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2.29 21:06최종 업데이트 23.12.29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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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일 방송통신위원장 후보자가 27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서 의원 질의를 듣고 있다. ⓒ 남소연

   
이른바 '김 순경 사건'은 여자친구를 살해한 혐의로 1년 이상 억울한 옥살이를 하다 뒤늦게 진범이 잡혀 누명을 벗은 전직 경찰관 김아무개씨 사건을 일컫는다. 이 사건은 국가 공권력의 본질과 경찰·검찰의 역할에 근본적 질문을 던지게 하는 주요 사례 중 하나로 꼽힌다.

김 순경 사건이 30년 만에 재조명받은 것은 김홍일 방송통신위원장 때문이다. 이 사건 담당 검사였던 김 위원장은 지난 27일 인사청문회에서 "늘 가슴 아프고 나 때문에 어려움을 당했던 일에 대해 사죄하고 싶다"고 말했다. "전화번호를 알려주면 연락해서 (사과) 기회를 만들겠다"고도 했다. 진심이라고 믿고 싶지만, 미흡하고 어색하다. 이제 와 이렇게 말할 거면 왜 진작 사과하지 않았단 말인가? 30년이 지나는 동안.

김 순경에게 평생 한을 품게 했던 검사 김홍일

1992년 11월 서울 관악구 신림6동에 있는 한 여관에서 여성 변사체가 발견된다. 사건을 수사한 서울 관악경찰서는 신림9동 파출소 소속 김 순경을 용의자로 체포했다. 언론에 크게 보도된 사건이라 경찰청에서 보강조사를 벌였으나 결론은 바뀌지 않았다.


경찰은 두 사람이 당일 새벽 3시 30분부터 아침 7시까지 그 여관에서 같이 묵었던 사실을 유력한 정황증거로 제시했다. 김 순경이 부인하자 며칠씩 잠을 재우지 않고 구타했다.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김 순경은 거짓으로 자백했고, 경찰은 사건을 검찰(서울지검 강력부)로 송치했다. 김 순경은 '검찰에 가면 바로 잡히겠지' 하는 실낱같은 기대를 품었다.

그런데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수사권, 수사지휘권과 기소권을 독점한 검찰이 경찰의 모든 수사를 지휘하면서 필요하면 직접 재수사를 벌이던 시절이었다. 경찰의 잘못된 수사를 바로 잡아줄 거라고 기대했던 검찰은 외려 한술 더 떴다. 경찰은 폭행치사죄를 적용했는데 그보다 훨씬 무거운 살인죄로 기소한 것이다. 김 순경에게 평생 한을 품게 했던 그 검사가 바로 김홍일 위원장이었다.
 

억울한 옥살이끝에 출소한 김 순경의 모습을 보도한 1993년 12월 17일자 한겨레신문. ⓒ 한겨레

 
강력/특수통으로 꼽히던 김 위원장은 윤석열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이명박 정부 시절 검사로서 전성기를 누렸다. 2007년 대통령 선거 직전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는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 후보의 BBK 주가조작 및 서울 도곡동 땅과 다스 차명소유 비리 의혹에 대해 무혐의 처분했다. 당시 김 위원장은 서울중앙지검(서울지검 후신) 3차장으로서 이 사건을 지휘했다. 나는 그가 수사 결과를 발표할 때 보였던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이후 윤석열 검사가 참여한 BBK 특검은 이명박  당선자에게 깔끔한 면죄부를 안겨줬다.   

김 위원장은 이명박 정부 첫 검찰 인사에서 검사장(사법연수원 부원장)으로 승진한 후 대검 마약조직범죄부장을 거쳐 특수부 검사의 꿈인 대검 중수부장에 올랐다. 이때 중수2과장으로서 말 많고 탈 많은 부산저축은행 비리를 수사한 검사가 바로 윤 대통령이다. 이후 김 위원장은 부산고검장을 지낸 후 박근혜 정부 출범 초기 검찰을 떠나 법무법인 세종 변호사로 변신했다.

김 순경 사건 1심 재판부는 징역 12년을 선고했다. 김 순경은 항소했지만 기각됐다. 상고심이 진행 중이던 1993년 11월 진범 서아무개씨가 잡혔다. 단순 강도범이었는데 우발적으로 성관계를 시도하다 살인까지 저지른 것으로 밝혀졌다. 공교롭게도 서씨를 체포해 이 사건의 진실을 밝힌 곳은 애초 강압수사로 애먼 사람을 잡았던 관악경찰서였고, 진범을 넘겨받아 재수사를 벌인 곳도 서울지검 강력부였다.

분노에 찬 김 순경의 뜨거운 목소리

일요일인 1993년 12월 12일 밤, 서울 서초동 서울지검 청사 12층은 불빛으로 환했다. 검사와 피의자 간 고성이 오갔다. 서울지검 강력부 소속 이경재 검사와 서울구치소에서 불려 나온 김 순경이었다. 검사는 "확실한 증거 확보"를 내세워 김 순경을 재조사하려 했다. 이에 김 순경과 가족은 "더는 피의자 신문에 응할 수 없다. 참고인 대우를 해달라"며 조사를 거부했다. 당시 나는 김 순경 가족의 협조를 얻어 유일하게 그 현장을 지켜본 기자였다.

김 순경과 가족이 '무조건 석방'을 요구하면서 검찰 직원들과 거친 실랑이가 벌어졌다. 잠시 뒤 이 검사 방에서 나온 진범 서씨가 옆방인 김홍일 검사 방으로 들어갔다. 김 순경 가족의 분노가 폭발했다. 밤새 버티던 김 순경은 다음 날 아침에야 서울구치소로 되돌아갔다.

이틀 뒤인 12월 14일 김 순경 가족과 함께 서울구치소로 가서 그를 면회했다. 김 순경의 처음이자 마지막 옥중 인터뷰였다. 면회 시간이 10분도 안 되기에 핵심 질문을 빠르게 던져야 했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말 중에서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이 "검사의 눈빛"이다. 분노에 찬 그의 뜨거운 목소리도 잊을 수 없다. 다음은 당시 인터뷰 기사 전문이다.
 
며칠 동안 가족을 설득한 끝에 지난 14일 오전 10시 서울구치소 면회실에서 김 순경을 만날 수 있었다. 그의 어머니, 누나와 함께였다. 기자를 보고 처음 "당신은 누구냐. 아무도 못 믿겠다"라고 경계하던 김 순경은 "12일 밤 검찰 조사 때 가족과 함께 있었던 사람"이라고 소개하자 마음을 열었다.

당시 사건에 대해 묻자 그의 눈빛이 젖어들기 시작했다.

- 사건 초기 관악경찰서에서 왜 거짓 자백을 했는가?
"잠을 재우지 않았는데 그 고통을 이겨낼 수 없었다. 사건 사흘 전부터 잠을 몇 시간밖에 못 잔 데다 형사들이 돌아가며 잠 안 재우기 고문을 했다."

- 처음에는 목격자로 조사받다가 부검 결과가 나온 뒤 살인 혐의를 받게 된 걸로 아는데.
"사망 시간, 항문 온도 측정 등 부검 결과가 내게 불리하게 나왔다. 이 부검 결과를 두고 온갖 회유와 협박을 가했다. '절대로 빠져나갈 수 없으니 자백하면 폭행치사 혐의로 조서를 꾸며 나중에 집행유예로 해주겠다'고 했다. 난 '아니다'라고 결백을 주장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나 스스로를 속게 만들었다. 아무도 내 말을 믿어주지 않는 상황에서 도저히 누명을 벗을 길이 없다는 절망감에 눈앞이 캄캄했다. 나는 자포자기했다."

- 경찰청에서는 어떤 조사를 받았나?
"경찰청에서는 더 심했다. 구타와 함께 며칠 동안 잠을 재우지 않았다. 억울해서 도저히 이대로 몰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은 한 형사가 '한번 솔직히 얘기해보자'며 진지한 낯빛을 했다. '나는 범인이 아니라'라고 말하자 그는 곧 '이 XX 장난치고 있네'라며 구타했다. 나는 다시 거짓 자백을 늘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 검찰 조사 과정은?
"계장이 3회 조사했는데 '죽이지 않았다'는 내 말은 들은 척도 안 했다. 검사는 마지막에 딱 한 번 조사했을 뿐이다. 그에게 눈물로 호소했다. 그는 '일이 이렇게 된 건 너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말하면서 내 눈빛을 피했다. 나는 '당신들은 악마지 사람이 아니다'라고 외쳤다."

- 왜 처음에 자살이라고 허위 신고를 했나?
"원래 시력이 나쁜 데다 그녀가 죽은 모습을 봤을 때 너무 놀라 정신이 없었다. 입술 부위가 거무스레한 것이 약을 먹은 흔적 같았다. 얼결에 '자살한 것 같다'고 말한 것을 그런 식으로 조서에 기록했다."

- 검찰 재조사 과정에서 약간 실랑이가 있었던 걸로 안다.
"조사를 안 받겠다는 게 아니라 가족과 변호인이 입회한 자유로운 상태에서 받겠다는 게 내 뜻이었다. 계속 두 손을 묶은 채 피의자 취급하는데 참을 수가 없었다."

- 김 검사가 사과했는가?
"'경찰에서 잘못했다'라고만 할 뿐 직접적인 사과는 없었다."
(기사 원문에는 "경찰서에서 '잘못했다'라고만 할 뿐 직접적인 사과는 없었다"로 표기돼 있지만, 김 위원장이 당시 아무런 사과 없이 경찰에만 책임을 돌렸다는 최근 김 순경 인터뷰 기사 내용을 감안하면 '경찰에서 잘못했다'가 정확한 표현일 듯싶어 수정했음을 밝힘).

입회교도관의 제지로 그와의 얘기는 여기서 그쳤다.

국민을 위한 검찰로 거듭나는 길
 

김홍일 국민권익위원장이던 지난 12월 5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 입장하고 있다. ⓒ 연합뉴스


김 순경 사건은 검찰개혁의 목표인 수사/기소 분리와 관련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검찰의 존재 이유에 대한 성찰이다.

검경 수사권 조정 이후 검찰의 수사지휘권이 폐지되고 직접수사가 축소되자 검찰은 강력히 반발했다. 윤석열 정부 출범 직전 더불어민주당은 형사소송법과 검찰청법을 일부 개정해 검찰의 직접수사 범위를 더 좁혔다. 그러자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이른바 '시행령 쿠데타'를 통해 검찰 수사권을 복원하고 확장했다. 그에 따라 검찰의 권한과 업무는 거의 검경 수사권 조정 이전 상태로 되돌아갔다. 이른바 '검수원복'이다.

한 장관과 검찰은 "국민의 이익" 또는 "국민의 피해"를 내세웠지만, 검찰개혁을 염원하는 국민 눈에는 검찰권력을 연장하려는 조직이기주의로 비칠 뿐이다. 김 순경 사건에서 보듯이 기소가 본연 임무인 검찰은 무슨 이권 다툼하듯이 직접수사에 집착하지 말고, 경찰 수사를 견제하는 기능에 충실해야 한다.

언론사에서 데스크가 자기 기사 욕심내다가는 기자들 기사의 문제점을 제대로 못 보게 된다. 검찰도 마찬가지다. 보완수사 요청과 시정조치 요구, 재수사 요청 등 현행법이 보장한 감독권을 적극 활용해 경찰 수사를 꼼꼼히 점검하고 실수나 과오를 바로잡는 데 최선을 다하는 것이 진정 국민을 위한 검찰로 거듭나는 길이다. 여러 번 얘기하지만, 이건 특정 정권과 상관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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