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폭영화는 왜 인기가 있을까. 조폭영화 말고는 볼 게 없다는 소리가 나오던 20여 년 전보다는 나아졌지만 여전히 조폭영화가 끊이지 않는 세상이다. 불량한 이들이 몰려다니며 세를 과시하다 수 틀리면 서로 죽고 죽이는 조폭영화가 매년 제작되는 게 당연한 일일까. 일상에선 법과 도덕에 해가 된다며 비난하지만, 영화 속에선 이해하고 환호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지진 않는다.
 
물론 이유는 있을 테다. 의리와 배신, 사랑과 욕망 같은, 언제 보아도 관심이 쏠리는 자극적 주제를 일상 가운데선 흔히 마주할 수 없기 때문일 테다. 극적인 순간에야 바야흐로 드러나는 이 같은 미덕과 악덕들을 조폭세계라면 보다 손쉽게 표면 위로 끌어올릴 수가 있는 것이다. 수십억 원의 이권이 걸렸다거나, 누구를 죽이고 제가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순간에 혹은 조직과 보스를 위해 제 한 몸을 내던져야 하는 순간들에 인물은 자신의 진짜 가치를 관객 앞에 드러내게 된다.
 
그러나 모든 조폭영화가 이같이 훌륭한 무엇을 보여주지는 못한다. 아니, 보다 정확히는 대부분의 조폭영화는 미덕과 악덕의 훌륭한 표현 근처에도 가지 못한 채 칼과 욕설과 비겁이 난무하는 어느 세계의 단면을 보여주다 흐지부지 끝나고야 만다. 이것이 해가 갈수록 조폭영화가 쇠퇴하는 이유이고, 우리가 걸작이라 부를 만한 조폭영화를 얼마 알지 못하는 이유다.
 
 영화 <간신의 피> 포스터

영화 <간신의 피> 포스터 ⓒ (주)에스와이코마드

 
조폭영화의 문법, 그대로 답습하는
 
<간신의 피>는 제작규모와 달리 정통 조폭영화라 해도 좋을 만한 구조를 가진 작품이다. 용궁파와 초음파라는 우스꽝스런 이름을 가진 두 조직이 서로의 영역을 두고 갈등을 빚는 내용으로, 어릴 적 인연이 있는 두 친구의 엇갈린 운명을 비극적으로 다룬 작품이기 때문이다. 간단한 설명만으로도 어디서 많이 본 듯한 구조의 이 영화는 색다른 설정을 통하여 그 전형성을 얼마간 벗어나려 시도한다.
 
그 시도는 다름 아닌 전통의 재해석, 고전의 변주다. 주역이 되는 인물이 자라와 토끼, 또 용왕이라는 것에서 알 수 있듯, 그 고전은 전래동화 <별주부전>이다. 용왕의 병을 치유하기 위해 토끼를 잡으러 육지로 나간 자라가 그를 꾀어 데려오는 데 성공하지만, 토끼가 기지로 위기를 벗어난다는 이 고전의 줄거리가 거의 그대로 영화의 얼개가 된다.
 
용궁파와 초음파는 인근한 지역을 장악한 두 개의 폭력조직이다. 두 조직은 한동안 다툼이 없는 상태로 평화의 시기를 보내고 있는데, 이는 과거 맺어진 평화협정 때문이다. 서로의 영역에 침입하지 않는 걸 조건으로 서로 간 폭력사태를 금하기로 한 이 협정을 지키며 두 조직은 지루한 평화에 더해 성장 없는 침체기를 겪는 중이다. 늘어나지 않는 영역 속에서 조직 안 갈등은 커질 수밖에 없는 일이다. 머리가 커진 용궁파 중간보스들은 새로운 성장의 시기를 갈망하기 시작한다.
 
 영화 <간신의 피> 스틸컷

영화 <간신의 피> 스틸컷 ⓒ (주)에스와이코마드

 
토끼의 간을 가져와라... 보스의 명령
 
마침 때가 도래한다. 별칭에서도 알 수 있듯, 용궁파 보스는 용왕(기주봉 분)이다. 오랫동안 조직을 이끈 용왕도 어느덧 노쇠하여 병을 앓고 있다. 간 이식을 받아야만 나을 수 있다는 그는 제게 꼭 맞는 간을 초음파 조직원 토끼가 갖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는 부하 상어(신현규 분)에게 명하여 토끼를 잡아올 것을 명하지만, 협정 탓에 얼굴이 알려진 조직원을 내세울 수는 없다.
 
그렇게 간택된 것이 다름 아닌 자라(송길호 분), 조폭이라기보단 동네 양아치의 삶을 사는 똘마니이기에 초음파엔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것이다. 중간보스 상어는 자라를 부추겨 그에게 임무를 맡도록 하고, 자라는 적의 영역에 잠입해 그를 납치하려 시도한다.
 
그러나 운명이란 마음처럼 흘러가지 않는 것, 어렵게 토끼(김다솔 분)를 만난 자라는 그만 주춤하고 만다. 토끼가 제가 보육원에 있을 때 사귄 친구였던 것이다. 그와 남다른 인연이 있었던 자라는 토끼를 속여 데려갈지를 두고 거듭 갈등할 수밖에 없다. 돌아가면 이제까진 얻지 못했던 돈과 명예를 얻을 수 있고, 데려가지 않으면 도리어 화가 닥칠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 <간신의 피> 스틸컷

영화 <간신의 피> 스틸컷 ⓒ (주)에스와이코마드

 
배신과 음모, 의리와 폭력
 
그런 자라의 마음을 알 리 없는 토끼는 오랜만에 만난 토끼에게 마음을 다해 잘 해주고 자라의 갈등은 깊어만 진다.
 
그래도 영화는 갈 길을 가야만 한다. <별주부전>의 자라가 토끼를 꾀어내는 데 성공했듯, <간신의 피>의 자라 또한 토끼를 제 영역으로 끌고 오는 데 성공한다. 믿던 도끼에 발등을 제대로 찍힌 토끼는 용궁파에 납치되고, 양 조직의 갈등 또한 표면화되기에 이른다.
 
영화는 이로부터 용왕을 쳐내는 부하의 배신과 제 행동에 죄책감을 느껴 다시 토끼를 탈출시키려는 자라, 그들이 겪어내는 고난과 음모 따위를 다발적으로 풀어내게 된다. 그 사이 수많은 폭력과 욕설이 난무하고,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던 사랑까지 개입하며 조폭영화가 흔히 담아내는 수많은 면모들을 쏟아내게 되는 것이다.
 
 영화 <간신의 피> 스틸컷

영화 <간신의 피> 스틸컷 ⓒ (주)에스와이코마드

 
별주부전과 조폭영화 사이
 
어느 모로 보아도 <간신의 피>를 걸작이나 명작 반열에 올릴 수는 없을 테다. 조폭영화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요소를 한 데 모아놓기는 했으나 그것이 참신함보다는 식상함과 쉽게 연결된다는 점이 치명적이다. 조폭영화의 핵심 중 하나라 해도 좋을 액션 또한 수준급이라 하기엔 부족함이 많고, 수평을 크게 벗어난 촬영은 그 의도를 알 수 없어 난해하기만 하다. 기주봉과 같이 한국 영화판에 이름난 명배우도 출연한다고는 하지만, 그 말고는 검증된 배우를 찾아볼 수 없고 몇몇 배우는 심히 실망스런 연기를 거듭한다. 여러모로 영화는 범작조차 되지 못한 졸작에 가깝다.
 
그럼에도 이 영화에서 가치를 찾으려는 시도엔 의미가 있다. 그건 한국 조폭영화가 답습하는 수많은 설정을 이 영화 또한 그대로 쓰고 있기 때문이며, 그 효과가 이제는 전혀 발휘되지 못한다는 걸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작품은 예술적 변주가 지양해야 할 어우러지지 않는 설정 사이의 이동이 어떻게 불협화음을 내게 되는지를 보이는 실증례이기도 하다.
 
<별주부전>의 기발함은 조폭영화로 들어와서는 전혀 제 멋을 내지 못하고, 도리어 오래되어 낡은 인상까지 준다. 심지어는 간을 이식한다는 설정부터, 조폭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별명들을 남용하여 관객에게 진지함 대신 우스꽝스러움을 일으키기까지 한다. 차라리 코미디였다면 어울렸을 이 같은 설정을 정극으로 이끌어간 선택도 아쉽다. <간신의 피>로부터 한국 영화는 특별한 무엇 없이 조폭영화를 답습하는 일이 저를 성공과 멀어지게 한다는 사실을 배워야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간신의피 에스와이코마드 기주봉 권하 김성호의씨네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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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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