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영화의 흥행과 관계없이 매력 충만한 작품들을 열린 감각으로 그러모아 세심하게 해석하는 공감의 기록입니다. [편집자말]
 영화 <에곤 쉴레: 욕망이 그린 그림>은 열정적 화가 에곤 쉴레의 짧은 삶을 그려낸다.

영화 <에곤 쉴레: 욕망이 그린 그림>은 열정적 화가 에곤 쉴레의 짧은 삶을 그려낸다. ⓒ (주)티캐스트


스물여덟 살로 짧은 생을 마감한 화가 에곤 쉴레(바른 표기법은 '실레'이나 영화에서는 '쉴레'로 쓴다)의 사인은 1918년 그 당시 유행하던 에스파냐 독감이었다. 장기화한 제1차 세계대전이 불러온 또 다른 참극이었을까. 전쟁으로 인한 생의 위협이 먼발치로 느껴질 정도로 무서운 인플루엔자가 대유행하면서 많은 이들의 생명을 죽음으로 휩쓸어 간 것이다. 피 끓는 열정의 화가 에곤 쉴레와 아내 에디트, 뱃속 아이의 숨을 한꺼번에 거두어버린 에스파냐 독감의 사나운 위력은 피할 길 없는 곳에 쏟아지는 화살이었다.

영화는 무서운 인플루엔자에 의해 사망하기 전까지의 불꽃처럼 짧았던 그의 삶이, '그리는 것'에 대한 열정이 채운 세계였다고 말한다. 화가의 삶을 재조명하기보다는, 사실에 기반을 둔 에곤 쉴레 삶의 일대기를 영화적 기법과 섞어 녹여낸다.

첨예하게 자신을 표현한 자화상이 대변하듯, 에곤 쉴레가 지닌 나르시시즘적인 성향은 자기 안의 '성(性')을 파고드는 쪽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게 한다. 그리는 것에 대한 열정이 내밀화된 '성'을 그리는 것에 대한 욕망으로 구체화 되며 완성된 작품들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감춰지면 질수록 타락하는 것

'에로티시즘'이 뚜렷하다고 해서 그의 작품이 선정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그가 그린 날 것의 '성'은 보는 이로 하여금 성적 욕망을 자극하지 않을뿐더러 쾌락적이지도 않다.

그림을 향한 열망이 '성(性')을 향해 있다고 해서 무조건 에로틱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이 확립해 놓은 도덕적 규범이나 잣대를 통해 깊이 드러나서는 안 될 것처럼 여겨지는 '성'이란 것은, 감춰지면 질수록 우려했던 '타락'이라는 의미를 뒤집어쓰고 만다. 성을 어두운 구석 저편으로 숨긴, 규범적이면서도 타락적인 자들로 인해 성의 근본 가치는 잃어버렸다. 본래 '성'은 인간의 생명을 잉태할 수 있도록 해주는 근본적인 장치이자 힘인 것을.

그가 애지중지하던 어른 키에 준할 정도로 커다란 전신거울은 작품의 모델이 된 자신과 여동생 게르티 그리고 소녀이자 여성인 여러 모델에게, 그들이 지니고 있는 '진짜 모습'을 들여다보도록 유도하는 장치이다. 다시 말해 거울을 통하여 직접 보지 못하는 쉴레 자신을 보고, 모델들이 역시 자기 안의 '내밀함'을 표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거울은 그에게 없어서는 안 될 작업적 요소였던 셈이다. 벗은 채로 전신을 비추는 거울 앞에 섰을 때 드러나는 자기 모습이 어떠한지 알고자, 또 알게 하고자 끊임없이 그려냈다.

인간 욕망의 종류 중 가장 은밀하게 다뤄지는 영역인 '성'이 결단코 타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완성될 수 있는 것임을 다소 과장되고 격렬한 표현으로 증명한 에곤 쉴레.

그의 작품엔 은밀한 목소리가 숨어 있다. 그리는 자가 아닌 보는 자의 몫이 되고 마는 쉴레의 작품엔 앞서 언급했듯 쾌락이 그려져 있진 않다. 보는 이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의 '성'엔 예술은 있어도 외설은 없다. 다만 쾌락을 선택하는 자들에겐 예술적인 가치를 지닌 작품도 외설스럽게 여겨질 뿐이다.

 벗은 모델을 앞에 두고 그림을 그리는 '에곤 쉴레'

벗은 모델을 앞에 두고 그림을 그리는 '에곤 쉴레' ⓒ (주)티캐스트


노이렝바흐에서 거주하며 작업하던 시절 역시 '그리는 것'에 관한 열정이 치솟을 때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그의 생에 가장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여겨지는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미성년자 유괴 혐의로 구금을 당하고 재판부의 명령에 따라 자신의 작품이 판사의 손에서 불타는 치욕까지 겪게 된 것.

조용하던 시골 마을에 나타난 예술가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 만했으나 좋지 않은 관심은 의심을 낳고 말았다. 가정폭력과 불안에 시달리는 작은 시골 마을의 가출 소녀가 실제로 젊은 화가에게 어떤 마음을 품고 그의 집 문을 두드렸는지는 모르겠으나, 사춘기 소녀의 혼란스런 사정과는 관계없이 화가는 결백했다. 그로 인해 미성년자 유괴 혐의가 무죄로 끝나긴 했지만, 법정의 심판을 받아야 할 것은 또 있었다.

평소 어린아이들을 대상으로 성적인 작품을 그려대고 그 아이들을 타락게 했다는 내용의 죄는 실로 당사자인 그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누구나 성적 존재이며, 아틀리에로 찾아오는 어린아이들 역시 그에게 있어 예외 없는 훌륭한 모델이었다. 그게 어찌 죄로 성립되는지 예술가의 순진한 가슴으로는 납득할 수 없었다.

판사의 손에 태워지던, 그의 작품 속 벗은 어린 소녀의 공포 어린 눈빛은 불길에 휩싸여 더는 볼 수 없었다. 그렇게 그 소녀의 타락이 규정된 것이다. 감추기를 좋아하는 어른들에 의해서 말이다.

자네가 보는 걸 나도 봤으면 좋겠네

 극 중 구스타프 클림트(코넬리우스 오보냐)와 에곤 쉴레(노아 자베드라)

극 중 구스타프 클림트(코넬리우스 오보냐)와 에곤 쉴레(노아 자베드라) ⓒ (주)티캐스트


실제로 에곤쉴레의 스승이자 선배, 친구이기도 했던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의 영화 속 등장은, 그 둘의 작품세계를 비교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대한민국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들 정도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클림트의 작품들은 대체로 장식성이 짙다. 유명한 작품 <키스>만 봐도 클림트의 작품에 빼 놓을 수 없는 현란한 장식이 수를 놓고 있다.

그에 반해 쉴레의 작품엔 장식이라고 할 만한 것들은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 흥미롭다. 있는 그대로의 진실된 모습을 괴기스러울 정도로 적나라하게 표현한 쉴레의 작품은, 그가 어느 정도는 클림트의 영향을 받은 화가라는 점에 의심을 품게도 한다. 보고 있노라면 그 화려한 금박 장식을 걷어내고픈 충동을 일으키게 하는 클림트의 작품에서 이루고자 하는 이상과 낭만이 느껴진다면, 쉴레가 그려낸 것들에게서는 '이것이 바로 현실이구나.' 깨닫게 된다.

클림트의 장식은 풍요로움을 더하고, 쉴레의 거친 선들은 불안을 가중시킨다. 불안한 삶의 연속인 한국인들이 쉴레보다는 클림트에 열광하는 이유가 그런 차이에 있는 걸까.
영화 속 클림트가 쉴레에게 던진 말이 오래도록 가시질 않았다.

"자네가 보는 걸 나도 봤으면 좋겠네."

그림을 위하여

작품을 통해 스승처럼 때론 친구인 듯 교류하던 클림트에게 소개받은 모델 '발레리아 노이칠(발리)'이라는 여성이 쉴레와 오래도록 동거한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다.

영화는 '발리'라는 여성이 쉴레의 삶에서 어떤 영역을 고유하게 차지하며 세월을 보냈는지에 대한 서사가 이어진다. 불행한 사건을 겪었던 노이렝바흐에서의 감옥 생활 중에서는 발리 덕분에 희망을 잃지 않을 수 있었고, 그 외에도 그가 추구한 성을 표현한 작품에는 유독 '발리'가 자주 등장한다. 그녀는 쉴레에게 예술가적 영감을 불어넣는 고유한 영역에서 그를 숨 쉬게 했고, 관계는 4년간이나 지속된다.

거울을 통해 자신의 '성'에 빠져든 쉴레에게 '발리'의 존재는, 거울 없이도 풍요롭고 다채로운 성의 바다에 빠져들게 하는 필수불가결한 의미가 되었던 것이다.

 극 중 '발리'(벨레리 파흐너)와 '쉴레'(노아 자베드라)

극 중 '발리'(벨레리 파흐너)와 '쉴레'(노아 자베드라) ⓒ (주)티캐스트


발리와의 관계가 특별히 문제가 있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 인간과의 '애정'이 아니라 '그림'이었던 것뿐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장기화하면서 예술가의 삶에도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우게 된다. 안정적인 가정을 꾸려 전쟁 중에도 계속 그림을 그리고 싶은 쉴레의 욕망은 발리와의 헤어짐을 결심하게 되고, 그에게 호감 있던 평범한 중산층의 딸 에디트와의 결혼까지 이어진다.

"넌 내 아내가 되기에 적합하지 않아." 라며 비수를 찌르듯 던진 말은 발리와의 관계를 끊으려는 그의 의지를 엿보기에 충분했다. 보편적으로 추구하는 결혼이라는 계약에 불충분했던 발리를 버리고 가정을 꾸리기에 알맞은 여성 에디트를 선택한 쉴레의 심경에는 그 당시 어떤 변화가 있던 것일까. 절대로 무너뜨릴 수 없을 것 같았던 쉴레와 발리의 '성적 예술'로서의 교감은 결혼이라는 통속적인 제약 때문에 금지된다.

슬프지만 두말없이 떠나고 마는 발리에게 그림을 위해 네가 필요하다고 외치는 진심은, 그의 모든 감각이 그림을 위해 열려있다는 것을 극적인 상황을 통해 더욱 부각한다.

그토록 짧았던 생의 모든 감각이 어린 그의 그림들은 뜨거운 욕망이다. 그리는 것 자체에 대한 욕망이 전부를 차지했던 쉴레의 삶은 그림만을 남기고 마감했다. 같은 해 1918년, 치열했던 제1차 세계대전도 끝이 났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권순지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blog.naver.com/rnjstnswl3)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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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문화, 다양한 사회현상에 관해 공부하고 씁니다.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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