. 무거운 김밥 박스와 생수통을 걸어서 옮기기 힘들어 라갤러들에게 '운반 봉사'를 요청했고, 박군을 비롯한 몇몇 라갤러들이 흔쾌히 참여하게 되었다.

'무적의 김밥부대'로 음식(기타) 갤러리는 이미 인터넷 상에서 유명하다. 음식(기타) 갤러리 게시판에는 김밥 고맙게 잘 먹었다는 내용의 글과 리플이 하루에도 수백개씩 달린다.

반면 라이더스 갤러리는 조용하다. '김밥' '촛불' '시위'로 게시판에서 글을 검색하면 고작 대 여섯 개의 글만이 뜰 뿐이다. 그것도 직접 김밥을 운반했던 회원들이 쓴 후기형식의 글들이 대부분이다. 게시판에선 그 어떤 정치적 목적의 글도 찾아볼 수 없다.

"시민과 의경 모두 고생하는 게 안쓰러워서 김밥 나를 뿐"

라이더스 갤러리의 박군
 라이더스 갤러리의 박군
ⓒ 이주현/김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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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제가 주동자죠."

박군은 자신이 라갤러들을 김밥 봉사에 불러 모은 주동자라고 말했다. 3개월 뒤면 미국에서 건축·도시공학 박사과정을 밟게 된다는 그는 이날이 다섯 번째 김밥 봉사 참여라고 했다. 대학 총학생회 활동을 했고, 3년째 민주노동당 당원으로 지지를 보내기도 했다는데 촛불을 들지 않고 스쿠터로 김밥 배달만 하는 것이 의아했다.

"제가 의경 출신이거든요. 그 때 시위대가 던진 화염병에 맞아서 얼굴이 녹아내린 친구도 옆에서 봤어요. 시위대를 막아야하는 입장에서 '우리는 죄도 없는데'라는 생각도 많이 했어요. 의경은 먼저 도발하지 않으면 때리지 않거든요. 저도 많이 때렸고 많이 맞았어요."

그는 시민들의 폭력적 행동을 부담스러워했다.

"물론 시민들의 입장도 이해는 해요. 그런데 촛불만 들었으면 좋겠어요. 평화적으로..."

경찰이 물대포를 동원한 것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무서웠어요. 의경 생활하면서 최루탄 총이랑 가스차는 봤는데 물대포는 처음이었어요. 겁나던데요."

스스로 '주동자'라고 말은 했지만 친구들은 그가 이런 일을 하는지 모른다고 했다. "라갤에도 욕먹을까봐 이런 글(김밥 봉사) 안 써요. 오토바이로 만나는 사람들인데 굳이 정치 얘기할 필요도 없고…. 그저 시민과 의경 모두 고생하는 게 안쓰러워서 힘내시라고 김밥을 나를 뿐이에요. 음식(기타) 갤러리 사람들에게 도와준다고 약속한 것도 있고..."

집결시간 7시가 가까워졌다. 박군과 얘기를 나누는 동안 오토바이를 몰고 사람들이 하나 둘 동화면세점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아직 해는 지지 않았지만 시민들은 촛불을 밝히기 시작했다. 박군이 자신과 띠 동갑이라며 한 친구를 불러 소개시켜준다.

"얘가 열아홉이에요. 저랑 띠 동갑이죠."

한 시간 자고 출근... 퇴근하면 또 김밥 봉사하러

동화면세점 옆 주차장. 라이더스 갤러리와 음식(기타) 갤러리 회원들이 김밥과 생수를 실은 차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동화면세점 옆 주차장. 라이더스 갤러리와 음식(기타) 갤러리 회원들이 김밥과 생수를 실은 차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 이주현/김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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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스(Bass. 닉네임. 19) 역시 이날이 다섯번째 김밥 봉사 참여다. 학생일 거라 생각했는데 사업을 하고 있단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자퇴했어요. 미용고등학교에 다녔는데 학비가 너무 비쌌어요. 3달에 280만원이었거든요. 학교 그만두고 무작정 대전에 가서 일하다가 지금은 아버지 일 도와서 건설업 쪽에서 일하고 있어요."

이날도 일을 마치고 이 곳에 왔다. 힘들지 않으냐고 물으니 살짝 웃으며 힘들다고 답한다.

"5일 동안 잠을 4시간 잤어요. 저녁 7시에 시위하는데 오면 새벽 5~6시에 집에 가요. 그러면 한 시간 자고 출근해요. 낮에 일하고 저녁 6시 되면 퇴근해서 또 시위하는 데 나오고…."

앞으로도 시위가 있으면 두세번은 더 나올 것이라고 한다. 잠잘 시간도 부족한데 왜 거리에 나오는 걸까?

"시위하는 사람들 도와주고 싶어서요."

그가 처음 오토바이를 탄 것은 중학교 3학년 때였다. 그때 담배도 배웠다.

"중학교 2학년 때까지는 공부를 좀 했어요. 3학년 때부터 '삐딱선'을 타게 됐죠."

그 때의 행동을 후회하지는 않는다고 덧붙여 말한다. 작년에는 오토바이를 타다가 앞서 가는 자동차와 충돌해 아킬레스건이 잘려 수술을 받았다. 전치 1년이 나올 만큼 대형 사고였다. 6개월 정도 재활 훈련을 받아 다시 오토바이를 탈 수 있게 됐다.

대화 내내 목소리를 높이는 일도 없고, 크게 주장하는 법도 없었지만 그는 자기 생각을 솔직하게 말하는 사람이었다. 또 자기 확신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놀고 싶은데 일해야 할 때가 싫고, 거리에서 술 먹고 주정하는 시위대들이 보기 싫다고 했다. 김밥 나르는데 '오토바이가 왜 다니냐'며 협조 안 해주는 사람들 만나면 서럽고, FTA도 미국 쇠고기 수입도 대운하도 모두 마음에 안 든다고 했다.

올해 나이 열아홉인 라이더스 갤러리의 막내 베이스
 올해 나이 열아홉인 라이더스 갤러리의 막내 베이스
ⓒ 이주현/김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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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8시가 조금 넘자 음식(기타) 갤러리에서 김밥과 물을 나눠줄 준비에 들어갔다. 라갤러들도 각자의 오토바이에 김밥 박스와 물을 싣는다.

이날 유민규(21. 대학생)씨는 오토바이가 지나갈 수 있게 길을 트는 일을 맡았다.

"3번 정도 혼자서 촛불 집회에 참석했어요. 라갤러로 김밥 봉사하는 건 오늘이 네 번째인데 이렇게 한발 뒤로 물러서서 시위 현장을 바라보니까 조금 무섭다는 생각도 들어요. 왜, 무엇 때문에 이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왔는지…."

촛불 집회 자체만 열 번이 넘게 참여했다는 그를 친구들은 극성이라고 한단다.

"촛불 집회에 관심 없는 친구들도 많아요. 자기 살기 바쁘니까요. 저도 앞으로의 진로나 미래에 대해 걱정은 많아요. 전공인 회계학도 적성에 안 맞는 것 같고…. 커서 뭐 먹고 사나 싶은데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고 싶어요."

9시, 시민들의 촛불 평화행진이 시작되자 음식(기타) 갤러리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김밥을 나눠주기 시작했다. 2인 1조로 꾸려진 회원들은 재빠르게 시민들 사이로 들어가 "김밥 받아가세요"를 외쳤다. 생수 40병과 김밥 한 박스는 3분도 채 되지 않아 동이 났다.

의미 없는 글, 의미 없는 리플 달지만 그게 위로와 위안

저녁 8시쯤 라이더스 갤러리 회원들이 김밥과 생수를 나르고 있다.
 저녁 8시쯤 라이더스 갤러리 회원들이 김밥과 생수를 나르고 있다.
ⓒ 이주현/김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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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기타) 갤러리 회원들이 김밥을 나눠주는 동안 라갤러들은 동화 면세점 주차장에서 쉬고 있었다. 새벽에 있을 2차 김밥 운반 때까지 자유시간이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쉬고 있는 라갤러들 중에 여성 라이더에게 말을 건넸다. 이은비(23. 디자이너)씨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특별한 계기로 김밥 봉사에 참여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다 그런 것 같아요. 나와 봐야 할 것 같았고,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 정부가 시민들을 삐치게 만들었잖아요."

시위 참석도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미선이 효순이 때도 시위에 참여했어요. 근데 시위를 해도 변하는 게 없더라고요. 그래서 어린 마음에 실망감이 컸죠. 시위 같은 거 안 하겠다고 마음도 먹었어요. 그런데 지금 이 열기는 식을 줄 모르는 것 같아요. 이대로라면 뭔가 변할 지도 모르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이씨와 인터뷰하는 동안 주위에 라갤러 친구들이 모여 이씨에게 장난을 친다. 아무래도 홍일점이라 관심이 집중되는 것 같다.

"라이더스 갤러리에 가면 편해요. 예의나 체면 안 차려도 되고. 가벼워서 쉽게 참여할 수 있고..."

디시 갤러리 특유의 자유분방함과 가벼움을 이씨는 즐기고 있었다. "별 의미 없는 글을 쓰고, 별 의미 없는 리플을 다는 사람들이 모여서 노는 데 그게 재미있다"고 옆에 있던 유민규씨도 거든다. 아무 영양가는 없지만 사람들과 얘기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고 위안이 되는 모양이다. 이씨가 말을 잇는다.

"외로운 사람들이 모이는 곳 같아요. 디시 갤러리는…. 외로워서 관심받고 싶어서 모이는 거죠."

10시를 넘긴 시각. 시위대는 청와대로 향하고 있었다. 라갤러들은 야참을 먹으러 갈 태세다. 새벽에 김밥 운반을 하기 위해서는 체력을 비축해둬야 한다. 그들은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고 뿔뿔이 흩어질 준비를 하고 있다. 하지만 금세 모일 것이다. 지향하는 바는 다르지만 마음이 시키는 대로 달리다보면 언젠가는, 어느 지점에서는 만나게 될 것이다. 진통제를 맞고도 아무렇지 않게, 5일 동안 잠을 4시간만 자면서도 아무 일 없다는 듯 모이는 이들이 아닌가.

라이더스 갤러리 회원들은 그렇게 6월 10일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시위도 아닌, 그렇다고 놀이도 아닌, 지금 이 순간의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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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촛불집회, #디시 인사이드, #라이더스 갤러리, #김밥 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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