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1948년 12월 1일 만들어진 국가보안법이 어느새 60년이 됐습니다. 그동안 개정, 폐지 등 많은 말들이 있었지만 국가보안법은 아직까지 건재합니다. 국가보안법은 과연 우리들에게 무엇일까요. 국가보안법이란 이름 아래 족쇄가 채워졌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먼저 대학교 교양과목 <한국사회의 이해>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받다, 11년 만에 무죄판결을 받은 장상환 경상대 교수의 글을 소개합니다. [편집자말]
1948년 12월 1일 만들어진 국가보안법이 어느새 제정 60년을 헤아리게 됐다.
 1948년 12월 1일 만들어진 국가보안법이 어느새 제정 60년을 헤아리게 됐다.
ⓒ 윤성효

관련사진보기


지난 2005년 3월11일 대법원이 1심과 2심 무죄판결에 대한 검사 상고를 기각함으로써 무죄판결이 확정됐다. 1994년에 시작된 <한국사회의 이해> 사건이 11년 만에 마침내 끝났다.

당연한 판결이지만 11년이라는 오랜 기간 시달려왔기에 실로 감회가 컸다. 요즘 그 때 그 악몽을 다시 본다. 최근 검찰과 경찰이 오세철 교수 등에 대한 구속영장을 두 번이나 신청하는 것을 보고 국가보안법이라는 괴물이 끈질기게 한국사회를 괴롭히고 있음을 느낀다.

12월 1일이 되면 국가보안법 제정 60주년이다. 그 동안 참 어이없는 일들이 많았다. 내가 겪은 사건도 그 중 하나다. <한국사회의 이해> 사건을 통해 지역과 중앙 기득권이 국가보안법을 어떻게 이용하고, 내가 어떻게 상처 입고 이겨냈는지 밝히고자 한다.

쓰러져가는 수구세력, 국가보안법 딛고 재기를 노리다

1993년 문민정부 수립 후 군부독재와 연결된 수구세력은 군부 내 하나회 척결 등으로 약해졌다. 이 수구세력들이 1년 동안 숨죽이다가 김일성 주석 사망 후 조문파동을 계기로 박홍 서강대 총장이 다수 주사파가 암약한다고 고발한 것을 이용하여 이 사건을 터뜨렸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이런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았다면 이 사건은 일어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당시 보안분실에서 듣고, 수사기록을 열람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 있다. 검찰은 사건 발표 전 수개월 전부터 이 사건을 내사해왔다. 수사관들 말에 의하면 보안분실에 소속된 수사관 10여명 전원이 두 달 동안 다른 일은 제쳐두고 '한국사회의 이해 사건'을 만드는 일에 매달렸다고 한다.

<한국사회의 이해>라는 책을 그들의 수사지침에 따라 줄을 쳐가며 분석하는 일과 강의를 수강한 학생을 면담하는 일, 경상대학교에서 출석부 등 자료를 입수하는 일 등이었다. 이를 위해 이들은 수차례 창원에서 진주로 출장을 다녔다고 한다. 정말 엄청난 국력 낭비였다.

1994년 여름 방학 중에 이 책이 신문 지면과 전파를 통해 처음 세상에 널리 알려졌었을 때 나는 의아하기 짝이 없었다. 이미 4, 5년 전부터 강의교재로 사용해 온 책이었기에 느닷없이 '이적성' 운운하는 꼬리를 붙인 기사와 검찰 소환을 접하고는 당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주라는 지방 도시에는 지방자치가 실시되기 이전부터 5도(盜) 10적(賊)이라고 불리는 토호들이 있었다. 1993년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직후 지역토호세력 척결정국이 조성되자 <진주신문>에서도 보도기사를 내보내기 시작했다. <진주신문>은 시민 1000여 명이 소액 주주로 참여하여 창간한 주간 신문으로, 정진상 교수와 나는 당시 이 신문 '논단'의 고정 필자였다. '논단'에서 우리들은 당연히 5도 10적, 그 중에서도 특히 사학비리를 저질러 온 강모씨를 비판하고 논설을 기고했다. 이것이 문제의 발단이 될 줄을 전혀 모른 채 말이다.

그 때까지 자신을 비난하는 소문은 무수히 들었겠지만 진주 바닥에서 공개적으로는 한 번도 비판을 받은 적 없는 강모씨로서는 위협을 느꼈을 것이다. 강모씨는 진주신문사 사장과 기사를 쓴 진주신문사 기자를 고발하는 한편, 나와 정진상 교수에 대해서는 엉뚱한 보복을 시도했다. 당시 경상대학교 민교협과 전교조 진주지회는 교육개혁을 요구하는 성명서에서 당시 금품을 받고 교수를 채용한 강모씨를 비판했다. 강씨는 그 내용을 문제삼아 전교조 진주지회장과 당시 경상대 민교협 회장이었던 나를 명예훼손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당시 국가공무원법은 공무원이 형사 기소가 되면 자동 직위해제토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기소 자체가 큰 타격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발을 취하했지만, 강모씨의 보복 의지가 줄어들지는 않았다. 강모씨는 진주 지역구 국회의원을 지냈던 당시 안기부장 특보 조모씨를 통해 <한국사회의 이해> 개정판 발간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공안문제연구소에 감정을 의뢰하여 사건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경상대학교 내 수구보수세력

칼은 학교 내에도 있었다. 경상대학교 내 일부 수구 교수들은 <한국사회의 이해> 수강생 이 많아 자신의 이해관계에 위협을 느꼈는지 <한국사회의 이해> 집필교수들 가운데 네 명의 교수를 '빨갱이 교수'로 몰아서 학교에서 축출하려고 했다.

8월 30일 오후에 검찰은 오후 7시에 '나라와 대학을 걱정하는 한 교수'라는 익명으로 8월 19일자로 김덕 안기부장에게 투서한 편지를 공개했다. 익명의 투서를 공개하는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다. 그만큼 검찰이 강한 사법처리 의지를 갖고 있음을 보여줬다고 할 수 있다. 이 투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다.

"이번 교양교재 <한국사회의 이해> 집필자 중 장상환, 정진상, 백좌흠(인도유학중) 3명과 정성진 교수(미국유학중)는 속된 표현으로 빨갱이임이 확실하며, 이번 기회에 반드시 사법처리하여 대학 강단을 떠나게 해야 한다는 점을 간곡히 당부 드립니다. 만일 이번 기회에 사법처리가 되지 않으면 이젠 합법적으로 면죄부를 주어 앞으로 어떠한 행동을 해도 처벌할 수가 없을 것이며, 이것이 비단 저희 대학뿐만 아니라 타 대학에 미치는 영향도 간과해서는 안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 <한국사회의 이해>라는 교양과목 시험에 '미제국주의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없이는 A 학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은 학생들에게 공공연한 비밀이며, 이들이 출제하는 기말시험 문제 중에서 하나만 든다면 김우중과 박노해를 비교하고 어느 쪽이 참인지를 기술하라' 등 노골적으로 빨갱이 교육을 시키고 있음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 이들이 대학 깊숙이 자리를 잡게 된 데에는 5,6공화국 시절에는 민주화라는 이름으로 정부 당국의 논리를 격파해왔으며, 문민정부 출범 후에는 민주화운동을 하면서 교감을 같이 해온 정부 내의 고위직 정책결정자들과의 연결도 이들의 든든한 배경이 되고 있다고 많은 사람들은 믿고 있습니다. 특히 이번 저희 대학의 이적성 교재 문제에는 청와대 김정남 교육문화수석이 관여하여 문제를 완화시키는 쪽으로 작용하고 있으며,

… 한편으로는 영남대 이수인 교수(전 함평 국회의원)를 통해 대검차장(최환)에게 이 문제를 축소해주도록 조정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리고 있습니다. …"

투서 아래 부분은 문민정부 내 여러 세력간 권력 투쟁을 암시하는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사건 발생 후 경상대학교 대학당국은 8월 16일 교양과정위원회를 열어 <한국사회의 이해> 강좌를 폐강하는 신속성을 보였다. 그리고 빈영호 총장은 집필교수들의 사법처리를 바라는 뜻을 피력하며 사퇴할 뜻을 밝히기도 했다. 여기에는 문교부와 검찰 등 정부 당국의 엄청난 압력이 작용했을 것이다. 집필교수들과 민교협은 이것이 학문의 자유를 정면으로 침해한 조치라며 비판하고 철회를 요구하며 농성을 시작했다.

2000년 7월 24일 1심에서 무죄판결이 나고 2002년 8월 24일 고등법원이 역시 무죄판결을 내린 후, 집필교수들은 대학 당국에 <한국사회의 이해> 과목을 다시 개설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대학 당국은 이에 대해 최종 판결 때까지 기다리자는 소극 대응으로 일관했다.  

보수언론, 김일성 장학금 받은 친북교수로 매도하다

정진상 교수와 나(장상환).
 정진상 교수와 나(장상환).
ⓒ 윤성효

관련사진보기

보수 언론은 한국사회의 이해를 공동 강의한 교수들을 이념 편향을 가진 교수로, <한국사회의 이해>를 삼류 교과서라고 폄하했다. 보수 언론들은 검찰 발표를 여과 없이 그대로 보도했다. 교수들 의견을 들어서 함께 보도한 경우는 없었다. 마치 경상대학교의 <한국사회의 이해>를 집필한 교수들이 김일성으로부터 장학금을 받은 친북교수인 것처럼 매도했다.

예컨대 <동아일보> 1994년 8월 3일자는 이렇게 보도했다.

"대검 공안부는 지방에 있는 K대학의 교양교재가 계급투쟁을 부추기는 등 이적성향이 있다는 판단에 따라 이 교재를 공동으로 저술한 지방대 교수 9명 중 7, 8명에 대해 수사 중이다. 최환 대검 공안부장은 2일 '대검의 공안연구관들이 검토한 결과 이 교양 교재는 계급대립을 강조, 계급혁명과 폭력혁명을 선동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돼 2개월 전 관할 지검에 이에 대한 수사를 지시했다'고 밝혔다. 검찰은 그러나 이 교재명과 저자 이름은 수사기밀을 유지하기 위해 밝힐 수 없다고 말했다. … 검찰은 이와 별도로 일부 교수들의 강의내용과 기고문에도 이적성향이 있다고 보고 수사 중이라고 덧붙였다."

이와 함께 동아일보는 경남지방경찰청 보안분실이 7월 27일 경상대학교 앞 서점에서 <한국사회의 이해> 13권을 압수한 사실과 <한국사회의 이해>의 저자 9명의 이름을 밝혀서 사실상 <한국사회의 이해>가 수사대상임을 밝혔다.

그 외에도 "붉은 교수 사실인가"(<중앙일보> 8월 4일), "계급혁명 가르친 교수들"(<한국일보> 8월 4일), "이적성 교재의 오류"(<동아일보> 8월 5일), "학문의 자유란 무엇인가"(<조선일보> 8월 5일) 등 모두 비슷한 논조로 <한국사회의 이해> 집필진을 비판하는 사설이 실렸다.

다만 중앙 일간지 중 <한겨레>만은 집필 교수들이 4일 기자회견을 통해서 제기한 반론을 비교적 충실히 보도하면서 검찰 수사 자체에 의문을 표했고, 이 후에도 비교적 객관적으로 사태 전개를 보도했다.

민주진보세력, 기득권세력에 맞서다

<한국사회의 이해> 사건이 벌어지자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학술단체협의회' 등 진보학계와 문화예술계, 지역 민주화운동세력은 이 사건의 해결에 적극 노력하여 성명서 발표, 집필자와 해당분야 연구자들의 의견서 제출 등을 통해 검찰의 사법처리에 저항했다.  다수 경상대학교 교수를 비롯하여 인근 학교 평교수들도 <한국사회의 이해> 저자들에 대한 사법처리에 반대하는 뜻을 성명서로 표명했다.

교재 집필 교수들은 처음에는 검찰의 강제구인에도 응하지 않으며 강경대응을 하다가 8월 30일에 수사기관 구인에 응하였다. 9월 1일부터 새 학기가 시작되어 학교에 경찰이 재진입하는 경우 학생들과의 충돌 등으로 수업에 지장이 있을 것을 우려해서였다. 그리고 검찰의 사건 발표 후 한 달 가량이 경과하면서 집필교수들과 경상대학교 동료교수들, 여러 단체 교수들과 회원들의 집중적인 노력으로 저희 교재와 강의를 사법처리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사회 분위기가 어느 정도 조성되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검찰이 집필교수 정진상, 장상환에 대해 구속을 시도한 것에 대해 창원지방법원 최인석 판사는 구속영장을 기각함으로써 제동을 걸었다. 최인석 판사가 "영장청구 기각 사유서"에서 든  영장기각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교재의 내용이 시중 서점에서 유통되는 진보적 사회과학 서적이나 간행물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것들로 우리 사회의 사상적 건강상태가 그 정도의 내용을 소화해내지 못할 정도의 수준은 아니라고 보며, 둘째, 피의자들은 북한의 체제 및 사회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갖고 있으며, 특히 주체사상에 대하여는 그들이 남한을 '식민지 반자본주의'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 우리나라가 독립적 주권을 갖고 있는 것과 한국에서의 고도 자본주의 발전을 외면하는 시대착오적인 이론이며, 수령론, 후계자론 등도 독재 및 혈통세습제를 정당화하기 위한 시대착오적인 이론이라는 비판적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변명하고 있고, 그 변명과 비판내용의 깊이와 정연함이 임시로 곤경을 면하기 위한 방편으로 보기에는 쉽지 않으며, 셋째, 피의자들이 강의시간 외에 별도로 소위 주사파 등 운동권 학생들을 지도하거나 접촉, 교류한 사실이 있다는 자료를 찾아볼 수 없으며, 이를 강의교재로 한 강좌는 이미 폐강된 점, 학문의 자유 또한 법이 보호하여야 할 중요한 국민의 기본권인 점 등을 비추어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 존재한다고 보기 어려운 이 건과 같은 경우, 강의과목이나 교재의 선택과 그 내용에 관한 것은 국가공권력의 개입보다는 대학 자신의 자율적 조절기능에 맡기는 것이 여러 모로 낫다고 생각되며, 넷째, 자진 출석, 진술했으므로 도주의 우려가 없다."

이러한 최인석 판사의 영장기각에 대해 <한국일보>는 "석연찮은 영장 기각"이라는 제목의 사설을 썼고, <조선일보>도 "납득하기 어려운 기각"이라는 사설을 썼다. 단 <한겨레>에서는 "'한국사회의 이해'를 이해한 판사"라는 제목으로 영장기각을 긍정 평가하는 사설을 썼다.

검찰은 결국 1994년 10월 31일-11월 10일간의 검찰 조사를 거쳐 11월 30일 나와 정진상교수를 불구속 기소하고 나머지 집필교수들을 기소유예(출국중인 교수에 대해서는 기소중지)하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했다. 검찰 시도는 실패한 것이다.

<한국사회의 이해>를 이적표현물로 감정한바 있는 유동열 전 공안문제연구소 연구원.
 <한국사회의 이해>를 이적표현물로 감정한바 있는 유동열 전 공안문제연구소 연구원.
ⓒ 오마이뉴스 이종호

관련사진보기

나와 정진상 교수는 기소되면서 직위해제되었다가 다시 복직되었다. 종래 국가공무원법에 의하면 공무원이 형사사건으로 기소되면 "직위해제해야 한다"라고 되어 있었다. 그래서 경상대학교 당국은 나와 정진상 교수가 11월 30일에 기소된 즉시 직위해제했다. 우리는 직위해제 집행정지 처분 신청을 부산고등법원에 제출하고 형사사건으로 기소된 경우 자동으로 직위해제를 규정한 국가공무원법 73조 2의 1항 단서조항을 헌법재판소에 위헌 제청했다.

부산고등법원은 직위해제가 부당했다고 판결했고, 학교당국이 대법원에 상고했지만 기각되었다. 그런데 종전에 상지대 교수들의 학교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사립학교원법의 국가공무원법 조항 원용규정이 위헌판결을 받았다. 그래서 1994년 12월 31일부로 국가공무원의 조항도 "직위해제할 수 있다"로 바뀌었고, 이에 따라 경상대학교 당국도 직위해제를 중단하고 1995년 1월 4일부로 복직 조치했다.
   
재판과정에서 검찰은 최대한 법원 판결이 미뤄지도록 지연작전을 써서 검찰 명예가 덜 상하도록 안간힘을 다했다. 1994년 11월 30일 기소된 후 6년이 지난 2000년 7월 24일에야 1심 재판에서 무죄선고가 나왔다. 1심 재판이 늦어진 이유는 검찰이 신청한 증인인 공안문제연구소 연구위원 유동렬이 계속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 이유는 검찰이 빨리 무죄판결이 날 경우 검찰 명예가 손상될 것을 우려하여 재판 지연작전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무리한 국가보안법 적용, 효력 약화라는 결과를 낳다

<한국사회의 이해> 사건을 통하여 국가보안법이 국가안보가 아니라 정권안보, 기득권세력 안보에 악용되고 있고, 학문·사상·표현의 자유를 억눌러 우리 사회 발전을 가로막는 법률이 분명하다는 사실을 다수 국민들도 알게 되었다.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있듯이 국가보안법을 무리하게 휘두른 것이 국가보안법 위신을 떨어뜨린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 변화로 적어도 학문의 세계에 국가보안법이란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더 이상 어렵게 되었다. 또한 당시 일각에서 추진되었던 <태백산맥>, <천국의 계단> 등과 같은 문학작품에 대한 사법처리 시도는 중단되었다. 국보법 약화에 의한 표현의 자유 신장은 한국 영화의 질적 수준을 향상시켜 국제영화제에서 큰 상을 받고 오늘날 드라마와 영화가 해외에서도 호평을 받는 바탕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사건을 겪으면서 글을 쓰고 교내외 강의를 하는데 정신적 위축을 피할 수 없었다. 법적인 처리 가능성을 늘 의식하게 되는 것이다.

같이 기소당한 사회학과 정진상 교수는 1994년 가을학기부터 인도 델리대학에 1년간 방문교수로 나갈 계획이었는데 이 사건으로 무산되었다. 정 교수는 인도보다 국민소득이 높은 한국에서 벌어지는 일을 인도 교수에게 설명하기에 수치심과 비애감을 느낄 정도로 곤혹스러웠다고 한다. 동료교수인 경제학과 정성진 교수는 단행본 출판을 거의 마무리해놓고도 혹시나 사법처리될 가능성을 우려하여 출판을 못했다.

해외에 나가는 데에도 어려움이 있었다. 1년짜리 단수여권만 발행해 자유로운 여행을 하지 못했다. 나는 2003년 여름부터 1년간 미국 매사추세츠대학에 방문교수로 갔는데 여권을 2004년 5월말까지만 끊어주어서 보스톤 영사관에 가서 기한을 3개월 연장해야 했다. 

"시련은 인간을 강하게 만든다"

이 일 이후 진보 연구자들은 우선 양적, 질적으로 연구논문 쓰기를 확대했다. 그리고 <한국사회의 이해> 집필교수를 포함한 진보적 연구자들 연구모임인 '진주사회과학연구회'(진사연)가 1989년에 시작해 격주로 세미나를 가져왔으나 사건 이후 강화된 응집력을 바탕으로 매주 세미나를 개최하는 등 연구의욕이 더 커졌다. '진사연'은 20년 활동을 통해 2008년 11월 현재 350회 이상 세미나를 해왔으며, 학술진흥재단으로부터 소규모 세미나 경비 지원도 받았다.

또한 진보 연구자들은 경상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를 연구 중심기관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한국사회의 이해> 초판의 집필교수인 정성진 교수가 1999년부터 2002년까지 4년간 소장으로 재직하였고, 2003년부터 정진상 교수가 원장(2001년 사회과학연구소가 연구원으로 명칭 변경)을 맡았고, 2007년부터는 필자가 원장을 맡고 있다.

사회과학연구원은 2001년부터 사회과학연구총서를 발간하고 있는데 제1권 <마르크스의 방법론과 가치론>을 시작으로 하여 현재까지 29권의 연구총서를 냈다. 그리고 1999년부터 학술진흥재단 중점연구소 선정을 지원하여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선정 탈락을 딛고 꾸준히 노력하여 2001년에 드디어 중점연구소로 선정되기에 이르렀다.

사회과학연구원은 중점연구소로 지정된 이후 금속노조를 중심으로 노동문제와 노동조합 실태를 집중적으로 조사하여 학술대회와 출판사업 등 왕성한 연구활동을 했다. 이 성과를 바탕으로 2007년 12월 중점연구소로 재선정되어 9년간 연구 지원을 받게 되었다. 또한 사회과학연구원은 한국 진보사회과학계의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역할을 자임하여 2004년부터 전문학술지 <마르크스주의 연구>를 반년간으로 발간하여 왔고, 2007년 12월에는 학술진흥재단 등재후보지로 선정된 후에는 계간으로 발전시켜 발간하고 있다.   

그리고 사회과학연구원을 중심으로 여러 학과 교수들이 협동으로 2009년 3월 대학원 정치경제학과를 개설해 마르크스주의를 비롯한 비판적 사회과학 연구자를 육성하려고 한다.  

교수들조차 국가보안법의 공격을 당하는 상황이므로 노동자․학생․일반시민들의 표현의 자유에 대한 국가보안법의 제약은 더욱 크다. 따라서 국가보안법의 폐해를 줄이고 나아가서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기 위해서는 국가보안법을 지탱하고 악용하는 보수 일색의 정치 및 이데올로기 지형이 보수와 진보의 병립구도로 근본적으로 변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노동자, 농민, 도시서민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진보정당을 강화하는 길 뿐이라고 판단했다.

이에 <한국사회의 이해> 집필교수 다수는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 당원으로 가입해서 활동했다. 그리고 일부 교수들은 민주노동당 사업의 한 부분을 직접 담당하여 활동하게 되었다. 예컨대 필자는 1997년 국민승리21의 대통령 선거 공약 작성과 1999년 진보정당 준비위원회의 강령 제정사업에 적극 참여했다. 그리고 2000-2003년간 민주노동당 정책위원장으로, 2004년 10월부터 2006년말까지 민주노동당 부설 진보정치연구소장을 맡아 진보정당 성장을 위해 노력해왔다.

정진상 교수는 2004년 총선 당시 민주노동당 교육 분야 핵심공약인 국립대학 통합네트워크 구축 정책 연구를 주도했다. 민주노동당 참여교수들은 민주노동당이 사회적 약자들인 노동자․농민․도시서민들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대변한다는 도덕적 정당성을 넘어서, 과학적이고 현실적인 정책을 제시하는데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국가보안법은 실질적인 힘에서는 상당히 무력화되었으나 여전히 기득권세력의 이익을 지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 폐해가 크기 때문에 하루속히 폐지되어야 한다. 국가보안법의 위력은 한나라당을 비롯한 기득권 세력이 국가보안법의 폐지 내지 근본적 개정 반대에 그렇게도 매달리는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최근 주요 기사]
☞ "시교육청이 학생들에게 3억원짜리 수면제 먹였다"
☞ 보수지식인 김일영 교수"뉴라이트는 죽었다, 종언 선언해야"
☞ YTN 사장실에 '나홀로콕' 구본홍, 도시락 먹고 와이셔츠 '공수'
☞ "어청수 경찰청장, 소신과 정도로 탁월한 경영 이뤄"
☞ [블로그] 시인은 이미... 진실과 정의는 너무 늦었다
☞ [엄지뉴스] 그 식당에 가면 나머지공부 하나요?
☞ [E노트] 한은, 미국서 40억달러 반입... 외환 바닥났나


태그:#장상환, #국가보안법, #한국사회의이해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