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칼리버>(1981)
ⓒ WB

@BRI@'엑스칼리버', '원탁'과 함께 아더왕 이야기의 핵심을 이루는 것이 바로 '성배'(Holy Grail)다. 엑스칼리버를 얻어 왕이 된 아더는 원탁의 기사들과 함께 나라를 통일하지만 총애하던 기사 랜슬롯과 왕비 기네비어가 불륜을 저지르자 실의에 빠진다. 죽어 가는 아더왕을 살리기 위해 기사들은 성배를 찾아 나선다. 성배는 예수가 마지막 만찬 때 사용했다는 잔이다. 자신의 피라며 포도주를 따라 주었던 바로 그 잔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로마 병사가 그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는데 이때 흐르던 피를 성배에 받아 내었고, 이 성배와 로마 병사의 창이 영국으로 건너왔다는 전설이 아더왕으로 이어진다. 어떤 학자들은 켈트족 전설에 등장하는, 끝없이 음식을 만들어 낸다는 거대한 솥에서 성배의 기원을 찾기도 한다. 아더왕과 성배의 이야기는 기독교와 켈트족 이야기가 섞여 있거나 동시에 발전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고전 트럼프의 문양이 칼, 금화, 방망이, 잔이었던 것처럼 서양 문화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해리포터와 불의 잔>(2005)
ⓒ WB

우리에게 아더왕 이야기는 어렸을 때 읽는 책이거나 만화 영화로 기억되지만 서양인들에겐 성인용으로 이해된다. 아더왕 이야기 자체도 문학이나 영화로 여러 차례 만들어졌지만 엑스칼리버, 원탁 그리고 성배와 같은 이미지들 역시 끊임없이 오르내리고 있다. 해리 포터 시리즈에 등장하는 '불의 잔'이나 '우승 트로피'에도 성배의 그림자는 드리워져 있다. 성배는 어떻게 생겼을까? 여러 갈래 전승에 따라 다르지만 은으로 된 술잔이 일반적인 표현이다. 마지막 만찬에서 쓴 잔이라는 것에 성스러운 느낌을 주는 은을 결합시킨 것으로 여겨진다. 어떤 전승에서는 접시나 솥으로 묘사되기도 하지만 이 경우에도 재질은 은으로 묘사되고 있다.
 <엑스칼리버>(1981)
ⓒ WB

아더왕 전설을 다룬 영화 <엑스칼리버>(1981)에 등장하는 성배 역시 은으로 된 잔이다. 'Grail'은 접시라는 뜻도 있고 잔이라는 뜻도 있기 때문에 영화에서 묘사한 바로 그 모양을 지칭한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오늘날 성배라면 영화에 등장하는 모양처럼 서양식 잔인 경우가 많다. 천주교 미사에서 사용하는 잔인 '성작'도 거의 같은 디자인이다. 은으로 만든 성배에 이의를 제기한 것이 <인디아나 존스-최후의 성전>(1989)이다. 인디아나 존스는 아버지가 죽어 가는 상황에서 수많은 잔 가운데서 성배를 골라야 한다. 상식대로 은으로 된 잔을 고르려던 인디아나 존스는 초라한 나무잔을 고른다. 목수였고 낮은 자리를 자처했던 예수가 고급스런 은잔을 썼겠는가 추리한 것인데 그 선택은 옳았고 아버지의 목숨을 구한다.
 <인디아나 존스-최후의 성전>(1989)
ⓒ Paramount

예수의 마지막 순간을 당시 언어로 대사를 처리할 정도로 최대한 사실적으로 묘사했다는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2004)에 등장하는 마지막 만찬은 소박하기 그지없다. 당시 쓰이던 물건을 고증했다는 식탁에는 토기로 여겨지는 잔이 등장하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성배보다는 그냥 컵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 영화에선 로마군 병사가 창으로 찌르는 장면은 등장하지만 그걸 잔으로 받아내는 장면은 없다. 마지막 만찬에 쓰인 잔은 기독교 이야기고, 그것으로 피를 받고 영국으로 건너오는 것은 켈트족 이야기라는 것이 학자들의 설명이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2004)
ⓒ ICON

어쨌거나 성배는 잔이나 접시로 여겨졌지만 아더왕 전설을 문학으로 풀어내는 과정에서 색다른 의견들도 존재했다. 누구는 성배를 '성스러운 돌'로 해석했는데 신들의 전쟁 과정에서 인간 세상으로 숨겨진 것이라는 얘기였다. 좀 더 적극적인 해석에서는 성배가 자유자재로 모습을 바꾸거나 이동하는 존재로 등장하기도 한다. 요정이 사라진 자리를 UFO가 대신하는 것처럼 현대인들은 좀 더 분명한 해석을 원한다. 신성모독 시비에도 휘말렸던 <다빈치 코드>(2006)에선 성배는 성혈을 담는 잔이긴 하지만 잔은 아니라는 해석을 내린다. 소설 <다빈치 코드>가 표절 또는 중요하게 참조했다는 책도 제목이 <성배와 성혈>로 성혈은 단순한 피가 아니라 혈통을 뜻하며 성배는 그 혈통을 이어가는 자손들이라는 얘기다.
 <다빈치 코드>(2006)
ⓒ Columbia

<다빈치 코드>가 성배의 기독교 측면에 대한 현대적 해석이라면 <킹 아더>(2004)는 아더왕 전설에 대한 현대적 해석을 시도한다. 아더왕이 실존인물이라는 역사적 증거가 발견되지는 못했는데 <킹 아더>는 최근 제시되고 있는 소수의견을 과감히 채택한다. 영국을 점령했던 로마군 일부가 현지 토착세력과 연합하여 왕국을 세웠다는 의견에 귀 기울인 결과 아더왕은 로마군 지휘관 아토리우스가 된다. <킹 아더>에는 원탁은 등장하지만 엑스칼리버나 성배는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영화가 적극 수용한 아토리우스 설이 사실이라면 기독교 성배 이야기가 영국에 진출한 로마군을 통해 켈트족 전설과 만났다는 추론도 가능하다. 성배를 찾아 나서는 할리우드의 여정은 아직 끝을 보지 못했고, 어쩌면 내년쯤엔 성배와 외계인의 관계를 밝히는 영화가 나오는 것은 아닐까?
 <킹 아더>(2004)
ⓒ Touchst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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