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3.10 14:52최종 업데이트 24.03.10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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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짓 우쭐한 마음에 내 글을 보여준 적이 있었다. 묘하게 어긋난 내 글을 잘도 지적하는 선배 누나가 말했다.

"이 글은 너무 화가 나 있어."


한때 시인을 꿈꿨던 친구가 말했다.

"억지가 있어. 자연스럽지 않아."

글이 좋다면서도 구석구석 헛소리를 잘도 찾아내는 아내의 친구가 답했다.

"좋긴 한데, 조금 장황하단 느낌이 들긴 하네요."

순간 울컥해서 열심히 설명하는데 변명이란 핀잔만 더해졌다. 괜히 억울한 마음에 요란한 헤비메탈로 귀만 혹사하다가 결국 그날 밤늦게 내 글을 천천히 다시 들어 봤다. 우습게도 그들의 지적이 고스란히 흘러나왔다. 그러고는 그날 오후, 웃고는 있었지만 가슴 가득 화를 품고 있는 나를 깨달았다. 

차 한 잔 놓고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다가 한참 쟁점이 되는 정치 문제 하나를 화제에 올렸다. 내가 보기에는 그냥 인간의 도리 문제에 불과한 것이었다. 다행히도 우리는 큰 이견이 없어서 분위기가 괜찮았는데, 선배가 갑자기 나를 제지하고 나섰다.

"잠깐, 천천히 해. 이러면 괜히 내 말을 듣고 있는 사람을 윽박지르는 것 같잖아."

너무나 당황해서 나도 몰래 숨이 멈춰졌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크고도 빠른 말투로, 탁자까지 탁탁 치면서 침을 튀기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화가 많아진 이유
 

원치 않는 소리도 마음의 눈은 외면하지 못한다. ⓒ 김미래/달리

 
내 성격이 조금 급한 건 사실이다. 목소리도 큰 데다가 흥분도 곧잘 한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것만으로 요즘의 나에 대해 말하기는 어렵다. 나는 당장이라도 터뜨릴 커다란 '화'를 마음속에 가득가득 채워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안타깝게도 거기에는 내 마음의 눈이 한몫하고 있었다.

시각을 대신하는 내 마음의 눈을 만들어 주는 감각 기관은 모두 소중하고 중요하다. 그런데 요즘 청각이 원치 않는 정보를 너무 많이 주고 있다. 청각은 다른 감각 기관과는 달리 의식하지 않아도, 심지어 다른 데 관심을 쏟고 있더라도 자기를 둘러싼 각종 정보와 위험을 잘 알려준다. 요즘은 바로 이게 문제였다. 

시력을 잃고 난 후에야 안 사실이지만, 어떤 소리에 의도적으로 집중하지 않는다면, 귀를 통해 듣는 소리는 무조건 크고 선명한 것이 우선이다. 가깝다고 더 잘 들리는 것도 아니고, 듣기 싫은 소리라고 덜 들리는 것도 아니다. 

시력을 잃고 난 후 나는 한동안 사람들이 많은 식당이나 술자리에서 이야기를 나누기가 무척 어려웠다. 대화를 하고 있는데 옆자리나, 심지어 다른 테이블 사람의 목소리가 더 크고 선명하게 들릴 때가 많았다. 그럼 그 뜻밖의 소리는 마음의 눈을 통해 엉뚱한 이미지를 만들어서 내가 대화하는 것을 어렵게 하곤 했다.

다행히도 적응의 동물답게 나는 지금은 웬만한 소음 속에서도 어느 정도 대화가 가능하지만, 평등한 소리로 인한 불편함은 여전하다.

2002 한일 월드컵부터인 것 같은데, 우리나라 식당이나 공공장소에는 커다란 TV가 설치되어 항상 켜져 있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정치에 정말 관심도 많고 나름의 전문가도 많다. IT 강국답게 인터넷이나 SNS에서 온갖 정보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그런데 요즘 이렇게 평등하게 내 귀를 통해 들어온 소리가 내 마음의 눈을 통해 원치 않는 그림들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그 그림들의 대부분은 완전 디스토피아다.

지구촌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가까워진 세계, 우주를 탐험하고 인공지능이 인간을 대신한다는 데, 지구촌 곳곳에서는 여전히 총탄이 빗발치고, 폭탄이 터지고, 비명 속에 사람들이 죽어 간다.

더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던 정치인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오히려 화를 낸다. 세상을 이끈다면서도 거짓이 분명한 것조차 수단이요 방법일 뿐이라고 말한다.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 너의 탓이요 너의 불행일 뿐이라 주장한다. 남아서 버린다는데 모자란 사람 얘기가 끊이지 않는다. 성적 앞에서 친구는 사라지고 서열과 경쟁만이 있다.

나만 이런 걸까? 물어보니 아내도 친구들도 비슷했다. 그런데 그들은 나보다는 '화'가 덜했다. 대화에도 청각보다는 시각이 더 큰 역할을 하니까, 그들에게는 원치 않는 '그 소리'를 시각적 이미지가 어느 정도 막아주는 것 같았다. 

실제로 시각적 이미지는 청각이 주는 정보에 우선하는 것 같다. 우리가 대화를 통해 상대와 소통하는 데는 말보다도 표정이나 몸짓과 같은 시각적 이미지가 더 큰 영향을 끼친다고 하지 않던가.

그런데 감정에 관해서는 반대다. 심리학자의 말에 의하면 시각보다는 청각이 감정에 더 큰 영향을 끼친다고 한다. 그래서 같은 뉴스를 TV로 볼 때보다 라디오에서 들을 때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이다. 

아, 그래서 내가 문제의 '그 소리'에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한 거였구나. 시각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내 마음의 눈은 다소 감정적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과장된 이미지를 만드는 건 아닐까? 정보보다는 감정 전달이 목적인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실제보다 조금 과장된 이미지를 만드는 것처럼 말이다.

할 수 없다, 달리 생각할 수밖에
 

내 떡도 남에게는 남의 떡인데, 남의 떡만 커보이는 어리석음이 불행한 개인, 가정, 국가를 만드는 게 아닐까. ⓒ 김미래/달리

 
결국 마음의 눈은 사실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느낌이 중요하단 얘기다. 생각해 보니 시력을 잃고 난 후 나도 사실보다는 느낌으로 마음속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느낌에 영향을 끼치면 될 것 같다. 주문이라도 외워 마음을 다잡고 각오를 다지면 되지 않을까? 시각이 주는 정보가 없기에 할 수 없는 게 아니라 달리 생각해야 하는 것 같다. 

나는 문제의 '그 소리'에 대응할 나만의 도구가 필요하다. 원치 않은 소리란 것을 마음의 눈이 재빨리 깨닫게 할 수 있는 어떤 것. 주문이라도 외워 볼까?

"수리수리 마수리"로 무엇이든 변할 수 있고, "치키차카쵸코쵸"만 외치면 슈퍼보드를 타고 날아다니는 손오공은 천하무적이 되지 않았던가. 나라고 못 할 것도 없다. 마음의 눈은 느낌이 중요하다. 느낌에만 변화를 줘도 맘속 '화'를 충분히 다스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어떤 주문을 만들어 볼까? 주문을 만들려면 아무래도 문제의 '그 소리'에 관한 충분한 이해가 먼저 필요할 것 같다. 
 
행복한 가정은 대부분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고, 불행한 가정은 대부분 다른 이유로 불행하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에 나오는 그 유명한 첫 문장이다. 여기서 '가정'은 '개인'이나 '국가'도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럼 누구나 인정할 '행복할 수 있는 비슷한 이유'가 있다는 건데, 그럼 그걸 가지면 모두가 행복해진다. 

그런데 왜 불행한 가정, 개인, 국가가 있을까? 갖기 싫어서는 아닐 테고 그럼 가질 수 없어서? 왜 가질 수 없는 거지? 모자라서? 그럼 좀 나누면 되지 않을까? 혹시 그걸 나누기 싫어서, 아니면 그걸 빼앗으려고 싸우는 건가?

이런 말도 있다.
 
우리는 단지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보다 행복해지기를 원한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해지기 어렵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실제보다 더 행복하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몽테스키외가 한 말이라는데, 이 말이 맞다면, 톨스토이는 거짓말을 한 건가? 애초에 행복한 가정이 있을 수 없으니까. 아니다. 행복한 개인도 가정도 있을 수 없다니, 그것도 말이 안 된다. 좀 더 살펴야겠다.
 
남의 떡이 커 보인다.

유명한 우리 속담인데, 요즘은 남의 떡은 크고도 맛있어 보인다고까지 한다. 그런데 이것은 참으로 어리석고도 멍청한 말이다. 남에게는 나도 남이 아니던가? 그럼 '내 떡'이 남에게는 또 다른 '남의 떡'이 될 테니까, 결국 같은 '떡'이 큰 '떡'도 되고, 작은 '떡'도 되는 꼴이다.

오호, 그럼 혹시…? 몽테스키외가 말한 '행복'이 바로 이 '떡'은 아닐까? 우리는 어리석게도 '남의 떡'이 커 보이고, 남보다 큰 '떡'을 갖기를 원한다. 그럼 어리석은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남의 떡'을 빼앗거나, 절대 커 보일 수 없는 '남의 떡'을 만들어 놓아야 한다. 이런 어리석은 욕망에 사로잡히는 것은 개인일 수도, 가정일 수도 그리고 국가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런 어리석은 자들은 남도 자기처럼 생각한다고 확신한다. 

비교하고, 비난하고, 화를 내고, 이길 수만 있다면 수단과 방법은 무시하고, 더 나아가 전쟁까지 하는 게 바로 이런 이유가 아닌가 싶다.

그러니까 문제의 '그 소리'를 만들어내는 것은 욕망에 눈이 멀고 어리석기까지 한 결과물이었다. '내 떡'인지 '남의 떡'인지에 따라 크기가 달라지는 환상에 빠진 어리석은 욕망의 결과물. 말하고 보니 남 얘기가 아니었다. 부끄럽지만, 내 마음의 눈이 이런 내 어리석음을 그리고 있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만약 권력과 힘을 가진 자라면 더욱더 그럴 것이고, 그렇지 못한 우리도 이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아니, 벗어나기가 무척 어렵다. 하지만 과거에도, 지금 이순간에도 그 유혹을 극복하려 애쓰는 사람들이 우리의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지 않은가. 나도 그들과 함께하고 싶다. 그래서 그런 그림을 내 마음의 눈이 그려줬으면 좋겠다.

"히바아보아야아, 남의 떡은 내 떡, 내 떡도 남의 떡!" 

나는 문제의 '그 소리'가 귀를 통해 들어오면 이렇게 주문을 외울 것이다. 그럼 분명히 지금과는 다른 그림이 그려질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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