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나무길 산책'4일 전남 나주시 남평읍 은행나무수목원에서 한 모녀가 낙엽 위를 걷고 있다.
연합뉴스
사시사철 계절을 가리지 않고 커피를 사랑하는 나이지만, 가을이면 유독 더 자주 커피에 홀리곤 한다. 혼자만의 생각일지는 몰라도 떨어진 나뭇잎들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그 낙엽들이 바람에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광경, 그리고 낙엽 태우는 냄새를 한꺼번에 듣고 목격하는 날이면 '늦은 오후에는 절대 커피를 마시지 않으리라'는 굳은 다짐도 물거품이 돼 버리곤 한다. 커피를 무척이나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이 아찔한 유혹을 견딜 재간이 도무지 없음이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내 첫 인생 커피 역시도 그윽한 가을에 마신 커피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살짝 우스울 수도 있지만 대학 3학년 가을, 노란 은행 잎들이 햇살을 받아 눈부시던 대도서관 1층의 자판기 커피였다. 소위 공부에 꽂혀서 도서관 문은 내가 여닫는다는 마음으로 진짜 열심히 학업에 정진하던 시절이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웬만해선 커피를 잘 마시지 않던 나였지만 몰려오는 피곤함에 어쩔 수 없이 커피나 한 잔 하자고 자판기 앞에 서게 된 것이다.
'가을'이라는 계절감이 주는 영향이었을까, 아니면 유독 눈부시게 빛나던 은행잎과 사그락 거리는 바람소리 때문이었을까, 이전에도 먹어보지는 않았음인데 그날따라 입에 착착 감기는 '밀크커피'의 향이 온몸에 전해져 아주 오랫동안 음미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손끝이 시려올 때까지 한참을 혼자 벤치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던 것 같다. 이전 같았으면 서둘러 열람실 내 자리로 돌아갔을 테지만 왠지 그날만큼은 가을 정경에 스스로 녹아들어 빠져나오고 싶지 않았음이다. 기억으론 한 잔에 겨우 100원밖에 하지 않았었지만, 그 어떤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의 커피보다 진한 잔향을 남겼던 어느 가을날의 커피였다.
늦가을과 커피의 기막힌 궁합
그로부터 세월이 한참 흘러 우연처럼 늦가을 무렵 다시 인생 커피를 만나게 됐으니, 이만하면 내 커피 이력을 형성한 계절들 중 가을이야말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계절임에 분명하다. 한 가게 건너 한 가게가 카페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커피사랑이 대단한 우리나라이기에 내가 사는 동네에도 미처 다 헤아리지 못할 정도로 다양한 종류의 커피를 파는 곳이 즐비하다. 주객이 전도된 건 아닌가 싶은 도넛 가게와 빵 가게에서 파는 커피에서부터 이 카페가 있는지 없는지로 '세권'을 가린다는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에다 소소하지만 머물고 싶은 작은 동네 카페까지 선택지도 아주 다양하다. 한창 일을 했을 무렵 마감 시간이 임박한 원고를 쓰기 위해 노트북을 들고 대형 카페 중 한 곳에 들른 적이 있었다.
가끔 들른 그 카페에서 청년들이 과제도 하고 스터디도 하는 걸 목격했고 혼자 조용히 앉아 글을 쓰기에 왠지 꽤 괜찮은 선택지처럼 보였었다. 하지만 주문한 커피를 다 마시기도 전에 쫓기듯 도망을 나올 수밖에 없었음이다. 나름대로 만반의 준비를 해 이어폰을 장착하고 음악을 듣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들려오는 대화의 목소리들이 유난히 예민했던 내 귀에 거슬렸음인데, 거대한 공간을 울리는 그 목소리들이 모이니 마치 군중의 시위 같은 느낌이 순간 전해져 왔었다. 그래서 차선으로 선택한 곳이 바로 동네에 자리한 아주 자그마한 카페였다.
바리바리 어깨에 짐을 둘러메고 이곳저곳 물색 끝에 찾아낸 그곳은 한 건물 귀퉁이에 자리해 있었고 더군다나 세로로 길쭉한 외양을 가지고 있어서 얼핏 보면 '이곳이 진짜 커피를 내리는 곳이 맞을까?' 하는 의구심을 자아내는 카페였다. 그날 난생처음 내가 사는 곳에 이런 동네 카페가 자리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이때도 마침 늦은 가을이었고 살짝 열린 유리문으로 새 나오는 커피 향은 다른 계절의 그것보다 꽤나 매혹적으로 다가왔다.
커피 향 가득한 거리 벤치에서
해가 지는 저녁 보낸 기억 있나요
꽃내음 가득한 들녘 언덕에서
쏟아지는 비를 맞은 기억 있나요
낯익은 아픔은 밤이
깊을수록 더하지만
밤은 새롭기만 해요
낯익은 아픔은 비가
내릴수록 더하지만
비는 새롭기만 해요
마지막 가을비는
우산 없이 맞고 싶어요
10월의 후회를 씻고 싶으니까요
- 신형원 '커피향 가득한 거리' 가사
커피 머신 앞에 자리한 둥근 탁자에 앉아 서둘러 원고를 써 보내고 카페 주인장이 정성스레 내려준 커피 향에 젖어들며 이 노래를 선곡해 들었었다. 아쉽게도 노래에서처럼 마지막 가을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늦가을 특유의 쓸쓸함과 고즈넉함이 보도 위로 쉼 없이 흩날리던 오후, 세상 모든 사물들이 긴 하루를 마감하며 잠시 쉬어가던 그 시간 만나게 된 커피는, 대학 3학년 가을 대도서관 앞에서 만났던 자판기 커피 이후 새롭게 내 인생 커피가 됐고 신형원의 맑고 무해한 목소리로 들리던 이 노래는 늦가을이 들 무렵이면 항상 선곡해 방송하는 플레이리스트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그리고 이름 없는(사실 왜 이름이 없겠는가, 하지만 동네 사람만이 알기에 유명하지는 않다는 뜻일 게다) 그 카페도 어느새 10년 이상 내가 가장 애정하는 커피가 있는 소중한 곳, 혼자 마시던 커피를 누군가와 함께 마시며 이야기 나누는 공간이 됐음은 두말 할 것도 없고.
가을에 느끼는 '감성의 삼합'
커피 없는 가을 오후를 상상해본 적이 있는가? 빛바랜 계절도 어느덧 약속된 시간의 문을 나설 즈음, 길게 드리운 그림자 위로 커피 향이 은은하게 퍼져야 그게 가을의 오후다. 누군가가 기분 좋게 밟고 지나가는 낙엽의 바스락 거림이 향에 얹힌다면 그야말로 더할 나위 없음이다. 커피와 오후 세 시쯤의 낙엽이 흩날리는 가을 풍경, 그리고 여기에 노래에서처럼 가을비까지 더해진다면 그야말로 감성의 삼합, 낭만의 끝판왕 아닐까.
오늘 오후에도 커피를 사랑하는 이들은 생각보다 오래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조그만 동네 카페로 발걸음을 옮긴다. 아이들 입시 얘기부터 시작해, 해치워야 할 김장 얘기, 카페 앞 작은 공간을 이용해 어묵 장사나 해볼까 라는 누군가의 귀여운 궁리에, 금리인상에 따른 이자부담과 각자의 금융계획까지 주제도 다양하고 의견은 더욱 각양각색이다.
우스갯소리로 자고 나면 또 다른 카페가 생겨난다고 하지만 이들이 동네 카페의 커피를 고집하는 이유는 커피 자체가 가지는 치유의 기능 외에도 이렇게 매일 같이 얼굴을 마주하며 커피를 함께 나누는 이들의 공감이 한 스푼 더해지기 때문은 아닐까?
창밖으로 벚꽃나무 가로수가 철마다 달리 보여주는 모습에 누구랄 것도 없이 감탄하고, 창을 열고 내놓은 탁자에서 삐그덕 거리는 소리에 함께 웃음 짓다가, 지나다니는 서로에게 반가운 눈인사를 하거나 '커피 한 잔 하고 가지'라는 말을 정답게 건네는 곳. 그런 곳에서 마시는 늦가을의 커피는 누구에겐 대단히 평범할 수도 있겠지만 내겐 어쩐지 각별하다. 혼자 즐기던 커피를 함께 나누는 커피로 바꿔준 곳이기에 말이다. 쓸쓸함의 정점에서 역설적이게도 따스함을 느끼게 되는 시간: 늦가을의 오후, 때 맞춰 마지막 가을비라도 소슬하게 내려 준다면 무척 근사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