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0.23 14:50최종 업데이트 21.10.23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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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양양군 남애항 일출. ⓒ 권우성

 

동해안 사천 해수욕장에서 만난 이 분의 정체는? ⓒ 김병기


파도타기용 검은 슈트를 입은 이 사진의 주인공은 누굴까?

"백기완 선생님이 살아계실 때, 바로 여기서 저한테 말했어요. '허~ 동해안의 물개구먼, 불교계의 박태환이야!' 하-하-하."


알고 지낸 지 15년이 지났지만, 이런 파격은 처음이었다. 속초 아바이마을에서 자전거 페달을 돌려 사천 해수욕장에서 만난 유쾌한 사람의 정체는 나중에 소개하기로 한다. 여행이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도 이런 뜻밖의 만남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여행지에선 같은 사람도 낯설어 보일 때가 있다. 낯선 풍경이 펼쳐지고, 낯선 상황에도 마음이 비교적 너그럽다.

[몽돌소리길] 가장 힘든 시간이 '최고의 순간'

낙산사까지 내비게이션을 찍어보니 13.9km였다. 이 구간 경사도는 3%. 거의 평지나 다름없다. 속초해수욕장을 지나 대포항에 도착하기 전만 해도 '난전'에 대한 오래된 기억을 떠올렸다. 항구 입구 양 옆으로 늘어선 난전에는 인근 바다에서 잡힌 넙치·가자미·방어 같은 싱싱한 활어들이 가득했다. 관광객들이 곳곳에 쭈그려 앉아 흥정을 벌이는 것도 볼거리였다.
 

강원도 속초시 대포항. ⓒ 권우성

 
하지만 이번에 만난 대포항은 15년 전의 기억과 달랐다. 대형 호텔 등 빌딩이 들어서서 스카이라인부터 높아졌다. 설악산을 배경으로 한 오메가(Ω) 형태의 잘 정돈된 항구를 보면서 함께 간 후배는 "예쁘다"고 감탄했다. 하지만 나는 난전에서 회를 썰어주면서 비닐봉지에 한 개라도 더 담아주었던 주름 깊게 패인 손이 아쉬웠다.

한 횟집 대형 간판에서나마 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했다.

"30여 년 전, 엄마가 난전에서 회 썰던 그 자리,
엄마는 항상 줘도 또 주고 싶은 마음이었어요"


대포항에서 나오면 7번 국도다. 국도변 옆 자전거도로를 타고 쌍천교와 물치교를 지나면 몽돌소리길이 나타난다. 해변을 보니 새하얗던 백사장이 어느새 자갈로 덮였다. 솟대가 줄지어 선, 해안선을 따라 시원하게 뻗은 나무 데크길을 달리다가 작은 전망대 앞에 멈췄다. 쪽빛 바다를 배경으로 한 이정표의 작은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가장 힘든 시간이 인생 최고의 시간입니다."

누구의 말인지 저작권 표시는 없었지만, 코로나19로 지친 일상을 탈출해 잠시 걷는 이들에게는 작은 위안이 될 듯했다. 도심 어느 화장실 벽에 붙어 있을 것 같은 글귀지만, 여행은 작은 것에도 마음을 연다. 속도를 늦추면 작은 게 보인다.
 

몽돌소리길의 작은 전망대 ⓒ 김병기

 
[낙산사] 각종 보물 중 나에게 으뜸은 와편 담장

정암해수욕장을 지나면 나오는 후진항부터 낙산사 해수관음상 뒷모습이 보였다. 양양 오봉산 고개를 넘어 낙산사 주차장에 자전거를 세워둔 채 천혜의 절벽에 서 있는 천년고찰을 산책했다. 3대 관음기도 도량이며, 관동팔경으로 유명한 이곳에서 나는 또 다른 기억을 확인하고 싶었다. 낙산사 원통보전과 칠층석탑을 감싼 와편 담장이다.
 

낙산사 와편 담장 ⓒ 김병기

 
강원도 유형문화재 34호인 담장 아래는 돌을 쌓아 습기를 막았고, 담벽은 암키와, 강회, 진흙을 다져 수평으로 줄을 맞춰 쌓았다. 그 사이에 둥근 화강석을 넣어 만든 벽이다. 담백한 황토색 벽면과 원통보전 처마 끝의 화려한 단청, 두 인공물을 사이에 두고 반짝이는 쪽빛 하늘을 사진에 담으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낙산사로 첫 가족여행을 왔을 때 3살이었던 첫째 딸은 이 벽을 배경으로 두 팔을 쫙 펼친 채 사진을 찍었다. 그 뒤 낙산사에 올 때마다 와편 담장을 손으로 쓸어내리곤 했다. 화강석에 어린 딸의 모습이 각인된 담장이다. 그 뒤 몇 번이나 낙산사를 찾았던 건 불교에 조예가 깊거나 절경을 보려던 게 아니었다. 한때 그곳에 머물던 나를 확인하고 싶었다.
 

강원도 양양군 낙산사 해수관음상. ⓒ 권우성

강원도 양양군 낙산사 원통보전과 7층석탑. ⓒ 권우성

강원도 양양군 낙산사 홍련암. ⓒ 권우성

 
삼국유사에 따르면 671년 의상대사가 낙산사를 창건할 때 머무르면서 참선했던 '의상대', 그 양 옆에 깃발처럼 서 있는 노송은 안녕했다. 의상대사가 밤낮으로 기도하다가 붉은 연꽃 속에 나타난 관세음보살을 보고 지었다는 암자 '홍련암', 절벽에 붙은 해당화 꽃이 바람에 흔들렸다. 낙산사를 둘러보는 데는 1시간 남짓, 다시 안장 위에 올랐다.

[양양향교와 하조대] 혁명만 모의하기 아까운 곳
 

강원도 양양군 남대천 연어생태공원. ⓒ 권우성

 
낙산사 아래쪽으로 내려와서 낙산대교를 건너기 전에 남대천으로 거슬러 오르면 연어생태공원이다. 내 키를 훌쩍 뛰어넘는 갈대가 바람에 흔들리면서 잎을 부비며 소리를 냈다. 매년 10월이면 알래스카와 베링해에서 물살을 가르며 떼지어 귀환하는 은빛 무리들의 거친 숨소리 같았다. 내친김에 남대천을 따라 내륙쪽으로 자전거를 몰았다.

이곳서 5.5.km 떨어진 양양향교는 고려 충혜왕 때 세운 곳인데 신진사대부를 떠올릴 수 있는 공간이다. 고려 말 이성계 등 신흥 무인 세력과 함께 권문세족을 누르고 조선 왕조를 여는 데 공을 세운 개혁파의 근거지다. 일부러 해안선을 벗어나서 찾아 나선 길인데 코로나19로 문이 닫혀 명륜당 등 일부만 볼 수 있었다. 
 

강원도 양양군 양양향교. ⓒ 권우성

강원도 양양군 양양향교. ⓒ 권우성

 
하조대로 가는 길은 쪽빛 해변과 울창한 소나무 숲길, 아기자기한 마을길이 번갈아 나타나서 지루하지 않았다. 낙산대교로 내려와 잠시 7번 국도를 탔다가 쏜살같이 질주하는 자동차를 피해 숲길과 마을길로 접어들면서 탄성을 내질렀다.

"아까는 지옥의 길, 여긴 천국의 길이네!"

해변 기암절벽에 우뚝 선 하조대는 1955년 건립된 작은 육각정이다. 조선 개국공신인 하륜(河崙)과 조준(趙浚)이 고려말에 몸을 숨기고 역성혁명을 모의하던 곳이다. <여지도서> 양양도호부 고적조에는 "하조대(河趙臺)는 부 남쪽 30리에 있다. (중략) 세상에 전하기를 조선 초기에 하륜과 조준이 놀고 즐긴 곳인 까닭에 이름 지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하조대 정자에서 바라본 동해와 소나무. ⓒ 권우성

하조대 암석과 소나무. ⓒ 권우성

   
애국가 동영상 첫 소절에 등장하는 하조대 정자 앞 바위섬에 서 있는 소나무를 바라보면서 역사학도였던 후배가 오래된 기억을 떠올리며 입을 뗐다.

"하륜과 조준의 이름을 따서 하조대라 부르죠. 두 사람은 조선 초기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어요. 태조 이성계의 개국공신인데, 이방원의 왕자의 난 때 두 사람이 거기서도 큰 공을 세웁니다. 훈구파의 시조격이죠."

하조대에 앉아 땀을 식히면서 소나무 사이로 보이는 탁 트인 바다를 바라보다가 혁명만 모의하기에는 너무 아까운 장소라는 생각이 스쳤다. <여지도서>도 나왔듯이 하륜과 조준도 그러했을 것이다.

[남애항] 강원 3대 '미항'... 왜 아름답다고 하는 것일까?
 

강원도 양양군 현북면 38선휴게소. ⓒ 권우성

강원도 양양군 휴휴암. ⓒ 권우성

38선 휴게소에서 잠시 쉬면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먹고, 수중거북 바위 위에 기도 도량을 조성한 휴휴암에 잠시 들렀다가 남애항에 도착해 하룻밤을 묶었다. 해돋이가 일품인 강원도 3대 미항의 하나이다. 또 1984년에 흥행했던 영화 <고래사냥>의 촬영지이기도 해서 항구 입구에 고래 조형물을 세워 놓았다.

남애항의 새벽은 번잡했다. 커다란 고무통 위쪽에 구멍을 낸 어항 속에서는 갓 잡은 방어가 아직도 바다 속인 양 물을 휘젓고 다녔다. 물살을 튀기며 4륜 구동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가는 어부들, 어항에서 뛰쳐나온 물고기들이 바닥에 흐르는 물을 먹으려고 입을 쩍쩍 벌리는 게 애처로웠다. 시멘트 바닥에 크기대로 가지런히 정렬된 가자미도 보였다.
 

강원도 양양군 남애항. ⓒ 권우성

강원도 양양군 남애항. ⓒ 권우성

강원도 양양군 남애항. ⓒ 권우성

   
"이건 바짝 데쳐서 야채 넣고 볶아 먹을 겁니다."

작은 오징어의 배를 따는 아주머니가 말했다. 항구에 막 들어온 어선의 갑판 위에 앉아 잠시 쉬고 있는 어부들은 위판장 곳곳에서 벌어지는 경매를 먼발치에서 구경했다. 10여명의 무리들은 우르르 몰려다니면서 순식간에 끝난 낙찰 결과를 '삑-삑-' 호각을 불면서 알렸다. 살아 펄펄 뛰는 항구의 아침, 잠시 이곳을 스쳐 지나가는 이방인의 가슴도 함께 뛰었다.
 

강원도 양양군 남애항. ⓒ 권우성

강원도 양양군 남애항. ⓒ 권우성

남애항에서 부인과 함께 식당을 운영하면서 물속에서 해삼을 잡고 멍게를 따는 ‘머구리’(잠수부)가 본업이라는 김형철 씨(55. 다이빙 강사. 수중촬영 전문가). ⓒ 김병기

 
남애항이 미항으로 불리는 까닭은 이런 삶의 현장 때문은 아니었을까? 이곳에서 부인과 함께 식당을 운영하면서 물속에서 해삼을 잡고 멍게를 따는 '머구리'(잠수부)가 본업이라는 김형철씨(55. 다이빙 강사. 수중촬영 전문가)에게 물었다.

"여긴 미항으로 불리죠. 물속도 아름답습니다. (식당 벽면에 붙은 수중 촬영 사진을 가리키며) 이 물고기가 쥐놀래미인데요, 어디 가지도 못하고 촬영하는 사람을 빤히 쳐다보면서 지키고 있잖아요. 이 앞에 있는 하얀 게 자기가 낳은 알이어서 그렇습니다. 더 가까이 가면 어떤 물고기들은 뒤쪽으로 와서 오리발을 물고 막 흔들어요.(웃음)

물속만 아름다운 게 아닙니다. 항구 위쪽에서 바라보면 사람들이 일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어장배는 새벽 3시에 항구를 떠나서 2마일정도 떨어진 곳에 쳐놓은 그물 속 물고기를 꺼내 새벽 5시경에 항구로 돌아오죠. 그럼 항구는 도떼기시장으로 변합니다. 어부들은 그물을 내리고, 시장 앞은 활어차들로 꽉 찹니다. 이런 게 아름다운 거 아닌가요?"


'노동하는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

남애항 잠수부가 두 바퀴로 달리는 한 여행객을 붙잡고 전한 교훈이다.
 

남애항이 '미항'인 까닭, 잠수부에게 물었더니... 해안선 1만리 자전거 여행을 떠났다. 첫 행선지는 강원도 고성통일전망대부터 부산 을숙도 생태공원까지. 이 영상은 3편으로 속초 아바이마을부터 남애항까지의 두 바퀴 인문학 여정을 담았다. 내가 간 길 속초 아바이마을-대포항-몽돌소리길-연어생태공원-양양향교-하조대-남애항 인문, 경관 길 -낙산사 : 강원 양양군 오봉산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사찰이다. 671년(신라 문무왕 11)에 의상이 창건했다. -하조대 : 강원도 양양군 암석해안의 쪽빛 동해에 솟은 기암괴석과 바위섬을 조망할 수 있다. 사진 한 장 낙산사 와편 담장 : 낙산사 원통보전과 칠층석탑을 다른 건물로부터 구분하면서 담장 자체가 가진 고유의 아름다움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추천, 두 바퀴 해찰 길 몽돌소리길 : 양양군이 설악해변과 물치해변 3km 구간에 조성한 길이다. 예술작가들이 참여해 리모델링 한 길인데, 해변 길을 시원하게 달릴 수 있다. ⓒ 김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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