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물 여덟, 짧지만 깊은 의미를 남긴 한 여성 노동자의 삶을 그린 영화 <실크우드>(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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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초의 핵잠수함에 SF 소설에 등장했던 꿈의 잠수함 이름 '노틸러스'를 붙여주었던 것처럼 미국은 핵에너지를 꿈의 에너지로 여겼다. 미국의 적들에게 가공할 불벼락을 내리는 핵무기와 에너지 소비가 유난히 큰 미국 내부에는 무한정 에너지를 공급하는 핵발전소를 양손에 들면 거칠 것이 없었다.

1950년대 미국은 하루가 멀다 하고 핵실험을 반복하며 핵무기 개발에 열중했고 핵발전소가 상업운전을 시작한 것도 이때였다. 핵에너지는 그 위력만큼 다루기 까다롭고 인간에게 치명적인 방사능 피해를 주기도 하지만 핵을 꿈의 에너지로 생각했던 미국은 이 모든 것을 무시하고 더 강력한 핵을 손에 넣기 위해 달려 나갔다.

1970년대 들어 핵에너지로 인한 비극들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1950~60년대 핵실험에 참여했던 군인들과 기술자들이 그 첫 희생자였다. 방사능에 노출되어 암과 백혈병에 시달렸던 것이 핵실험에 의한 것임을 알고 언론에 호소하고 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아직 미국인들은 이렇게 드러난 피해조차도 핵실험에 참여하는 특수한 사람들의 것으로만 여겼다.

미국 오클라호마 주 커맥기 핵연료 재처리 공장에 다니던 카렌 실크우드도 방사능 오염의 피해자가 될 운명이었지만 자신이 위험할지 짐작도 하지 못했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대부분의 미국인들처럼 말이다. 매일 무심코 지나치던 방사능 검사기에서 경고음이 들리기 시작하면서 실크우드는 핵의 무서움, 좀 더 정확하게는 핵을 휘두르는 자들의 어두운 면과 맞닥뜨리게 된다.

방사능의 무서움 알리려다 의문사한 여성의 삶을 영화화한 <실크우드>

▲ 핵연료 재처리 공장에 다니던 실크우드 조차도 자신이 오염되기 전까지 방사능 위험을 실감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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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우드는 방사능 오염을 이유로 직접 핵연료와 접촉하지 않는 작업장으로 옮겨지지만 방사능에 오염은 계속되어 이미 폐까지 오염된 자신을 발견한다. 노조와 함께 실태 조사에 나선 실크우드는 이미 공장 전체가 오염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방사능 위험을 덮으려고만 하는 회사에 맞서 실크우드는 뉴욕타임스에 연락한다.

하지만 그동안 모은 자료를 가지고 뉴욕타임스 기자를 만나기 위해 떠났던 실크우드는 1974년 11월 13일 자신의 자동차에서 주검으로 발견된다. 경찰은 졸음운전으로 인한 사고사라 황급히 결론짓고 자동차에선 그녀가 준비했던 자료들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뒤였다.

살아 있는 동안 그녀의 주장이 철저히 묵살된 것처럼 실크우드의 죽음 역시 망각 속으로 묻혀 버릴 위기에 놓였다. 하지만 가족들과 회사 동료들을 중심으로 의문의 죽음을 밝히려는 노력이 이어졌고 이는 노조와 환경단체들에 의해 반핵운동으로 나아간다. 문제의 커맥기 핵연료 재처리 공장은 이듬해 문을 닫았고, 1986년 미국 연방대법원은 회사 측은 실크우드 유족에게 1000만 달러를 지급하라고 판결한다.

한 노동자의 의로운 삶이 핵에너지를 광신하던 미국에 경종을 울리고 반핵운동을 이끌어냈던 사실은 1983년 영화 <실크우드>로 만들어져 대중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실크우드의 삶을 담담하게 그려낸 이 영화로 인해 잊혀져가던 그녀의 삶과 노력이 새롭게 알려지고 주목받았다. <실크우드>는 연방대법원이 실크우드 유족의 손을 들어주는 데에도 큰 영향력을 끼친 것으로 평가받았다.

회사, 실크우드 유족들에게 1000만 달러 배상 판결

▲ 할리우드를 떠받치는 연기파 배우 메릴 스트립. 평론가들은 그녀의 대표작중 하나로 <실크우드>를 꼽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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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인 것은 <실크우드>가 잘 만들어진 영화라는 것이다. 섣부른 투쟁담이나 의문사를 파헤치는 미스터리가 아니라 그녀가 맞닥뜨린 핵에 대한 공포, 그 공포를 무시하고 감추려는 거대한 벽을 애써 과장하지 않으며 자연스럽게 그려 나가고 있다. 그녀가 평소 일하고 쉬며 사랑하는 장면들에서는 미국 노동계급의 삶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이 느껴진다.

많은 예산이 투입되고 스튜디오가 밀어주는 그런 영화는 아니었지만 할리우드 실력파들이 고루 참여한 것은 고인에게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졸업>의 마이크 니콜스가 감독을 맡았고 <소피의 선택>을 마친 메릴 스트립과 <괴물>을 마친 커트 러셀이 주연을 맡았다. 개성파 배우이자 가수인 셰어가 조연으로 활약하고 훗날 <유브 갓 메일>을 연출하게 될 노라 애프론이 시나리오를 맡았다.

<실크우드>는 한때 우리 대학가와 시민단체에서 반전반핵을 주제로 행사를 할 때 상영되곤 했었다. 영화가 담담하고 선동적인 면이 없던 탓이었는지 반핵운동 교재로는 전성기가 길진 못했다. 하지만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메릴 스트립 연기를 칭찬하며 그녀의 대표작 중 하나로 <실크우드>를 꼽고, <에린 브로고비치>의 원형을 <실크우드>에서 찾는 평론가가 있는 것처럼 영화로서의 가치는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사람의 삶과, 그 사람을 그린 영화가 모두 아름다우니 <실크우드>야 말로 고마운 일이다. 오래 전 비디오로 출시되었지만 어지간히 관록이 있는 대여점이 아니라면 없기 쉽고 중고 비디오로나 어쩌다 마주치니 못내 아쉽다. 영화 산업이 급성장하고 할리우드 직배가 발달된 대한민국이지만 <실크우드> DVD 하나 발매되지 않는 것이 씁쓸한 현실이다.

▲ 미국 노동당 신문에서 운영하는 실크우드 추모 사이트.
ⓒ LPO
2006-11-24 11:55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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