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개봉된 영화 <천녀유혼> 포스터

재개봉된 영화 <천녀유혼> 포스터 ⓒ 조이앤클래식

한국 영화산업이 바야흐로 중흥기를 맞이하고 있다. 영화진흥위원회가 발표한 보고서(2014 한국 영화산업 결산)에 따르면 2014년 전체 영화산업 매출은 2조 276억 원으로 사상 최초로 2조 원대를 넘어섰다고 한다.

김한민 감독의 <명량>은 단일영화 최다관객 기록을 새로 썼으며 인구 1인당 평균 영화관람 횟수는 4.19회로 세계 최고수준에 올라섰다.

<겨울왕국>, <명량>, <인터스텔라>, <국제시장>이 연이어 천만 관객을 동원하며 꿈의 숫자로만 여겨졌던 천만 영화의 목록을 빠르게 늘려가고 있다. 한국의 총 인구가 5042만 명이라는 걸 고려하면 한국인 다섯 중 한 명 씩은 이들 영화를 보았다는 것인데 생각할 수록 놀랍기만 하다.

그러나 한국 영화산업의 빛나는 성취 뒤로는 비틀린 구조와 빈약한 내실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존재한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뒤지지 않는 관객 동원력을 과시하고 있지만 장르와 스타일, 소재가 다양하지 않은 점은 단점으로 지적된다.

일례로 2014년 개봉한 한국영화의 상당수는 사극이었는데 2012년 <광해, 왕이 된 남자>, 2013년 <관상>이 연이어 흥행에 성공한 영향으로 풀이된다. 제작사들의 보수적인 투자방침이 대중지향적 영화의 확대 재생산으로 이어지고 그 결과로 유사한 장르와 설정을 가진 영화가 쏟아진다는 것이다.

실제로 2014년은 <조선미녀삼총사>로 시작해 <역린>, <군도>, <명량>, <해적>, <상의원> 등 사극영화가 연이어 쏟아졌다. 이런저런 이유로 미처 개봉하지 못한 <조선명탐정 : 사라진 놉의 딸>, <순수의 시대>, <사도>, <협녀> 등은 해를 넘겨 올해 개봉했거나 개봉을 앞두고 있다. 개중 몇몇은 자기만의 스타일과 나름의 승부수를 갖추고 있지만 대부분은 새로움을 찾아볼 수 없는 평이한 작품이어서 관객으로 하여금 "또 사극이야?" 하는 불평을 자아내기 십상일 듯하다.

한국 영화산업의 고질적인 문제로 자리잡은 대기업의 수직계열화 역시 영화 창작자들의 창작욕구를 좀먹는 부분이다. 작품성과 시도의 참신성 측면에서 괜찮은 평가를 받았으나 흥행에 실패한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 <더 테너 리리코 스핀토>의 사례에서 보듯 불공정한 배급이 영화의 성패를 좌지우지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영화의 유일한 심판자여야 마땅할 관객들에게 보이기 이전에 영화의 성패가 결정났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라 하겠다.

요약하자면 대형 제작사의 안정지향적 투자방침과 불공정한 배급환경이 창작자들의 창작욕구를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모난 부분을 둥글게 갈아놓은 듯한 개성없는 영화가 쏟아지고 있는데 진정으로 영화산업을 혁신하는 것이 이같이 모난 부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한심스럽기 그지없는 일이다.

'안정적'이라는 미명하에 폐쇄적인 구조를 묵인하고 자기복제를 거듭하는 현재의 시스템은 관객을 무시하는 것일 뿐 아니라 스스로를 갉아먹는 어리석은 행위이기도 하다. 여러 언론이 앞다퉈 한국 영화산업의 전성기로 꼽기를 주저하지 않은 지난 한 해 동안 창의적이라고 할 만한 영화가 몇 편이나 개봉했는가를 돌이켜보면 사태의 심각성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쏟아지는 재개봉 영화, 그 이유는?

 영화 <천녀유혼>서 착하고 순수한 주인공 영채신을 연기한 장국영.

영화 <천녀유혼>서 착하고 순수한 주인공 영채신을 연기한 장국영. ⓒ 조이앤클래식


이러한 영화계의 현실에서 두드러진 추세 가운데 하나로 지나간 명작들의 재개봉을 들 수 있다. 채 석 달이 지나지 않은 올해만 하더라도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부터 <모던 타임즈>, <당산대형>, <천녀유혼> 등이 재개봉했으며 <감각의 제국>, <폴리스 스토리 2>, <말할 수 없는 비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등도 재개봉을 앞두고 있다.

필름으로 촬영한 영화를 디지털 포맷으로 바꿔 더 나은 화질로 상영하는 디지털 리마스터링과 사망한 영화인에 대한 추모, 유명 감독 및 배우의 최신작 개봉과 관련해 전작을 개봉하는 등 다양한 명분이 제시되고 있으나 재개봉의 근본적인 이유는 콘텐츠의 부족을 이러한 영화들이 메꿔줄 뿐 아니라 적절한 수입까지 안겨주기 때문이다.

지난달 개봉해 누적 관객 수 15만을 넘어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대표적인 사례다.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사태에서 보듯 주요 멀티플렉스들이 군소 배급사의 영화에 상영관을 충분히 배정하지 않은 근거가 '상영관의 부족'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더욱 명확해진다.

3월 19일 함께 재개봉한 영화 <모던 타임즈>, <당산대형>, <천녀유혼>은 한국영화에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모던 타임즈>가 보인 참신한 상상력과 집요한 현실풍자에 비할 만한 영화도, <당산대형>만큼 흥분과 열기를 뿜어내는 액션 영화도 한국 극장가에선 실종된지 오래다. <천녀유혼>은 어떠한가? 판타지와 무협의 씨가 마른 한국 영화판에서 이만큼 참신한 시도를 거듭하는 작품을 만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어느덧 세상을 등진지 12년이 지난 장국영의 대표작 <천녀유혼>은 많이들 기억하는 것처럼 낭만적인 영화만은 아니다. 당시로서는 흔치 않은 특수효과를 적극 사용해 시각적으로 놀라운 판타지를 구현해냈으며 내용과 구성 면에서도 참신한 시도를 거듭하는 뛰어난 작품이다. <천녀유혼>은 기본적으로 귀신과 인간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을 애틋하게 다룬 판타지 로맨스물이다.

마치 뱀파이어물을 연상시키는 설정이지만 장국영, 왕조현의 낭만적인 연기와 영화 속 세계에 깊이를 더하는 미술감독 해중문의 솜씨는 <트와일라잇>류의 뱀파이어 로맨스를 이 영화의 아류 쯤으로 느껴지게 만든다. 연출은 <동방불패>, <녹정기>, <칠금강> 등 굵직한 작품들을 내놓은 정소동이 맡았는데 <천녀유혼>은 그의 화려한 필모그래피 가운데서도 빼놓을 수 없는 작품으로 기록되었다. 제작은 서극이 맡았다.

시대를 초월한 매력을 간직하다

 영화 <천녀유혼>의 성공을 통해 전설적인 책받침 스타로 군림한 배우 왕조현

영화 <천녀유혼>의 성공을 통해 전설적인 책받침 스타로 군림한 배우 왕조현 ⓒ 조이앤클래식


영화의 주인공은 미수금을 걷기 위해 먼 마을까지 떠나온 세리 영채신(장국영 분)이다. 그는 빗물에 장부가 번진 탓에 돈을 걷지 못하고 어려움에 처한다. 빈털털이인 그는 난약사라는 버려진 절을 소개받아 묵게 되는데 여기서 미모의 여인 섭소천(왕조현 분)을 만나 겉잡을 수 없는 사랑에 빠진다.

영화는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연출과 전개를 보인다. 아마도 이 영화를 기억하는 많은 이들이 손꼽을 만한 명장면, 영채신과 섭소천의 목욕통 키스신은 알폰소 쿠아론의 <위대한 유산>의 분수대 키스신보다 11년 앞선 것이다. 이뿐 아니다. 요괴에게 납치된 섭소천을 구하기 위해 다른 차원으로 떠나는 영채신과 연적하(우마 분)의 모습은 유사한 장면이 등장하는 <콘스탄틴>보다 무려 18년이나 앞선 것이다. 이들 장면은 시기상으로만 앞선 것이 아니라 장면이 주는 인상 역시 상당해서 지금 보아도 그리 촌스럽지 않을 정도다.

영화는 멜로와 판타지, 액션과 무협, 코미디와 공포 등 여러 장르의 장점을 아울러 취하면서도 중심이 되는 이야기의 긴장감을 놓치지 않을 만큼 영리하기도 하다. 장국영과 왕조현, 우마의 존재감 역시 상당해서 자신들에게 할당된 역할을 충실히 소화하고 있다. 더불어 장국영이 직접 부른 '천녀유혼'과 엽천문의 '여명불요래'는 영화만큼이나 유명세를 얻었으며 홍콩영화를 대표하는 영화음악으로 널리 사랑받았다.

<천녀유혼>이 만들어진지 30년 가까이 흘러 제한적으로나마 다시 개봉하는 건 우연한 일이 아니다. 애절하면서도 낭만적인 이야기를 자기만의 스타일로 버무린 솜씨가 영화에 시대를 초월한 생명력을 부여한 결과다. <모던 타임즈>는 당대의 사회문제를 적극적으로 풍자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당산대형>에서 이소룡은 그야말로 혁신적인 액션과 캐릭터를 선보였다. 우리의 지난 천만 영화들 가운데 이만큼 용감하며 혁신적이고 그리하여 시대를 초월해 사랑받는 작품이 과연 몇이나 되는가?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합니다.
천녀유혼 장국영 왕조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