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아카데미 시상식후보에 오른 영화들 중 2편에서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전혀 다른 장르와 내용이지만 영화 속 주요 배경 공간이 같고, 이별과 상실에 처한 두 주인공의 슬픔과 극복을 담아낸 소재가 겹친다. 그리고 두 영화를 모두 본 이들이라면 기묘할 만큼 서로 다른 영화들에서 비슷한 정서적 질감을 체험할 테다.

한 편은 '셀린 송' 감독의 올해 아카데미상 작품상 & 각본상 후보작 <패스트 라이브즈>, 다른 한 편은 파블로 베르헤르 감독의 장편 애니메이션 부문 후보작 <로봇 드림>이다.

이번에 소개할 영화는 후자다. 과연 로봇이 등장하는 애니메이션이 어떻게 한국에서 미국으로 떠난 이민자와 소꿉친구로 한국에 남은 이의 24년간의 질긴 인연과 겹쳐 보일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정말로 두 영화는 너무나 닮은꼴이다. 이 또한 장르 불문하고 동시대 영화를 골고루 접할 때 얻을 수 있는 작은 통찰일 테다.
 
1980년대 맨해튼에서 '도그', '로봇'을 만나다
 
"로봇 드림"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로봇 드림"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영화사 진진

 
1980년대 초반 뉴욕 맨해튼.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종종 접하던 구축 스튜디오 아파트에서 '도그'가 홀로 밤을 보내고 있다. 그는 냉장고에 보관해 둔 '텔레비전 디너'를 꺼내 전자레인지에 돌리고, 브라운관 TV에서 채널을 오르내리는 중이다.

MTV에선 다종다양한 POP 음악이 흘러나오고, 왁자지껄한 미국식 토크쇼와 오락프로그램이 현란하지만 '도그'의 표정은 공허하다. 습관적으로 저녁을 때우며 이것저것 방송을 돌려보지만, 코로나 시절에 OTT 리모컨을 돌리는 것과 별 차이가 없다. 그러다 문득 창가에 서서 건너편 아파트의 실루엣을 응시한다. 다들 짝이 있고, 서로의 마음을 공유하며 단란한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실쭉해진 '도그'는 다시 케이블 텔레비전 채널을 오르락내리락한다. 그러던 중 쇼핑몰 광고가 그의 시선을 빼앗는다. '반려 로봇' 광고다. 빠져들 듯 고정된 '도그'의 시선은 이내 손으로 옮겨가고 주문 버튼을 누른다. 다음날 택배가 도착하기를 고대하던 그의 기다림이 보답을 받듯 건장한 운송 담당이 묵직한 포장 상자를 들고 벨을 누른다.
 
설레는 마음으로 (요즘 식대로 표현하면) '언박싱' 의식을 치르는 '도그'. 큼직한 박스 안에는 복잡한 설명서와 함께 온갖 부속이 가득하다. IKEA 브랜드 가구나 BANDAI 프라모델 조립을 생각하면 금방 이해가 될 풍경이다. 진땀을 흘려가며 그는 하나씩 주문한 로봇을 조립해나간다. 마침내 모든 작업을 마치자 날렵하고 세련된 형상과는 거리가 멀지만, 정감 있어 보이는 로봇이 전모를 드러낸다. 떨리는 마음으로 작동을 기다리자 마침내 전원에 불이 하나둘 들어오면서 로봇이 움직인다. '도그'의 기대만큼 로봇은 그의 충실한 반려가 되어준다. 이제 누구도 부럽지 않은 '도그'는 외로울 틈이 없다.
 
둘은 이제 그들이 거주하는 도시의 축복을 만끽하며 꼭 붙어 다닌다. 낮에는 시간을 내어 누구나 선망하는 뉴욕의 여러 거리를 산책하고, 지하철 내에서 혼잡스럽긴 하지만 다채로운 '버스킹' 공연도 접한다. 낭만적인 공원을 거닐다 즉석 공연에도 참여한다. 관객이 상상하는 뉴욕의 거리문화가 한가득 펼쳐지며 시선을 사로잡는다. 모든 걸 처음 접한 로봇에게 이것저것 에티켓을 알려주며 '도그'는 행복한 비명을 지른다. 이 순간이 영원하기만을 바라며 자기 옆에서 잠든 로봇을 바라보다 이불을 덮어주는 나날이 이어진다. 무얼 더 바라랴.
 
뉴욕 시민들의 휴양지인 '몬탁' 해변으로 둘은 여름날 소풍을 떠난다. 처음 함께 바다로 나온 둘은 로봇이 잠수함처럼 '도그'를 등에 태운 채 바닷속을 누비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남들은 절대로 상상하지 못할 호사를 누리는 것만 같은 '도그'다. 하지만 비극이 그들에게 찾아온다. 바닷물의 염분이 문제인지 로봇은 사지를 움직이지 못한다. 그저 눈만 껌뻑할 뿐이다. '도그'는 로봇을 수리하기 위해 옮기려 하지만 그의 힘으로는 쇳덩이로 된 로봇을 해변에서 데리고 나오기는 역부족이다. 어쩔 수 없이 로봇에게 비치 매트를 덮어준 채 홀로 돌아온 그는 수리용 도구와 해설서를 챙겨 다음날 다시 돌아오지만, 해변은 다음 해 전까지 폐쇄되고, 몰래 로봇을 구하러 잠입하려던 '도그'는 경찰서 신세까지 진다. 생이별한 둘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환상적인 이미지로 묘사된 로봇의 꿈과 1980대 뉴욕의 향수
 
"로봇 드림"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로봇 드림"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영화사 진진

 
헤어진 '도그'와 반려 로봇은 애타게 재회를 갈망한다. 하지만 만남은 쉽지 않다. 둘은 절실한 소망을 각자 꿈으로 재현하지만, 그 상상은 번번이 현실의 벽에 부딪히는 결말로 치닫는다. 달콤한 환상은 결국에는 그들이 실제로 겪고 있는 제약을 은유하며 연이어 좌절과 비극으로 마무리된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간다. 로봇은 해변에서 계절을 겪으며 방치되어 있다. 바닷바람을 맞고 눈송이에 뒤덮인다. 구조를 기다리지만 '도그'는 찾아오지 못한 채 엉뚱한 이들에게 포착되어 해로운 일을 당하기도 한다. 그때마다 로봇은 꿈을 꾼다. 늘 '도그'와 천신만고 끝에 재회하는 소원을 이루기 일보 직전에 실패하는 결말이다. 현실의 나쁜 일과 꿈은 고스란히 연결된다. '도그' 역시 로봇을 애타게 그리워한다. 혹시나 로봇이 찾아올까 기다리며 그는 혼란에 빠지거나 비슷한 형상에 가슴을 태운다.
 
<로봇 드림>은 동명의 2007년 그래픽 노블을 원작으로 삼았다(국내엔 2010년 세미콜론 출판사에서 번역되었지만, 현재 절판 상태). 실제로 '뉴요커'로 거주하며 자신의 작업에 동네와 거리 풍경을 세밀하게 옮겨놓는 작가의 화풍 덕분에 실제 뉴욕에 여행가는 대신 '안락의자 여행가'로 영상물이나 여행기를 즐겨보는 이들에겐 더 바랄 게 없는 작업인 셈이다. 원작은 특별한 대화 없이 오직 그림으로만 내용을 전달하는 구성인데 애니메이션 판 역시 그 노선을 그대로 계승한다. 그래서 대화를 통한 내용 해설이 없다는 것에 처음엔 당황하더라도 조금만 익숙해지면 외국어 번역이라는 장벽 없이 오직 화면에 집중해가며 작품을 소화할 수 있는 구성이다.
 
만화 원작의 애니메이션이라 해서 주인공들의 우정과 이별이 그저 동화 수준이라 생각하면 번지수를 한참 잘못 짚었다. 애니메이션이 장기를 가지는 1980년대 뉴욕 도시의 재현 수준은 엄청나다. 그저 비슷하게 대강 묘사하는 차원을 훌쩍 뛰어넘어 세밀화로 묘사된 것과 같은 정밀도를 자랑한다. '도그'가 홀로 외로워하는 장면에서 배경이 되는 오래된 1인용 아파트 실내는 소품 하나하나 모두 당대 문화 코드를 온전히 담아낸다. 이걸 실제 소품과 디자인으로 재현하려 했다면 오히려 비용이건 실무건 감당하기 힘들었을 차원이다. 애니메이션이 실사 영화와 비교될 때 확연히 강점이 있는 부분을 극대화했다고 보면 될 테다.
 
왜 하필 1980년대 초반일까? 적당히 향수를 느낄 만한 근접성과 함께 너무 익숙하지 않은 시간 차이를 동시에 활용할 수 있는 간격으로 선택했을 테다. 이미 대중적으로도 로봇의 초기 형태는 익숙해져 있던 시절이고, 대중문화 범람과 함께 도시공간의 르네상스와 소외 양 측면이 모두 확립되던 시간대를 선택하고 정교하게 재현한 제작진의 선택은 시의적절했다.

관객은 '좋았던 옛 시절', 세상 모든 인종과 문화가 집결하던 대도시 뉴욕의 풍경, 힙합 문화의 형성과정이나 할로윈 축제의 생생한 실제 과정, 롤러스케이트 열풍 등의 광경을 호사스럽게 누릴 수 있다. 여기에 온갖 동물들을 적당히 의인화해 다문화 융복합 공간의 개성을 극대화한다. 그저 편의적 구분이 아니라 실제 고증을 철저하게 거친 복장과 역할 분담에 혀를 내두를 만하다. 택시를 타고 급하게 해변으로 향하는 '도그'를 비출 때 운전기사의 인종적 특성이 실제 뉴욕의 색깔을 고스란히 옮겨온 것만 봐도, 이 애니메이션이 '아동용'이란 면죄부는 전혀 쓸 생각이 없음을 깨닫게 된다.

가슴 아픈 이별의 끝과 새로운 시작이라는 인생교훈담
 
"로봇 드림"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로봇 드림"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영화사 진진

 
하지만 아기자기하게 꽉 채워진 화면 속 배경과 장치는 두 주인공의 애절한 갈망과 애틋한 찰나를 극대화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실제 인물을 재연하는 극화 형태와는 거리가 먼, 명랑만화에서 툭 튀어나올 것만 같은 개의 형상인 '도그'와 '깡통 로봇' 그 자체인 '로봇', 둘의 처음 모습을 봤을 때는 그들이 처한 앞으로의 운명과 미래가 어떻게 관객의 가슴을 울릴지 상상할 수 없을 테지만, 웬만한 멜로/로맨스 장르 실사 드라마는 가뿐히 뛰어넘을 감정의 울림이 결말에서 폐부를 관통할 것이라 장담한다. 둘은 절절히 재회를 고대하지만, 현실은 변덕스런 운명의 장난처럼 그들을 떨어뜨려 놓는다. 그런 가운데 시간이 지나면서 둘만의 세상에서 각자 새로운 경험과 인연을 쌓으며 성장하는 과정을 겪는다. 잔인한 것 같지만 세상살이란 원래 그런 법이다. 그렇게 워낙에 명성 자자했던 원작이 도달한 정서적 접근법을 충실히 극대화하고 있다.
 
아마 <로봇 드림>을 보고 나면 몇몇 이미지와 이야기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를 테다. 로봇을 보며 누군가는 <오즈의 마법사> 속 양철 나무꾼을 연상할 것이다. 로봇이 자유분방하게 비범한 육체적 능력을 선보일 땐 미야자키 하야오의 역작 <천공의 성 라퓨타> 속 파수꾼 로봇을, 혹은 또 다른 걸작 그래픽 노블과 애니메이션의 주역 <아이언 자이언트>가 머릿속에 아른거릴지도 모른다. '도그'는 흔히 신문이나 잡지 연재 4컷 만화 속 의인화된 개의 이미지 그대로다. 대개 이런 캐릭터들은 단순하게 정형화된 속성으로 규정되곤 하지만 대사 한마디 없이 깊은 정서적 울림을 전해줄 수 있는 구성력과 묘사가 경이로운 차원으로 승화된다는 게 놀랍다. 그 외에도 수많은 고전과 동시대 영화들, 도시문화의 재현이 잔뜩 숨어 있지만 관객이 직접 눈으로 포착하는 발견의 기쁨을 누리시길 기대해본다.
 
영화를 보지 않은 이들을 위해 스포일러는 자제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의 간절한 마음과 재회의 가능 여부에 대해선 함구할 수밖에 없다. 다만 흔해 빠진 실사 드라마는 명함도 못 내밀 정도로 관객의 심장을 쥐락펴락한다는 점만 밝힌다. <패스트 라이브즈>와의 비교를 다시 언급하자면, 첫사랑의 설레임과 아쉬움이 영속될 수 없다는 깨달음과 함께 그 시간대에 갇히지 말고 각자의 현재를 살아가야 한다는 교훈극을 공유하는 편이다.

누군가는 좀 더 전형적인 결말을 기대했을지 모르겠지만, 충분히 수긍되고 만족할 만한 울림의 결말임은 분명하다. 대사의 부재를 100% 대신하는 사운드트랙의 위력, 'Earth, Wind & Fire'의 전설의 디스코 명곡 'September'와 숱한 리메이크로 귓가에 익숙할 수밖에 없는 'You Raise Me Up'이 더할 나위 없이 맛깔스럽게 활용되는데, 가사의 매력과 숨은 의미까지 찾아보면 극 중 주인공들의 감정선을 조금 더 상세히 이해할 수 있다. 손수건이 필요할 만큼, 한없이 깊은 슬픔과 축복의 감정에 다가설 만큼 감동하게 될 테다.
 
<작품정보>
 
로봇 드림 Robot Dreams
2023│스페인│애니메이션
2024.03.13. 개봉│102분│전체관람가
감독 파블로 베르헤르
원작 사라 바론의 그래픽노블 《로봇 드림》
수입/배급 ㈜영화사 진진
공동배급 ㈜하이스트레인저
 
2024 96회 아카데미 시상식 장편애니메이션상 노미네이트
2023 76회 칸영화제 특별 상영 부문 공식 초청
2023 47회 안시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 장편 콩트르상 부문 대상
2023 36회 유럽영화상 장편애니메이션상
2023 38회 고야상 애니메이션상, 각색상
2023 56회 시체스영화제 관객상
2023 25회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 관객상
 
2023 48회 토론토국제영화제 센터피스 부문 공식 초청
2023 67회 런던국제영화제 러브 부문 공식 초청
2023 59회 시카고국제영화제 스포트라이트 부문 공식 초청
2023 36회 도쿄국제영화제 애니메이션 부문 공식 초청
로봇드림 파블로베르헤르감독 사라바론 애니메이션 그래픽노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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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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