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4.07 10:17최종 업데이트 24.04.07 10:17
  • 본문듣기
벌써 30여 년 전인 1997년 늦가을의 어느 날이었다. 교토조선중급학교 3학년에 다니던 구량옥은 "주위를 잘 살피고 조심하세요"라는 선생님의 당부를 뒤로 하고 집으로 향했다. 지하철역사 안으로 막 들어섰을 때 벽면에 붙어있는 종이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얼핏 보니 일본 극우가 재일조선인과 한국인을 향해 내뱉는 '구더기', '바퀴벌레' 같은 욕설이 눈에 들어왔다. 구량옥은 몸이 움찔했다. 이제는 대놓고 공공장소에 이런 선전물까지 붙인단 말인가.

그런데 자세히 보니 오사카 변호사회 아동권리위원회가 만든 호소문으로 '재일조선인을 향한 증오범죄를 일본 사회에서 몰아내자'라는 캠페인을 담고 있었다.

치마저고리 칼질  
 

치마저고리 칼질 사건은 연극으로도 만들어졌다. 재일동포 민족극단 '달오름'의 1인극이다. 주인공은 강하나. ⓒ 김지운제공

 
구량옥이 이 호소문을 마주하기 몇 해 전부터 길거리에서 조선학교 여학생 교복에 칼질을 하는 테러가 일어났다. 남학생 교복과 달리 여학생 교복은 눈에 잘 띄는 치마저고리여서 표적이 되기 쉬웠다. 일본 극우의 이런 소행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여러 번 일어났다.

하지만 경찰은 수사 시늉도 내지 않았다. 일본 전역의 조선학교에선 심각하게 사태를 받아들였으나 뚜렷한 방안이 없었다. 고민 끝에 나온 대안이 학생을 보호하기 위해 등하교 시에는 일본 학교 여학생과 비슷한 교복을 입고 학교 안에서만 치마저고리를 입는 안이 거론되었다.   그때 교토조선 제1초급학교에 다니던 구량옥은 중급학교에 올라갈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치마저고리를 입는 언니들이 부러웠다. 옥잠화보다 흰 저고리, 흑단보다 짙은 검정 치마, 그 아래로 살짝 드러난 하얀 종아리에 곱게 땋은 머리까지. 그 아름다운 모습에 넋을 잃곤 했다. 구량옥은 치마저고리를 입지 않는다는 해결책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교무실 문을 열었다.


"우리가 무슨 나쁜 짓을 했나요. 어째서 자기를 숨기듯 살아야만 하나요. 나는 치마저고리를 입고 다니겠습니다. 칼질이든 폭탄이든 맞겠습니다."

어린 구량옥의 매서운 항의에 선생님들은 얼어붙었다. 그렇게 구량옥의 초급학교, 중급학교 시절은 어수선했다.

구량옥 자신도 지하철에서 험한 일을 겪은 적이 있었다. 중급학교 2학년 어느 날 하굣길, 긴테츠(近鐵電車)노선의 단바다시(丹波橋)역에서 순서대로 지하철을 타려는 때 뒤에서 어떤 중년의 일본인이 "조센징 주제에 먼저 타"하면서 땋은 머리를 잡아당겼다. 구량옥은 뒤로 넘어질 뻔했다. 승강장에 있는 사람들은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냈고 열차 안의 승객도 머리를 내밀었다.

조선학교 학생들은 이런 일을 자주 당했다. 선배 한 명은 술에 취한 일본인이 "너 조센징이지?"라며 계단에서 미는 바람에 크게 다칠 뻔했다. 겁에 질려 한동안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등하교를 했다. 또 다른 선배는 버스에서 우산으로 머리를 맞기도 했다.

구량옥은 내게도 결국 이런 일이 닥쳤구나 생각하며 조그마한 어깨에서 나온 팔로 그 일본인의 손목을 잡았다.

"역무실로 갑시다."

순간 중년 일본인의 눈빛이 흔들렸다. 호기심으로 쳐다보던 승강장의 사람들은 구량옥의 용기에 놀라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일본 남자를 역무실로 끌고 갈 때 소녀 구량옥의 가슴은 벌렁거리고 다리는 후들거렸다.

조선학교 여학생의 등학교길은 이처럼 전쟁이었다. "조심하세요" "복장을 단정히 하세요" 선생님은 입버릇처럼 말했다. 구량옥과 친구들은 단지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숨죽이고 몸을 움츠렸다. 승강장이건 열차 안이건 손가락질이 목덜미에 느껴졌고 "조센징이야"하는 수근거림이 귀를 파고들었다.

이게 우리의 운명이구나, 우리는 천대받아야만 하는 존재인가 체념이 쌓여갈 때 마주한 오사카 변호사회의 호소문 한 장이 구량옥에게 구원의 손길처럼 다가왔다.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일본 사회에서도 우리 조선인을 존중하는 사람이 있구나, 역시 변호사는 다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구량옥은 이런 글을 쓴 사람을 만나보고 싶었다. 또한 변호사가 되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다. 그날 구량옥은 변호사가 되어 재일교포의 처지에서 일본의 법을 다루고 동포 사회에 힘이 되는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단번에 사법고시 합격
 

오사카 대학 법학부시절 졸업 기념으로 지도교수 연구실에서 찍은 사진. 맨 오른쪽이 구량옥이다. ⓒ 구량옥 제공


구량옥은 착실하게 준비했다. 일본의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조선고급학교를 졸업해도 대입수험자격이 주어지지 않기에 고급학교 1학년 때 검정고시를 봐 자격을 갖췄다. 고급학교를 졸업하는 2002년 열심히 공부한 덕에 오사카시립대학 법학부에 붙었고 4년 장학금까지 받았다. 2006년에는 로스쿨에 진학했고 2008년에는 그 어렵다는 일본의 사법고시에 단 한 차례 응시로 합격했다.

사법고시 합격자 명단은 도쿄의 법무성 앞에 벽보로 나붙고 <아사히 신문> 등 일본의 주요 신문에 실린다. 그만큼 사법고시 합격은 일본 사회에서 대단한 일이었다. 오사카에 사는 구량옥을 대신해 도쿄의 친구가 법무성 발표장으로 나갔다. 구량옥의 옥자는 보배 옥(鈺)으로 일본에서 사용되지 않는 한자여서 그의 이름은 외국어 표기 문자인 가다가나 'クリャンオク'으로 씌여 있었다.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친구는 "량옥아 네 이름이 있어"라고 들뜬 목소리를 보내왔다.

구량옥에게는 이 시험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시험이 가까워지면서 몸에 큰 변화가 나타났다. 샤워할 때마다 머리칼이 한 움큼씩 빠져 걱정이 심했는데 어느 날 정수리 쪽을 보니 메추리알 크기로 두 곳의 머리가 텅 비어 있었다. 심한 원형탈모였다. 이제 스물다섯 된 아가씨의 머리가 휑할 정도로 벗겨지다니, 부모님은 당장 그만두라고 성화였다. 그동안 들인 노력이 아깝고, 호소문 앞에서 했던 다짐이 절절했기에 어떻게든 응시를 하고 낙방하면 다른 길을 찾아보기로 했던 터였다.

구량옥은 터질 듯한 마음을 누르며 출근길에 오른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는 전철 승강장에서 이 소식을 듣고 두 팔을 하늘로 들어 올리며 비명을 질렀다. 그러고는 주저앉아 엉엉 우셨다.

한 맺힌 우토로 마을
  

우토르 마을 전경. 재일 조선인의 한이 서린 곳이다. ⓒ 김도희 제공

 
아버지는 재일 2세로서 험한 세월을 살아오셨다. 경상북도 달성군이 고향인 할아버지는 일본으로 건너와 규슈현을 비롯해 여기저기 많은 탄광을 거치셨다. 그 와중에 7남매를 낳았고 셋째인 아버지는 살림 맛이 매운 어머니를 만나 교토부 우지시 우토로 마을에 정착했다. 하지만 시련이 닥쳤다. 우토로는 사연이 많은 곳이었다.

1940년 일본 체신청은 교토 비행장 건설을 위해 국책군수회사 '국제공업'을 세워 토지 소유를 포함한 모든 사업 추진을 이 회사에 맡겼다. 여기에 무려 1300명이나 되는 조선인이 끌려와 비행장 건설에 내몰렸다. 1945년 일본은 패전 후 동포들의 귀환 대책은 말할 것도 없고 임금도 지불하지 않고 나자빠졌다.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동포들은 여기서 살 방안을 찾아야 했다. 상하수도도 없는 척박한 곳을 개간해 살아갔다.

그런데 전후 4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한 부동산 회사가 나타나 불법 주택을 철거해라, 땅을 내놓으라 으름장을 놓더니 1989년 토지명도소송을 걸었다. 구량옥의 부모님도 피고석에 앉는 처지가 되었다. 사연인 즉 1964년 국제공업이 닛산차체주식회사에 병합되면서 닛산이 땅임자가 되었는데 1987년 이 부지를 부동산 회사에 매각하면서 우토로 마을 주민이 거리로 내몰리게 된 것이다.

우토로의 조선인은 "강제로 끌고 와 부려 먹다가 내팽개칠 때는 언제고 40여 년이나 노력해 살 만한 곳으로 만들었는데 이제 와서 나가라는 게 말이 되느냐"라고 격렬하게 항의했다. 어린 구량옥은 부모님 손을 잡고 또 다른 손에는 풍선을 들고 우토로 마을에서 우지시까지 '토지 재판'의 승리를 위한 거리 행진에 나갔다.

하지만 이런 염원을 짓밟고 2000년 최고재판소는 "조선인은 불법으로 토지를 점거했다. 나가야 한다"라고 판결했다. 

이 소식이 한국과 전 세계에 전해지며 일본 정부의 각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2001년 국제연합 사회권규약위원회는 "우토로 지구 임시거처에서 나온 노숙자들과 우토로 주민의 강제퇴거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 2006년 국제연합 특별보고서는 "우토로 주민은 일제강점기 때 이 땅에 배치되어 일제의 전쟁을 위하여 일했고 60년간 거주를 용인받은 점을 감안해 이 땅에 거주할 수 있게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밝혔다.

한국에서도 2007년 우토로 국제대책회의가 발족했다. 민간기금이 모이고 한국 국회에서도 지원 예산이 편성되었다. 이렇게 모인 돈으로 우토로 토지 일부를 사들였다. 우지시에서는 이에 발맞춰 상하수도 시설을 만들고 공영주택을 지어 우토로 주민 일부가 입주하게끔 했다.

하지만 극히 일부였고 주민 대다수는 '고향' 우토로를 등진 상태였다. 구량옥의 가족도 우토로를 떠나 교토의 변두리로 떠났다. 구량옥의 부모가 처음으로 장만한 집이건만 불법 주택이라고 한 푼도 보상을 못 받고 말이다.

마을 앞에 유리 가루를 뿌려놓은 것처럼 빛나던 실개천, 봄날이면 벚꽃잎이 함박눈처럼 내리던 동네 어귀, 학교 다녀오면 만나는 마을 할아버지 할머니의 은은한 미소. 모두 헤어져야만 했다. 고향을 잃은 슬픔은 구량옥의 가슴에 깊은 칼자국을 남겼다.

그런 아픔 속에서 이뤄낸 구량옥의 사법고시 합격은 가족에게 큰 기쁨이었다. 오사카 변호사회가 만든 호소문 한 장을 읽으며 흘린 눈물이 구량옥을 넓은 바다로 이끈 것이다.     

갓난쟁이를 데리고 떠난 영국 유학
  

재일동포 3세 변호사 구량옥 그는 아시아인권재판소 설립 운동을 추진할 작정이다. ⓒ 민병래

 
구량옥의 인생에서 또 한 번의 뜻깊은 눈물은 2019년 영국에서 국제인권법을 공부할 때였다. 일본변호사협회는 미국의 뉴욕대학교, 영국의 에식스대학교 등과 협약을 맺고 소속 변호사가 법학 석사 과정을 밟을 수 있게 유학을 지원했다. 구량옥은 이 프로그램에 선발돼 뉴욕대학교 객원연구원(Visiting Scholar)으로 뉴욕에서 1년간의 연구 생활 후 국제인권법 석사학위를 따기 위해 다시 영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국제인권법 분야에서 가장 권위가 있는 에식스대학교에서 공부하고 싶었다. 세 살짜리 딸을 데리고 말이다.

"애 키우랴, 공부하랴, 말도 안 통하는데 너무 힘들지 않아"라며 어머니는 간사이 공항에서 출국하는 날까지 안타까워했다. 2017년 뉴욕대학교에 1년 단기 연구원으로 있을 때 수업 시간이 깜깜 절벽이었다. 집중해도 귀는 트이지 않았다. 그런데 영국에서 국제인권법을 영어로 공부하고 학위까지 딴다? 생활은 변호사 노릇으로 번 돈이 있어 가능하지만 딸아이를 챙기면서 어학과 법학을 함께 공부하는 건 외줄타기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결심했다. 뜻하지 않게 모녀 가정이 된 상황도 작용했다. 이 아픔에 매이지 않고 이겨내려면 새로운 환경, 새로운 도전이 필요했다. 기왕이면 공부로, 기왕이면 뜻깊은 국제인권법 공부로 넘어서고 싶었다. 하루 네 시간을 자며 구량옥은 공부했고 긴 제목의 논문을 썼다. <일본에서 2016년에 제정된 헤이트 스피치 대처법이 (재일조선인·한국인을 향한) 혐오 표현을 규제하는데 유효한가>였다.

2013년부터 도쿄의 신오쿠보, 오사카의 쓰루하시 등 여러 지역에서 극우의 혐한 시위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이를 비판하는 여론이 높아짐에 따라 만들어진 법이 이름하여 '헤이트 스피치법.'

하지만 이 법은 처벌 조항이 없어 그야말로 솜방망이여서 일본의 극우는 코웃음을 쳤다. 더욱이 아베가 앞장서 자민당과 일본을 군국주의로 이끄는 상황이니 이 법은 유명무실하기 짝이 없었다. 바로 이런 맹점을 학문으로 밝히고 싶었다. 논문은 최고등급인 디스팅션(Distinction) 바로 아래 메리트(Merit) 등급을 받고 통과되었다.

[인터뷰②] "김치 냄새 지독" 초등학교 습격한 극우단체(https://omn.kr/28305)로 이어집니다.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5,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