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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교육을 위한 전국학부모회, 전국교직원 노동조합 서울지부 회원,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28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인창고등학교 앞에서 서울시교육청이 진행하고 있는 우편향 의식화교육 역사왜곡 특강 중단을 요구하고 있다.
 참교육을 위한 전국학부모회, 전국교직원 노동조합 서울지부 회원,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28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인창고등학교 앞에서 서울시교육청이 진행하고 있는 우편향 의식화교육 역사왜곡 특강 중단을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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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정부나 서울시교육청이 우편향 인사들을 대거 동원, 각 고등학교에 '투입'한 이유가 '학생 의식화'를 위한 것이었다면 이 사업은 큰 효과는 없었던 것 같다. 28일 오전 보수우파의 좌장격인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의 특강이 있었던 서울 서대문구 인창고등학교를 취재하고 내린 결론이다.

안 교수는 오늘 정문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참교육학부모회 서울지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회원들이 아침부터 인창고등학교 정문과 옆문에서 안 교수의 특강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우익 논리 강요하는 역사특강 중단하라' '학교 자율 말살하는 교육청 특강 반대한다' '청소년 우습게 보는 교육청 규탄한다'는 피켓을 들었다. 정신대 피해 할머니들은 다른 회원들보다 훨씬 큰 목소리로 구호를 외쳤다. 안 교수의 "위안부 강제 동원 역사적 자료 없다"는 발언이 아직도 생생하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안 교수가 옆문을 통해 들어갔다는 얘기를 듣고는 안 교수가 강의하고 있던 2층 세미나실로 몰려와 "인창고등학교가 이럴 수 있느냐" "강의를 들어보겠다" "역사를 바로 가르칠 책임이 있지 않느냐"고 항의했고, 이를 막는 교감 등 학교 관계자들과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

보수좌장 안병직 교수에도 아랑곳 않는 고딩

보수 성향 인사들로 서울시교육청이 진행하고 있는 '현대사 특강' 둘째날인 28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인창고등학교에서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가 '한국현대정치경제사'를 주제로 강연을 하고 있다.
 보수 성향 인사들로 서울시교육청이 진행하고 있는 '현대사 특강' 둘째날인 28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인창고등학교에서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가 '한국현대정치경제사'를 주제로 강연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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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교수는 오늘 '대한민국 건국 60년의 정치경제사'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기념교양강좌 녹취록'이라고 쓰인 유인물을 나눠주기도 했지만 오늘 특강을 위해 새로 만들어진 교재는 아니었다. 특강에는 3학년 1반~4반 학생 100여 명이 '동원됐다'.

안 교수는 강의를 재밌게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목소리 톤도 일정했다. 마이크를 이용했으나 세미나실 뒤쪽까지 소리가 잘 전달되지 않았다. 영상자료도 전무했고 나눠준 유인물은 여백도 거의 없이 앞뒤로 16페이지에 달해 고등학교 아이들의 관심을 끌기는 어려웠다. 가끔 "어이 학생~ 영국 시민혁명이 언제야?" "학생~독일에서 민주주의 혁명 있었다는 말 들어봤어?" 등으로 기습 질문을 던졌으나 학생들은 적극적으로 답하지 않았다.

일부는 꾸벅꾸벅 졸았으며 또 일부는 현란한 손놀림으로 게임을 즐겼고 또 일부는 일찍 퇴장한 뒤 창문을 통해 다른 친구들을 꼬셔 내기도 하는 등 '고딩 교실다운' 분위기가 내내 이어졌다.

[안병직 교수] 냉랭한 반응에도 내재적 발전론과 '캐치업' 열강

안 교수의 강연 내용 중 '뉴스'가 될 만 한 것은 없었다. 말로 옮기지는 않았지만 유인물에 적혀있는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민족해방투쟁을 강조하느냐 프롤레타리아혁명을 강조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 모두 공산주의 혁명이 궁극적 목표"라고 주장한 것이 가장 눈에 띌 정도였다.

안 교수는 세계 자본주의 역사를 설명하는 한편, '내재적 발전론'과 이른바 '캐치 업' 이론을 설명하는 데 시간을 많이 할애했다. 선진국과 손잡아 국가의 발전을 꾀해야 한다는 '캐치 업'의 중요성과 함께 그는 줄곧 '선진화' 개념을 강조했다. 안 교수에 따르면 내재적 발전을 꾀한 모택동은 실패했고 이른바 개방 개혁 정책으로 다른 나라들과 손을 잡은 등소평은 성공한 모델이었다.

안 교수는 학생들에게 두 차례 "난 보수쪽 입장에서 말하지만 이를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지만 "한국 진보 계층 사람들은 근대화의 산물이어서 한국을 아주 소중한 국가로 생각해야 하는데 이 사람들은 모두 대한민국은 실패한 역사다 이렇게 인식하고 있다"면서 진보세력을 비판했다. "김정일하고 손잡고 새 세상 만들어보자는 사람들이 있는데 과연 어떤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겠냐"고 묻기도 했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호평도 이어졌다.

보수 성향 인사들로 서울시교육청이 진행하고 있는 '현대사 특강' 둘째날인 28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인창고등학교에서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가 '한국현대정치경제사'를 주제로 강연을 하고 있다.
 보수 성향 인사들로 서울시교육청이 진행하고 있는 '현대사 특강' 둘째날인 28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인창고등학교에서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가 '한국현대정치경제사'를 주제로 강연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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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그 탄생으로부터 미국의 강력한 영향 하에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서구의 자본주의 문명권에 속하게 됐다. 그리고 한국은 건국으로부터 미국에서 장기간 체류하면서 서구 문명을 충분히 흡수한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모셨기 때문에 폐허 속에서도 근대 시민국가에 합당한 제도적 정비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해방 시점 한국에서는 사회주의와 국가주의적 요구가 매우 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국 헌법의 기본 골격은 자유민주주의로 되어 있었다. 정치적으로 자유민주주의요 경제적으로는 시장경제였다. 정치 경제 체제가 이렇게 선택된 것은 한국이 그 속에 속했던 서구문명을 충분히 흡수했던 이승만 대통령의 역할이 크다."

안 교수는 또 "이런 대한민국 건국에 대해 그것이 분단을 고착화하고 대외의존적이었으며 겉으로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라면서 실제로는 권위주의적 정치제제였다는 비판이 많았다"면서 "하지만 이런 결함들은 당시 시대 사정상 불가피할 것들이었다"고 감쌌다.

안 교수는 "현재 민주화 세력이 그들의 역사적 성취를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체제 밖에서 이루려고 하기 때문에 그들 스스로에게 뿐만 아니라 국민 모두에게 막대한 혼란을 초래하고 있다"면서 "민주화 세력이 하루 빨리 자기의 역사적 위치를 찾는 날에 대한민국 선진화는 달성된다"고 말했다.

[현직 교사] "안병직 교수님, 우경화되셨네요" 

안 교수 강의는 길지 않았다. 오전 9시 41분부터 10시 42분까지 정확히 1시간이었다. 강의가 끝나자 인창고등학교에서 한국 근현대사를 가르치는 조현옥 교사가 질문을 했다. 조 교사는 안 교수의 대학원 강의를 들은 제자라고 했다.

- 예전에 교수님의 대학원 강의를 들었습니다. <한국경제사>를 들었습니다. (안 교수:고맙습니다) 그때 교수님께서 말씀해 주셨던 경제학 이론과 비교하면 많이 우경화됐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안교수:그렇습니다) 학자의 생각이 갑자기 바뀐다는 것은 어려운 일인데 전향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또한 북한 경제가 이노베이션에 실패하면서 세계사의 낙오자가 되고 있고 아사자도 나오고 있는데, 자살자는 대한민국이 더 많지 않습니까. 이런 점에서 보면 성공과 실패라는 관점을 경제 발전에만 초점을 맞출 수 있는지, 어느 체제가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1985년까지는 한국에서 대표적인 진보지식인이었습니다. 내재적 발전을 해야 한다, 외국하고 손잡으면 식민지나 되지 미래가 없다 이렇게 생각했어요. 1985년데 동경대 가서 공부하면서 북한에서 온 사람, 조총련, 소련에서 온 사람을 다 만났습니다. 사회주의가 희망이 없었어요. 모두 붕괴됐죠. 그래서 든 생각이 대한민국 유일한 희망은 '캐치 업' 뿐이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입장을 전환했죠. 난 적당히 변명하지 않고, 딱 칼로 잘랐어요. 지금부터 반대로 가겠다.

북한은 지금 김정일이가 기아를 강요하고 있지요. 이 점 때문에 북한 반대운동을 하고 있습니다만. 한국은 행복하냐? 또 그렇게는 얘기할 수 없습니다. 나름대로의 여러 가지 괴로움은 다 있지요. 가장 선진적이라는 스웨덴의 자살률이 한때 가장 높았지요. 지도를 잘해서 없애야 하겠지요. 그래도 이건 선진국병입니다. 그런데 북한 아사는 정말 야만적인 거 아니에요? 야만을 먼저 고쳐야지요."

보수 성향 인사들로 서울시교육청이 진행하고 있는 '현대사 특강' 둘째날인 28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인창고등학교에서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가 '한국현대정치경제사'를 주제로 강연을 하고 있다.
 보수 성향 인사들로 서울시교육청이 진행하고 있는 '현대사 특강' 둘째날인 28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인창고등학교에서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가 '한국현대정치경제사'를 주제로 강연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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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강이 끝났다. 안 교수가 인사를 하고 나가자 대부분 학생들은 기지개를 켰다. 안 교수에게 질문했던 조 교사에게 가서 특강을 들은 소감을 물었다.

"관점이나 시각을 떠나서 일단 근거있는 주장이니 들을 만했다. 그 근거를 살피면 되니까. 관점, 시각이 문제라고 따지는 것 보다 근거가 중요하니까, 그렇게 알고 들으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좀 어렵고 딱딱했다. 학생들보다는 선생들이 들으면 좋았을 강의였다. 학생들은 좀 어려웠을 것이다."

우편향 인사들이 대거 특강자로 나선 것에 대해 조 교사는 "어느 정도 관행이 됐는데, 이전 정부때는 진보적 학자들만 섭외하려고 그러더니 지금은 또 오른쪽에 계신 분들만 특강에 나선다"면서 "정권이 바뀌면 늘 진보-보수 기싸움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조 교사는 요즘 "정권이 바뀌었다는 것을 확연히 느낀다"라고 말했다.

[학생1] "캐치업 이론, 제 생각과 다른데... 알아봐야겠어요"

다른 학생들과 달리 맨 앞에 앉아 수업을 열심히 듣고 메모까지 하던 '범생이'들을 인터뷰하기 위해 다가갔다. 내심 '1시간의 주입식 교육'에 대한 불만섞인 얘기, "따분했다"는 얘기나 몇 마디 나오겠지 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학생들은 나름의 논리로 이미 안 교수의 강의를 정리하고 있었다. 여유도 있어보였다.

"괜찮았어요. 일단 내용은 있는 얘기였던 것 같아요. 수업 중간중간 약간씩 '보수가 옳다, 진보는 그르다'는 느낌을 가질 만한 얘기들이 나오긴 했지만 무난했던 것 같고요. 그냥 대한민국에 대해 많은 교수들이 하는 얘기 중에 하나라고 들었는데요. 말씀을 좀 재미없게 하시긴 하네요. 한번 졸긴 했는데 잘 들으려고 노력은 했어요."

옆에 있던 친구는 더 똘망하다.

"쉽게 말해 '캐치 업'은 미국 같은 선진국의 도움을 받아 발전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 상대적인 개념으로 '내재적 발전론'을 말씀하셨는데 그게 원래 있는 말인가요? 좀 헷갈린 게, 저는 내재적 발전론은 틀렸고, '캐치 업'만이 살 길이다 이런 식으로 들었는데 제 생각하고 좀 다른 것 같아요. 알아봐야겠어요."

밖으로 나가려던 기자들도 다시 돌아와 취재수첩을 펼치고 카메라를 켠다. 주머니에 속을 찌른 채 심드렁하게 서 있던 한 학생은 마치 준비했다는 듯 술술 얘기한다.

"FTA만 봐도요. 미국하고 체결하고 실패한 나라 많잖아요. 제가 알아보니 그렇더라고요. 지금 세계화, 글로벌 하면서 엄청 경쟁하는 시댄데, 선진국 따라가야 성공하고 효율적으로 발전할 수있다 라고 하시니 요즘하고 잘 안 맞는 것 같기도 하고...저는 군국주의는 용서할 수 없다는 입장인데 교수님 말 중에 약간 군국주의 옹호하는 것 같은 게 있어서 좀 그랬어요. 아저씨 제 이름은 쓰지 마세요."

[학생2] "다음엔 진보교수 특강을, 우리 바보 아니에요"

보수 성향 인사들로 서울시교육청이 진행하고 있는 '현대사 특강' 둘째날인 28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인창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이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의 '한국현대정치경제사' 강연을 경청하고 있다.
 보수 성향 인사들로 서울시교육청이 진행하고 있는 '현대사 특강' 둘째날인 28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인창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이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의 '한국현대정치경제사' 강연을 경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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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말들을 참 잘 했다.  어른들은 '주입'하고 '가르치려고' 들지만 아이들은 이미 토론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친구 저 친구 얘기를 들어보다가 이번엔 황 모 학생을 복도끝으로 데리고 갔다. 더 많은 얘기를 들어보기 위해서다.

그런데 먼저 물었다.

"내재적 발전론 있잖아요. 교수님 말 들으니 그건 희망이 영 없다 딱 잘라서 말씀하신 것 같은데요. 진짜 그런 건가요?"

당황스러웠다.  "난 잘 모른다"고 대답할 수도 없고...다행히 황군 스스로 말을 이었다.

"제가 생각할 때는 희망도 있는 것 같아요. 우리나라처럼 역동적인 나라에서 우리만의 것을 끄집어내면서 선진국의 좋은 것을 잘 붙이면 그게 최고의 모델 아닐까요. 그걸 내재적이니 외재적이니 나누는 게 오히려 지금 시대랑 안 맞을 것 같은데요. 오늘은 보수적인 교수님 말씀 들어봤으니 다음번엔 진보적인 교수님 들어봤으면 좋겠고, 그 다음에는 아주 중립적인 학자풍의 교수님 얘기도 들어봤으면 좋겠어요. 이 교수님 얘기만 듣고 끝나면 우리한테 그 교수님 말만 옳다 이걸 강요하는 것밖에 안 되는데 그러면 안되죠."

한 마디 더 했다.

"그리고요. 밖에선 이 특강이 시끄러운 것 같은데요. 일단 학생들은 여기 끌려와서 듣는 거예요. 솔직히 학생들 대다수는 관심이 많지 않고요. 다만 관심 있어 하는 학생들이 많아지긴 했어요. 더 중요한 건 우리 고등학생들이 다 성숙해요. 바보가 아니에요. 우리도 우리 나름의 생각이 있고 가치관이 있거든요. 보수 교수 얘기 들으면 보수 되고, 진보 교수 얘기 들으면 진보 된다는 생각은 우리 학생들을 무시하는 거죠. 만약에 그거 걱정하시는 분들 계시면 그런 건 걱정 안 하셔도 되요."

귀 한쪽으로는 MP3를 듣고 있으면서도 또박또박 말 잘하는 아이들, '예, 알겠습니다'라고 복창하기 보다는, "예, 일단 교수님 말씀 잘 들었습니다"라고 '최종 판단'을 보류하는 아이들. 아, 우리나라 고등학생들 멋있다. 똑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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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사진기자. 진심의 무게처럼 묵직한 카메라로 담는 한 컷 한 컷이 외로운 섬처럼 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징검다리가 되길 바라며 오늘도 묵묵히 셔터를 누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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