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3.23 10:51최종 업데이트 24.03.23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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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내게 팔짱을 끼고 아이들은 옆에서 웃고 떠들고. 분명 쇼핑에 나선 다정한 가족처럼 보이겠지만, 눈썰미가 조금만 있는 사람이라면 의아해하거나 혀를 찼을지도 모르겠다. 웃음이 가득한 세 사람의 얼굴과는 달리 내 얼굴엔 웃음 대신 심술만이 가득했으니까.

오후 들어 거짓말처럼 활짝 날이 갰다. 나는 그 맑은 햇살을 온몸으로 느껴보고 싶어서 아내와 아이들에게 말했다.


"산책 가자."

조금 망설이는 아이들과는 달리 아내의 답은 간단명료했다.

"장보러 가자. 애들 옷하고 신발도 사고. 마침 애들도 있으니까 잘됐네."

어이도 없고, 기분도 언짢았지만, 아내에게서 며칠 전부터 사야 할 게 많다는 소리를 들은 터라 뭐라 따질 수가 없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차라리 그냥 집에 있는 게 낫겠다 싶어 말하려는데, 이번에는 아이들이 나간 김에 외식을 하자며 굳이 나까지 끌고 나왔다.

주말 오후 4시. 지하철역에 백화점, 온갖 상점이 즐비한 곳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많았다.

"너무 붐빈다. 나는 어디 적당한 곳에서 기다리는 게 낫겠는데?"
"아, 그래요. 그게 좋겠네. 그럼 여기 앉아서 기다려요."

세 사람이 쇼핑을 떠났다. 이런 일이 흔하게 있었는데도 나는 그들의 뒤통수에 대고 투덜거렸다.

"어차피 이럴 거면서... 그냥 집에 있겠다니깐..."

스마트폰으로 책이나 들을까 싶어서 주머니를 뒤지는데 이어폰이 없었다. 낭패였다. 이것저것 살 것도 많았고 거기다가 장단이 잘 맞는 셋이 모였으니 적어도 두 시간은 나 혼자 버텨야 할텐데, 정말 난감했다.

망연자실, 스마트폰만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내가 앉아 있는 그곳이 하필 만남의 장소였나 보다. 내 곁에 앉거나 섰던 사람들이 반가운 이름을 부르면서 총총히 멀어져 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남자의 뜻밖의 반응 
 

얼굴에도, 몸짓에도 그리고 말에도 표정은 필요하다. ⓒ 김미래/달리

하릴없이 앉아 있자니 머쓱하단 생각이 들었다. 궁여지책으로 고개를 숙이고 볼륨을 낮춘 스마트폰 스피커로 책을 들었다. 채 10분이 지나지 않아 팔이 아파왔다. 

결국 책 듣기를 포기하고 멍하니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는데, 옆자리에서 화가 난 젊은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너, 뭐야? 지금 나 놀리는 거야? 왜 전화 안 받아? 문자 한 통 보내고 이렇게 늦어도 되는 거야? 도대체 지금이 몇 신데, 이제 오는 건데?"

상대방이 뭐라 변명도 할 새 없이 정말 속사포처럼 쏘아 댔다. 남자는 미안하단 말만 반복할 뿐 뭐라 제대로 말도 못 했다. 피식 웃음이 났다. 너무한다 싶으면서도 젊음이 살짝 부러웠다.

거의 매분 스마트폰에서 시간만 확인하고 바닥을 내려다보다, 천정을 쳐다보다, 혹시 괜히 눈이 마주쳐 오해는 받지 않을까 눈길 둘 곳을 찾아 헤매는데 이번에는 여자가 약속에 늦은 것 같았다.

"미안, 미안, 괜히 버스를 탔더니, 그런 데다가 하필 배터리도 없어서…. 미안해. 많이 기다렸지."

근데 남자의 반응이 뜻밖이었다. 

"응, 그래, 됐어."

당황한 여자와는 달리 남자 목소리는 지나치게 차분했다. 

"정말 미안해. 화 많이 났어?"

더욱 주눅 든 듯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알았어."

뭔가 이상했다. 분명 마음 넓은 남자를 떠올릴 듯한 상황인데, 그렇지 않았다. 자연스럽지 않았고, 왠지 싸늘한 기운마저 느껴졌다.

문득 며칠 전에 카페에서 들었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길이 많이 막히지? 요샌 주말이 더 막히더라. 난 괜찮으니까 너무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와."

삼십 대쯤 됐을까, 여자의 목소리가 내 바로 옆자리에서 들렸다. 전화를 하나 본데, 목소리만으로도 그녀의 여유와 품위가 느껴졌다. 한 10분쯤 지났을까? 옆자리에서 핸드폰 진동음이 울렸다. 그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은근슬쩍 귀를 기울였다.

"아, 그럼, 내가 그리로 가면 되겠네. 미안하긴 뭘, 난 그냥 편하게 앉아서 책 보고 있었는데, 괜찮아. 내가 갈게 거기서 봐."

남의 대화를 엿들으면서도 왠지 마음이 푸근했던 그때가 떠올랐다. 그리고 시끄러운 음악 속에서 또각또각 멀어져가던 그 여자의 구둣발 소리가 무척이나 경쾌하고도 맑게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또다시 이름을 부르고, 늦은 걸 탓하고, 만난 걸 반기는 소리가 내 귓전을 휩싸고는 멀어져 갔다. 

어느새 한 시간이 지났다. 사람들은 더욱 많아졌다. 마치 나를 포위하려 모여드는 사람들 같았다. 옆자리가 비기 무섭게 다른 사람이 앉았고, 그 사람도 어느새 다른 목소리로 변해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스마트폰만 만지작거리는데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생각보다 살 게 많네. 조금만 더 기다려요. 혹시 화장실은?"
"됐어. 괜찮으니까 일 보고 와."

늦을 거라 이미 예상해서인지 화는 나지 않았다. 그냥 그 많은 사람 속에 혼자 버려진 느낌이 싫었고 옆사람이 내 통화 내용을 듣는 게 싫어서 작게 말한 것뿐인데, 내 귀로 들어오는 내 목소리에 내가 놀랐다. 조금의 높낮이도 없는 내 말투, 그건 조금 전 그 남자의 말투였다.

그 남자의 목소리는 분명 차분했고, 침착했었다. 그런데 그 목소리에서는 어떤 여유도 품위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서늘한 기운에 오싹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런데 내가 그 말투를 따라 하고 있었다.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얼굴에만 표정이 있는 게 아니다. 말에도 표정이 있다. 음절 하나하나가 이어져 어울리는 말의 가락, 우리가 '말투'라고 부르는 이것엔 말하는 이의 감정이 들어 있다. 어색한 표정이나 말투에도, 비록 거짓일지라도 감정이 들어 있는 건 분명하다.

기쁠 수도, 슬플 수도, 화가 날 수도 있는 그 사람의 마음, 사람을 대하는 데 이런 마음이 없을 수 있을까?

1인 세대가 증가하고, 혼술이니 혼밥이니 혼자 하는 게 유행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우리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 아니던가. 혼자만의 여유와 기쁨을 누리는 것과 혼자 동떨어져서 누구와도 어울리지 않는 것은 분명히 다른 얘기다. 그렇기에 우리는 어떻게든 어울려 살아야 하고, 그러려면 서로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꼭 필요하다. 

이해가 이성의 영역이라면 관심은 감정의 영역이다. 그렇기에 이해가 없더라도 간혹 싸울 수는 있어도, 우리는 이성의 동물답게 대화와 타협으로 얼마든지 이를 극복할 수 있다.

반면 관심이 없다면 상대는 내 눈에 보이는 물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된다. 밉지도 좋지도 않고, 그냥 나한테 이익인지 아닌지만 문제 되는, 한마디로 엄연한 사람인 상대를 수단이나 도구로 밖에 볼 수 없다는 얘기다. 바로 이것이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의 마음이 아닐까?

화를 내는 것보다, 짜증을 내는 것보다 더 나쁜 건 아예 감정이 없는 것, 바로 무관심이 아닌가 싶다. '슬픔이 기쁨에게'라는 시에서 시인 정호승이 말했다.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슬픔은 아픔에서 온다. 사랑도 아픔까지 함께해야 하겠지만 아픔이 없다고 못 할 건 아니다. 하지만 슬픔은 아픔 없이 함께할 수 없다. 그렇기에 시인은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려는 것이리라. 무관심한 사랑과 흘릴 줄 모르는 눈물을 위해서 말이다.

그렇다고 관심이 슬픔만 함께하는 건 아니다. 심리학자 김경일의 <심리 읽어 드립니다>에는 불면과 외로움의 상관관계에 관한 외국 연구 결과가 소개돼 있다. 결론적으로 잠을 못 자면 외로움을 훨씬 많이 느끼게 되는데, 엉뚱하게도 남을 따뜻하게 대하고 배려심을 가지면 잠을 잘 잘 수 있고, 잠을 잘 자면 그만큼 외로움을 덜 느낀다고 한다. 관심을 통한 공감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보여주는 것 같다.

가만히 세 사람의 목소리를 떠올려 봤다. 젊은 여자는 투정을 부릴지언정 분명 관심이 있었다. 카페에서의 여자는 상대에 대한 배려는 물론 존중까지 갖춘 멋진 사람이다. 하지만 남자는 감정이 없었다. 듣기로는 연인 사이인 듯한데도 화도, 사랑도 표현하고 있지 않았다. 미안함에 쩔쩔매는 여자의 목소리와 너무도 차분하고 침착해서 냉정하기까지 한 남자의 목소리가 지금도 내 마음을 서늘하게 하고 있다. 
  

음절 하나하나가 이어져 어울리는 말의 가락, 말투에도 표정이 있고 감정이 있다. ⓒ 김미래/달리

 
표정에도, 말투에도 감정이 필요하다. 물론 나쁜 감정보다는 좋은 감정이면 더욱 좋겠지만, 그래도 감정이 아예 없는 것보단 백배 낫다. 한마디로 관심이 필요하단 얘기다.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한껏 목소리를 좋게 해서 말했다.

"어, 천천히 와도 돼. 난 괜찮아. 편하게 앉아서 스마트폰 듣고 있는데 뭐."

잠시 말이 없던 아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자기, 괜찮아? 혹시, 뭔 일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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