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졍서, 졍서> 스틸컷.

영화 <졍서, 졍서> 스틸컷. ⓒ 인디그라운드

 
*주의!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01.
같이 공부해요.
인스타 팔로우 해줘.
자퇴했음. 대학질문 X


싸구려 커튼이 쳐진 독서실의 구석진 자리. 마스크를 쓴 영서(신혜지 분)가 핸드폰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다. 화면 너머에 있는 누군가와 이야기라도 나누는 듯이 무언가 열심히 휘갈겨 쓴 노트를 연신 내보인다. 그녀는 지금 인터넷 방송 중이다. 소음을 낼 수 없는 독서실이라는 공간의 특성상 직접 대화를 나눌 수는 없지만 소통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오히려 작은 책상 위의 은밀한 관계가 그녀를 지켜보는 이들의 어떤 욕구를 충족시켜주고 있는 듯하다. 그런 내막을 아는지 모르는지 영서는 화면 너머의 시청자들이 제대로 보일 수 있게 좌우반전을 고려해 써야 하는 반대의 글씨도 개의치 않는 태도로 애를 쓰는 모습이다. 문제는 그녀가 무용으로 성공하겠다며 학교도 그만두고 검정고시를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 이제 시험이 일주일도 남지 않은 상태에서 적절한 방향의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손현록 감독의 영화 <졍서, 졍서>에는 꿈 하나만을 바라보며 학교를 그만둔 이후 어느 곳에도 발을 붙일 수 없게 되어버린 한 고등학생의 모습이 그려진다. 좁은 책상 위에 세워진 핸드폰 카메라를 통해 이루어지는 이름 모를 이들과의 시간이 유일한 행복인 것처럼 비치는 그녀의 삶. 숨 막힐 듯 고요한 공간에서 유일하게 홀로 누군가와의 대화를 이어가는 모습은 오롯한 자신의 선택만으로는 완성할 수 없는 현재를 비유적으로 표현함과 동시에 필요와 일탈의 경계에서 합의된 유일한 자의적 행동으로 그려진다. 애석하지만, 작품 속 영서의 모습에는 아직 어리다는 이유 하나로 제 삶을 주체적으로 이끌어 갈 수 없는 존재의 어려움이 압축되어 있다.

02.
"니가 뭐 할 줄 아는 게 있기는 있어?"

여과 없이 현실에 그대로 맞부딪히게 되는 어른의 삶이 어려운 이유와 달리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이들의 삶에도 나름의 어려움은 있다. 누군가로부터 보호받는다는 일의 대가라고 해야 할까.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뜨겁고 제 멋대로 나아가고 싶은 시기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선택의 순간마다 부모의 이해를 구하거나 결정을 따라야 한다. 그나마 그 이해와 선택이 자신의 뜻과 동일한 방향을 향하고 있고, 그 결과가 긍정적인 값을 도출할 수 있다면 다행이다. 물론 세상 어떤 부모가 나쁜 결과를 바라며 자식에 관한 결정을 내리겠는가. 문제가 있다면 양쪽에 시각적 차이가 있다는 것과 그에 대해서 충분한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다는 것이다.

지금 영서가 마주하고 있는 상황도 다르지 않다. 자퇴를 결정하는 일에 동의한 것은 사실이나 이 문제는 애초에 학원 선생님(고유준 분)과 엄마(민효경 분)가 주도해 진행된 일이었다. 무용으로 성공할 가능성이 있으니 학교를 그만두고 학원 수업에 집중해 조기 유학을 목표로 하자는 것. 결과적으로만 보자면 이 선택으로 인해 얻은 것은 부정적인 부분이 더 많아 보인다. 일단 학교로부터 멀어지면서 주변 또래로부터 단절되게 되었다는 것. 이로 인해 영서가 설 자리는 점차 좁아지기 시작하고, 무용 실력 역시 생각만큼 크게 늘지 않으면서 이쪽으로도 돌아갈 수 없고, 저쪽으로도 나아갈 수 없는 애매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사실 이 선택에 함께 참여했던 엄마와 학원 강사는 실질적인 피해를 거의 입지 않는다. 영서의 엄마는 학원비를 매달 지원해야 하는 상황에서 금전적인 손해를 입기라도 하지만, 학원 강사는 정말 아무런 어려움도 겪지 않는다. 영서가 실패하면 다른 학생을 가르치면 되고, 그 학생이 실패하면 또 다른 학생을 가르치면 되니까. 그래서일까? 그는 학원을 찾아온 다른 학부모에게도 영서의 엄마에게 했던 조기 유학에 대한 제안을 똑같이 내놓는다. 선택은 다 함께 했는데 그로 인한 문제는 왜 전부 영서가 받고 책임져야 하는 것일까? 함께 나누지 못할 거라면 차라리 처음의 선택이라도 스스로 할 수 있게 해줬어야 하는 게 아닌가. 
 
 영화 <졍서, 졍서> 스틸컷.

영화 <졍서, 졍서> 스틸컷. ⓒ 인디그라운드

 
03.
세상에 까칠하게 다가서는, 어른들에게 날 선 태도로 일관하는 영서의 태도를 지적할 수도 있다. 다른 학생들의 공부를 위해 조용히 해달라는 독서실 주인(안민영 분)의 부탁을 들은 체 만 체 하고 뒷골목으로 숨어 들어가 떳떳하지도 못한 담배를 피우고, 수업 시간에 지각을 일삼는 영서의 모습이 옳은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녀의 편에 잠시 서 주고 싶은 이유는 이미 혼자가 되어버린 그 삶에 심리적으로 지지하고 버팀목이 될만한 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불손한 의도로 가득한 온라인상의 이름 모를 사람들을 통해 자유의 환기를 찾고자 할까. 화면 속에 비치는 어린 학생을 향한 그릇된 욕망을 품은 이들의 관심이지만, 러닝 타임 내내 그녀의 마음을 돌보는 것은 그들뿐인 것 같기도 하다.

양가적 감정은 언제나 발을 묶는다. 영서가 더 나쁜 자리로 나아가지 않고 지금의 자리에서 최소한의 일탈을 하고, 제 작은 공간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탈출구를 찾고자 하는 마음에도 분명 서로 다른 마음이 함께다. 미움과 고마움. 화장대 위에 올려져 있던 독서실 연장을 위한 돈봉투를 카메라가 비추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밖으로 드러난 감정 이면에 남겨져 있는 또 다른 감정을 시각적으로 보여주기 위함. 그리고 이는 엄마와 딸 양쪽 모두에서 각각의 의미를 가진다. 제대로 공부를 하는지 의심부터 하면서도 못 이기는 척 돈을 내어주는 마음과 그런 엄마의 태도는 밉고 속상하면서도 자신의 요구를 끝내 들어주는 모습에 미안해지는 마음.
 
 영화 <졍서, 졍서> 스틸컷.

영화 <졍서, 졍서> 스틸컷. ⓒ 인디그라운드

 
04.
"매일 최선을 다하고 있어."

영화의 후반부에서 등장하는 인터넷 방송 장면에서 영서는 끊임없이 도네이션 되는 유료 후원 아이템으로 인해 자신이 연습했던 춤을 카메라 앞에서 보이게 된다. 큰 금액을 후원하면 마스트도 벗고 춤도 추겠다고 제안을 하기는 했지만, 이 모습은 마치 지금 그녀가 놓여 있는 현실의 장면이 재현되고 있는 듯 보인다. 자신의 선택에 의한 것이라고 보기엔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조기 유학이라는 꿈을 꾸며 자퇴를 한 직후에 잠깐의 달콤함을 느꼈던 것처럼, 이번에도 지금 당장 수익으로 환원되는 유료 후원 아이템 몇 개의 달콤함이 그리 오래 지속될 수는 없을 것이다.

현실의 삶에서도 인터넷 방송 안에서도 지금 영서의 자리는 그녀의 선택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물론 넓게 보자면 우리 모두의 삶이 한 개인의 선택으로만 완성되는 경우는 드물지만, 적어도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가는 길 하나 정도는 오롯한 자신의 걸음으로 걸을 수 있어도 좋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작품 속 영서가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향해 나아가는 장면은 엔딩 크레디트 이후 어디쯤에서 만나볼 수 있을까? 내일을 향해 달려가는 모든 인물의 등 뒤에서 그렇지만, 영서의 내일도 밝고 따뜻할 수 있기를 응원하게 된다.
덧붙이는 글 이 작품은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설립한 인디그라운드(Indieground)의 독립영화 라이브러리 열다섯 번째 큐레이션 ‘영화가 영원히 끝나지 않을 때’ 중 한 작품입니다. 오는 2023년 9월 15일까지 인디그라운드 홈페이지를 통해 무료회원 가입 후 시청 가능합니다.
영화 인디그라운드 졍서졍서 신혜지 안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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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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