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9.25 11:02최종 업데이트 23.09.25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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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 예비역과 예비역 가족들이 23일 오후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인근에서 해병대 예비역 전국연대 주최로 열린 ’고 채 해병 순직 진상규명 촉구 및 해병대수사단 수사 외압 규탄 집회’에 참석해 호우피해 실종자 수색작전 중에 발생한 해병대 고 채 모 상병 순직 사건에 대한 철저한 진상규명, 재발방지 대책 수립, 지휘 책임자 처벌과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의 명예 회복 등을 촉구하고 있다. ⓒ 유성호

   
플라톤은 <국가론>에서 스승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동굴의 우상'을 경계한다. 동굴 안쪽에 죄수들이 앉아 있다. 뒤쪽의 동굴 입구에는 횃불이 타오르고 있다. 사지와 목이 묶여 뒤를 돌아볼 수 없는 죄수들은 앞쪽 벽면에 비친 그림자를 실상으로 여긴다. 족쇄에서 풀려나 지상에 다녀온 누군가가 세상과 사물의 실체를 알려줘도 그들은 믿지 않는다. 동굴 속 환경에 익숙해져 지상에 올라가길 꺼린다.

고 채 해병 사망 사건을 두고 국방부와 해병대 전 수사단장 박정훈 대령의 주장이 맞선다. 맹목적 상명하복과 권력의 뜻에 충실한 자들은 소크라테스가 말한 '동굴의 그림자'를 실상이라고 우기거나 착각한다. 눈앞에 보이는 것만 믿도록 길든 그들에게는 법과 규정에 따라 사건을 처리한 박 대령의 '소신'이 오히려 허상이다.


지난 23일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 앞에서 진행된 '고 채 해병 순직 진상 규명 촉구 및 해병대 수사단 수사 외압 규탄 집회'에서 연단에 올랐다가 야유를 받고 쫓겨 내려간 전도봉 전 해병대 사령관도 그림자를 실체로 오인한 듯싶다. 집회 성격과 맞지 않게 해병대 병 출신 예비역들이 군기가 빠졌다는 취지의 '오합지졸론'을 펼 때부터 조짐이 이상했는데 기어코 대형 사고를 쳤다. 무지와 편견이 빚은 오류였다.

전씨는 "법이 바뀌어서 군에서 사망 사고가 나면 지휘관이고 뭐고 아무 권한이 없다. 경찰에 (권한이) 다 있다"며 "박정훈 대령은 해병대를 수사하고 혐의자를 가려냈는데 그럴 권한이 박 대령에게는 없다"고 주장했다. 전씨의 주장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하지만 핵심 내용인 후자가 틀린 만큼 전체적으로 허위주장이다. 누구 말마따나 사실과 거짓이 뒤섞인 이런 가짜뉴스가 더 위험하다.

채 해병 사건을 통해 온 국민에게 알려진바, 지난해 7월부터 시행된 개정 군사법원법에 따르면 성폭력 사건, 군인 사망 사건(사망의 원인이 된 범죄), 입대 전 범죄는 군에서 자체 수사하지 말고 민간 수사기관에 넘겨야 한다(군사법원법 2조/228조). 대통령령('법원이 재판권을 가지는 군인 등의 범죄에 대한 수사절차 등에 관한 규정' 7조)도 이를 뒷받침한다.

그런데 이때 그냥 넘기는 게 아니라 인지통보서라는 걸 작성해서 이첩해야 한다('법원이 재판권을 가지는 군인 등의 범죄에 대한 수사절차 등에 관한 훈령' 7조). 인지통보서에는 피의자 인적사항, 죄명, 인지 경위, 범죄사실을 적어야 한다. 그러려면 기초 조사 또는 수사를 해야만 한다. 박 대령이 이끄는 해병대 수사단은 바로 그 일을 한 것이고, 이는 정당한 직무수행이었다.

전씨 주장대로 해병대 수사단이 권한 없는 일을 했다면, 국방부도 마찬가지다. 국방부 조사본부가 재조사를 통해 애초 수사단이 특정한 혐의자 8명 중 대대장 2명만 피의자로 적시해 경찰에 이첩한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군에서 사전 조사권을 갖는다는 점에서 언뜻 국방부 재조사도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박 대령은 맞고, 국방부는 틀렸다. 왜? 조사본부의 재조사는 국방부 장관을 비롯한 군 지휘부의 불법적 권한 행사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일종의 특례조항인 3대 범죄에 관해서는 군 지휘부가 관여하면 안 된다. 그게 개정 군사법원법의 취지다. 개입하면 직권남용이다. 박 대령이 장관 지시를 받고 고민하는 해병대 사령관에게 "그런 지시를 내리지 않으면 좋겠다. 사령관님도 다칠 수 있다"고 단호하게 말할 수 있었던 이유다.

쫓기듯 퇴장한 전도봉 전 해병대 사령관
 

전도봉 제22대 해병대 사령관이 23일 오후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인근에서 해병대 예비역 전국연대 주최로 열린 ’고 채 해병 순직 진상규명 촉구 및 해병대수사단 수사 외압 규탄 집회’에서 격려사 도중 참석자들의 항의로 발언대에서 내려오고 있다. ⓒ 유성호


군검찰은 박 대령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서에서 각 군 참모총장과 국방부 검찰단에 대한 장관의 지휘/감독권과 참모총장과 상급자의 군검찰 지휘/감독권을 규정한 군사법원법 38조, 39조, 40조를 들어 "장관으로 이어지는 지휘/감독 체계에 따라 구체적 사건에 대한 지휘가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부대의 장이 소속 군사경찰을 지휘 감독한다'는 '군사경찰의 직무수행에 관한 법률' 5조도 주요 근거로 제시했다.

그렇게 주장할 수는 있다. 그러나 개정된 법 취지에도 어긋나고 논리도 맞지 않는다. 군형법 대상인 일반 범죄라면 그런 주장이 맞는다. 하지만 3대 범죄에 그걸 적용하는 건 억지다.

그럴 거면 뭐 하러 국회에서 애써 관련 법조항을 개정했겠는가? 마치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검찰 수사권을 축소한 검찰청법을 시행령으로 무력화했듯이, 국방부도 지휘관의 수사 개입을 부분적으로 차단한 군사법원법을 형해화하려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나는 단상에서 내려간 뒤 무대 뒤편에서 몇몇 예비역 장병에게 '훈계'를 하는 전씨에게 다가갔다. 역전 용사들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서려 있었다. 중장년인 그들은 80대 전직 사령관에 대한 예우와 실망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했다.

내가 개정된 군사법원법 취지와 국방부 훈령을 언급하면서 "사령관님, 규정을 잘못 알고 있다"고 지적하자 전씨가 당황한 듯 "누구냐"고 물었다. 신분을 밝히고 설명을 이어가자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이어 현장을 빠져나가는 그에게 따라붙어 경찰에 넘기는 인지통보서 기재사항을 일러주면서 "박 대령은 법과 규정에 따라 처리했다. 잘 확인해보라"고 말해줬다.

쫓기듯 퇴장하는 전씨의 뒷모습을 보면서 씁쓸했다. 그는 김영삼 정부 때 비사관학교(사관후보생)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해병대 사령관을 지냈다.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는 일이다. 그래서 실력이나 리더십과 별개로 인기를 누렸다. 사관학교 출신만 사령관에 오르는 전통에 대한 일반 장병의 반감 덕분이기도 했다.

전씨는 화끈한 성격에 해병대 위상을 드높이고 병사들의 사기를 높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공군과의 패싸움, 불명예제대 이후 재입대, 헌병대 영창 수감 등 갖가지 '기행'으로 화제가 됐다. 사령관 재직 중에는 진급 비리에 연루돼 뇌물수수 혐의로 옷을 벗었는데,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됐다.

전씨에 대한 엇갈린 평과 별개로 역대 어느 사령관도 나서지 않는 상황에서 그가 채 해병 집회에 참석하겠다는 방침을 밝히자 주최 측은 고무됐다. 전씨 측 관계자가 행사 하루 전날 '전도봉 22대 사령관 집회 참석 입장문'이라는 글을 전파하기도 했는데, 집행부를 통해 내게도 전달됐다. 지휘관의 책임을 묻고 공정한 수사를 촉구하는 글이었다.

그가 이날 집회에서 왜 돌출발언을 했는지는 의문이다. 이런저런 말이 있지만, 잘못된 정보에 따른 오판일 개연성이 크다. 또는 군 질서를 중시하는 관점에서 상관 지시에 어긋난 행동을 한 박 대령에 대한 거부감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그는 그림자를 실체로 여기는 엉터리 주장을 함으로써 본의 아니게 정의와 반대편에 서게 됐다.

'VIP 외압설'의 진원지 김계환 해병대 사령관
 

김계환 해병대 사령관이 25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국방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의원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 남소연


현직 해병대 사령관 김계환 중장도 전씨와 비슷한 노선을 선택했다. 경로는 다르지만, 방향과 목적지는 다르지 않다. 박 대령의 진술과 주변 정황에 비춰보면, 김 사령관은 애초 박 대령과 비슷한 지점에 서 있었다.

24일 군인권센터가 공개한 해병대 수사단 중앙수사대장과의 통화내용도 같은 맥락이다. 8월 2일 밤에 이뤄진 이 통화에서 김 사령관은 해병대 수사단 수사의 정당성을 인정하면서 박 대령의 행동을 이해하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아울러 '외압'에 대한 문제의식도 드러냈다.

하지만 군검찰 조사에서는 다른 얘기를 했다. 김 사령관은 이날 중수대장과의 통화에 앞서 국방부 검찰단으로부터 4시간 가까이 조사를 받았다. 첫 진술에서는 경찰에 수사서류를 넘기는 시기를 늦추라는, 이른바 이첩 보류 지시와 관련해 "기억나지 않는다"라고 비켜갔으나, 2, 3차 진술 때는 박 대령이 자신의 거듭된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박 대령을 항명죄로 입건한 군검찰 논리에 동조한 셈이다.

박 대령이 '항명'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김 사령관으로부터 명확한 지시가 없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이 '부당한 명령'이었다는 점이다.

박 대령에 따르면, 김 사령관은 지시를 한 게 아니라 의견과 판단을 구했다. "이렇게 해라"가 아니라 "어떻게 하지?"였다. 김 사령관의 어정쩡한 태도는 국방부 장관이 전날 결재를 뒤집고 갑작스레 이첩 보류를 지시한 7월 31일 오후부터 경찰에 수사서류를 넘긴 8월 2일 오전까지 계속됐다는 게 박 대령 주장이다.

김 사령관은 햄릿형이다. 그는 계속 고민하고 걱정하다가 수사단의 '결행'이 이뤄진 다음에야 "이첩을 중단하라"고 외쳤다. 강압적으로 지시하지 않고 협의했다는 점에서 합리성도 엿보이나, 햄릿이 가진 열정과 정의감은 찾기 어렵다.

반면 박 대령은 돈키호테형이다. 주변 시선에 아랑곳없이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바를 과감히 밀어붙였다는 점에서 말이다. 물론 돈키호테의 엉뚱하고 우스꽝스러운 행동과는 거리가 멀지만, 기존질서에 도전하고 저항했다는 점에서 닮았다.

그는 상명하복을 철칙으로 삼는 군 조직에 균열을 일으킨 죄로 수사를 받고 재판에 넘겨질 처지다. 돈키호테가 세상 사람들에게서 비웃음을 사고 수난을 당한 것과 겹친다.

김 사령관은 이른바 'VIP 외압설'의 진원지다. 그는 부인하지만, 박 대령과 수사관들의 증언에 비춰보면 그가 사실과 다른 얘기를 하는 게 아니냐는 의심을 받을 만하다. 수사관들은 당시 박 대령으로부터 '외압'과 관련된 얘기를 듣고 공유했다고 진술했다.

소크라테스는 "국민 각자가 자신의 소임을 다하는 것이 정의이고, 그렇지 못한 것이 불의"라고 갈파했다(플라톤 <국가론>). 두 전·현직 해병대 사령관은 해병대의 명예가 걸린 이 역사적 사건에서 자신의 소임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알고 있을까? 법리 논쟁을 떠나 박 대령은 자신의 소임을 다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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