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아메리카 남부에 있는 나라 코스타리카. 인구가 불과 400여만 명밖에 되지 않는 이 아담한 나라의 정식명칭은 코스타리카 공화국(Republic of Costa Rica)이라고 하는데 '코스타리카'는 '풍요의 해안'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고 한다.

수도는 산호세이고 공용어로 스페인어를 사용하며, 북쪽으로는 니카라과, 남쪽으로는 파나마와 접하고, 동쪽은 카리브해, 서쪽은 태평양에 면하고 있다. 코스타리카 사람들은 스스로를 '티코(TICO)'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스페인어의 축소사 티토(TITO)가 티코(TICO)로 많이 사용된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코스타리카는 연중 따뜻한 기온을 지닌 나라답게 커피나 바나나 수출도 많이 하지만, 맑은 카리브해와 아름다운 태평양 연안섬을 가진 천혜의 자연환경으로 많은 관광수입을 얻고 있는 나라라고 한다.

이런 코스타리카가 2002년 한·일월드컵에는 북중미 지역예선을 1위로 통과해 브라질, 터키, 중국과 함께 본선 C조로 참가했다. 코스타리카는 작은 나라이지만 전국에 500여 개의 유소년클럽과 1부리그팀이 12개, 2부리그 팀 21개를 가진 축구의 나라.

스포츠피플21 취재진은 이렇게 축구를 사랑하는 코스타리카 사람들을 한 번 만나보고 싶었다. 그러던 차에 브라질과 코스타리카의 조별예선 마지막 경기가 열리기 일주일 전, 자국대표팀을 응원하기 위해 현지에서 온 헤라르도 사나브리아(50)씨 일행을 수원월드컵 경기장 근처에서 만날 수 있었다.

이들은 인천의 한 한국인 집에서 묵고 있다고 했고, 경기가 있는 날에는 경기를 보지만 그렇지 않은 날에는 한국의 관광명소를 찾아다닌다고 했다. 문득 그들이 한국인 가정에서 어떻게 지내는 지가 궁금해 취재진은 조만간 그들 숙소를 방문해보기로 하고 그날은 그렇게 헤어졌다.

한국이 자꾸 좋아지는데 어떡하죠?

6월 12일 저녁 8시, 취재진은 사나브리아씨 일행이 묵고 있다는 권경임(35)씨 아파트의 초인종을 눌렀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하며 문을 열고 나온 권씨는 전화 목소리로 상상했던 것처럼 밝고 친절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어떡하죠. 지금 두 분은 아직 안들어 오셔서 한 분만 계신데, 잠깐 이야기하고 계셔요. 곧 들어들 오실테니."

권씨가 마실 것을 좀 준비하겠다고 부엌으로 간 사이, 방에서 뭔가를 하고 있던 사나브리아씨가 모습을 드러냈다. 왜 동료들과 함께 밖에 나가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그는 `너무 피곤해서`라며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아닌게 아니라 그는 좀 피곤해 보이기도 했는데, 밖에 비가 오고 있어서 그런지 그는 좀 춥다며 응원용 망토를 몸에 걸쳤다. 그리고 자신이 살고 있는 코스타리카라는 나라를 설명해 주고 싶었는지 한 손에 든 지도를 취재진 앞으로 넓게 펼쳤다.

그는 코스타리카가 한때 스페인의 식민지였다는 것과 지금은 독립해 중남미에서 민주주의가 가장 잘 토착화되고 정치가 안정된 나라로 발전했다는 것, 그리고 연중 날씨가 따뜻해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오레~ 오레오레~ 오레~ 티코스~ 티코스~"

문득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결연한 표정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갑자기 뭐하는 거냐고 물으니 그는 `내일 브라질과의 경기가 걱정돼서`라며 더 목소리를 높여 노래를 부른다. 여기서 티코스(TICOS)는 코스타리카인들을 지칭하는 말.

사나브리아씨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저녁 9시에 가까워졌을 때, 권경임씨의 남편 이무열(37)씨가 사나브리아씨의 동료 브레네스 (40)씨와 카를로스(35)씨를 대동하고 나타났다. 그들은 서울 근교를 둘러보고 왔다는데 아직 한국 풍습에 익숙하지 못했던지 카를로스씨는 신발을 신고 거실로 들어오는 실수를 하기도 했다.

"오 줄리아 이건 나의 진짜 실수~"

카를로스씨가 너털웃음과 함께 신발을 벗어놓고는 다시 거실로 들어온다. 쟁반 가득 마실 것을 들고 나타난 권경애씨가 "줄리아는 저의 영어명이예요"하고 상황설명을 한다.

조금 피곤한 듯한 사나브리아씨와 달리 카를로스씨는 쾌활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말하는 와중에 손동작도 컸고 티브이에서 음악이라도 흘러나올라치면 어김없이 몸을 흔들며 춤을 추기도 했는데, 옆에 있던 브레네스씨는 그의 별명이 `댄스맨`이라고 알려주었다.

"제가 `댄스맨`이라면 이 친구의 별명은 `맥주맨`이죠."

카를로스씨도 이에 질세라 브레네스씨의 별명을 폭로(?)했다. 그는 틈이 나는 대로 맥주를 마시는 사람이라는 것. 밖에서 한 잔 했는지 브레네스씨의 얼굴이 불그스레했던 것은 카를로스씨의 말을 증명하고 있었다.

월드컵을 관람하기 위해 한국으로 올 준비를 하던 이들이 한국의 일반가정에서 숙식을 하는 `홈스테이`를 알게된 것은 인터넷을 통해서다. 호텔같은 데에서 묵는 것보다는 한국의 문화를 잘 알 수 있겠다는 생각에 이들은 바로 인터넷을 통해 홈스테이 신청을 했고 권경임씨 가정에 오게 되었다.

모두 코스타리카 의회에서 일하고 있다는 이들은 한국에 처음 왔지만 별다른 문화적인 충격은 없었다고. 그만큼 한국이라는 나라는 깨끗하고 친절했고 처음 먹어보는 음식들도 모두 고향음식인 듯 입에 척척 달라붙었다고 한다.

하지만 실내에서 신발을 벗는 것과 양반다리, 젓가락 사용에 대해서는 여전히 어색하다고. 그럼에도 그들은 한국이라는 나라가 너무 좋고 사람들도 친근하다면서 코스타리카에서도 한국 열풍이 부는지 수년간 계속되던 일본차 돌풍을 한국차가 눌렀다고 말해주기도 했다.

내일 브라질과 경기가 있는데 어떻게 될 거냐고 묻자 이들의 목소리가 또다시 커진다. 사나브리아씨는 아까 부르던 노래를 또다시 부르고 카를로스씨는 그 곡조에 맞춰 춤을 추자, 옆에 서있던 브레네스씨가 자신감 넘치는 어조로 이렇게 말한다.

"브라질이 강팀이긴 하지만 우리에게도 완쵸페나 폰세카 같은 좋은 선수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꼭 승리해서 16강에 진출하게 될 겁니다."

한국에서의 인상적인 아침상, 그리고 결전으로!!

다음날 아침 9시. 사나브리아씨 일행은 권경임씨 친정에서 아침상을 맞았다. 권씨의 말에 따르면 친정 부모님이 이국에서 온 손님들을 특별히 아침상에 초대했다는 것. 사실 이 날은 이집 둘째 사위가 결혼하고 처음 맞이하는 생일이기도 했다.

처음에 분위기가 약간 어색했던지 머뭇거리던 사나브리아씨 일행은 이내 권씨의 가족들과 친해져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눈다. 모두들 더듬거리는 영어로 서로의 뜻을 전하느라 바쁘기는 하지만, 오랫동안 함께 살아온 가족들처럼 그들 사이의 분위기는 훈훈하기 그지없다.

"글쎄, 보기 전에는 좀 낯설겠구나 막연히 생각했는데, 보고 나니 친근하고 선량하게 보이네. 맘에들 들어."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었다는 권씨의 부친이 이 이방인들에 대한 느낌을 솔직히 털어놓는다. 그의 말이 끝나자 무섭게 사나브리아씨가 권씨의 부친에게 양손으로 곱게 맥주를 따라 바친다. `어른들에게는 양손을 써야한다고 제가 이야기해줬죠`하고 권씨가 옆에서 슬쩍 이야기 해준다.

웃고 이야기하며 식사를 하는 그들을 보노라니 사람 사는 세상에 국경과 인종이라는 게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식사를 하던 도중 사나브리아씨는 오후에 있을 자국팀 경기가 생각났는지 시계를 슬쩍 들어다 보기도 했다.

오후 2시 30분. 취재진은 수원 월드컵경기장에서 사나브리아씨 일행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들에게는 오전까지의 여유 있던 모습보다는 큰 경기를 앞둔 흥분과 긴장감이 더 크게 배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특유의 낙천적인 기질은 감출 수 없었는지 브라질 응원단이건 자국 응원단이건 만나는 족족 그들은 함께 사진을 찍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곧 있을 경기에 대한 열기를 고조시키고 있었다. 경기 시작 30분 전, 그들은 그들만의 화려한 축제를 마치고는 승리의 브이자를 그리며 경기장 안으로 총총 사라졌다.

브라질과 코스타리카의 숙명의 결전. 예상대로 세계최강 브라질은 강팀이었다. 1승 1무를 거둔 채 16강을 위한 배수진을 치고 맹렬하게 공격하는 코스타리카 공격진을 쉽게 무력화시킨 브라질은 호나우두와 히바우두를 앞세워 코스타리카의 문전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군데군데 앉아 있는 코스타리카 응원단의 안타까운 탄성이 잦아지면서 브라질이 득점하기 시작했다. 어딘가에서 자국팀을 열렬히 응원하고 있을 사나브리아씨 일행이 생각나 코스타리카가 선전해주길 바랬지만, 브라질은 축구의 나라답게 만만치 않은 전력을 뽐내고 있었다.

최종 경기결과는 5대 2로 브라질의 승리. 코스타리카의 16강 진출이 아쉽게 무산되는 순간이었다. 경기가 끝나고 밖으로 나왔지만 사나브리아씨 일행을 다시 만나지는 못했다. 그래서 권경임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척 아쉬워하고 있어요. 조금만 더 잘했더라도 코스타리카가 16강에 진출했을텐데. 뭐, 그래도 다들 열심히 했으니까요. 낙천적인 사람들이니까 금방 훌훌 털고 밝은 모습을 되찾을 거예요. 아, 그리고 안부 전해달래요."

수화기 너머로 사나브리아씨 일행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것 같기도 했다. 낙천적인 사람들답게 경기결과에 집착하기보다는 한국에서의 나머지 여정을 어떻게 보낼까 궁리하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월드컵 기간 동안 한국의 가정집에서 머물렀던 것을 사나브리아씨 일행은 후에 어떻게 기억할까. 아마도 새로운 문화, 환경에서 겪은 일들을 그들은 평생 아름답게 간직하고, 잊지 못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국에 돌아가서도 그들은 친구나 가족, 직장동료들에게 한국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전하고 한국에 가볼 것을 권유하는, 친 한국인사가 될 지도 모를 일이다.

`한국이 너무나 좋아졌다`고 자신 있게 말했던 그들. 그들의 밝고 친근한 모습을 볼 수 있었던 1박 2일간의 취재는 축구를 통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가깝게 하려는 월드컵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겨볼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다. `언젠가 코스타리카에서 월드컵이 열린다면 꼭 초대하겠다`던 그들, 그들을 우리는 언제쯤 또다시 볼 수 있을까.

홈스테이를 통해 맺어진 우정

"며칠만 있으면 갈 텐데 이제 너무 친해져서 갈 때 울 거 같아요."

코스타리카 인들과 만난 후 처음 이틀간은 낯설어 서먹했다는 권정임 씨. 영어 강사로 일하는 그녀는 월드컵이 오자 “이때가 기회다”라는 심정으로 홈스테이를 생각했다고. 그녀의 남편 이무열씨도 부인의 생각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회사에서 일하랴 손님들 돌보랴 월드컵 보랴 몸이 두개라도 모자라지만 부인과 남편 모두 즐거운 표정이다.

“한국은 정말 아름다운 나라입니다. 빌딩, 산, 강, 경기장도 너무 멋있어요. 하지만 그것보다 아름다운 건 사람입니다.”

이방인인 코스타리카 인들에게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 사람`이란 사실을 깨닫게 하는 데는 무엇보다 이들 부부의 노력이 컸다. 부부는 자신의 집을 찾은 외국 손님들에게 관광은 물론 한국 사람들과 접할 기회를 자주 제공했다.

며칠 전 권정임씨는 코스타리카 인들과 함께 아파트 친구 집에 놀러갔다. 그 곳에서 만났던 친구의 아이들은 생김새가 다른 이들을 전혀 낯설어 하지 않고 품에 안겨가며 놀았다.

나중에 한 아이는 까를로스씨의 팔에 매달려 “가지말라”며 울 정도. “까를로스는 아이가 우는 거 보고 자기도 같이 울더라고요. 계속 얘기하는 거 보니 그 기억이 굉장히 좋았나봐요.” 무슨 이야기를 하냐고 묻는 까를로스씨에게 그녀가 그 때의 이야기를 하자 “한국에서 경험한 것 중에 가장 잊지 못할 기억”이라며 엄지 손가락을 추켜든다.

“무, 줄리아!” 까를로스 씨가 이무열, 권정임씨의 영어이름을 외친다.
다음 순간 부부를 꼭 껴안는 그는 “내년에는 우리 집에 와야해”라며 이무열씨와 `꼬옥` 새끼 손가락을 걸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스포츠피플21(www.sportspeople21.com)에 실려있습니다.

2002-06-28 17:43 ⓒ 2007 OhmyNews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스포츠피플21(www.sportspeople21.com)에 실려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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